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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야, 이번 투표는 무조건 1번을 찍어라, 1번!"

어린 시절 할머니는 선거 때가 되면 가족들에게 무조건 1번을 찍으라고 강권하셨다. 기자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는 당시 여당의 표밭이라고 불릴 만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여당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할머니는 동네 노인정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모르겠으면 무조건 '1번'을 찍어라" "한나라당이 괜히 1번이겠느냐, 1등으로 일을 잘하니까 1번"이라며 여당에 힘을 실어줬다.

현재 우리나라의 각종 선거에서는 정당 우선순위에 따라 후보자별로 번호를 부여하고, 선거벽보와 투표용지에도 그 번호 순서대로 등재하고 있다(공직선거법 제150조). 학계와 정치계는 '정당이 가진 의석별로 후보들의 순번을 정하는 정당기호제(선거기호제 혹은 기호순번제) 아래에선 거대정당의 후보들이 유권자들에게 먼저 각인돼 당선에도 유리하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해왔다. 우리나라 국회가 개원한 이래로 유력 정당들은 지금까지 이런 '순서 효과'의 덕을 톡톡히 봤다.

 정당기호제에 따라 현재 기호 1번은 새누리당, 2번은 민주당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사진은 2013년 10·30 경기 화성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 사용됐던 투표용지.
 현행 정당기호제에 따라 현재 기호 1번은 새누리당, 2번은 민주당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사진은 2013년 10·30 경기 화성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 사용됐던 투표용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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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의 논문 <지역균열의 정당체제와 선거제도 개편>(2011년 2월) 등 학계에서는 투표용지 우선 순서에 따른 편견과 유불리를 연구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미국과 호주·영국 등을 사례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작게는 1%에서 크게는 4%까지 순서에 따라 득표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거대정당 순으로 기호가 붙어 순번이 결정되기에 그 효과는 더 클 것으로 추론된다.

김범수 연세대 국가관리 연구원 박사는 지난해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정치혁신실행위원회 정책세미나에 참석해 "(정당기호순번제 때문에) 선거평가의 본질적인 대상인 후보자보다 비본질적인 기재 순서와 기호가 득표율을 좌우하고 있다"며 현행 제도를 비판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김만흠 원장도 "전국적으로 통일된 기호까지 붙이는 우리의 투표용지 게재 방식에서는 다수 정당이 누리는 프리미엄이 더 클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정당기호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거대정당 순으로 선거기호가 결정됐던 것은 아니다. 1952년에 제정된 '대통령·부통령 선거법'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 등의 선거기호는 중앙선거위원회위원장의 추첨에 의해 결정됐다. 1, 2, 3 등의 숫자 대신 Ⅰ, Ⅱ, Ⅲ 등의 부호가 각 후보들에게 배정됐다. 그랬던 것이 1969년 1월 23일 국회에서 다수의석을 가진 정당 순으로 1, 2, 3 등의 기호가 배정되도록 관련 법률('대통령 선거법')이 개정됐다. 기타 정당의 대통령 후보는 정당 명칭의 가나다 순에 의해 순서를 정하도록 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포스터 1963년 당시 제5대 대통령선거때는 추첨을 통해 후보자들의 순서를 정했다.
▲ 제5대 대통령선거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포스터 1963년 당시 제5대 대통령선거때는 추첨을 통해 후보자들의 순서를 정했다.
ⓒ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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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선거에서도 처음에는 의원후보자나 그 대리인이 참석, 추첨을 통해 선거기호가 결정됐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법'이 개정된 1969년, 국회의원 선거법도 개정돼 정당의 의석수에 의해 1, 2, 3 등으로 순서가 정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른바 '3선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등 장기독재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 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던 제1당은 5·16 군사쿠테타(1961)의 핵심세력들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이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그 후 1년이 지난 1980년 12월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후보의 순위결정 방식을 잠시 정당기호제에서 추첨제로 바꾸었다. 이어 1981년 1월 국회의원선거법도 개정되면서 정당의석수가 아닌 추첨을 통해 후보자 순위가 결정됐다. 추첨은 정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자 그룹과 공천을 받지 않은 무소속 후보자 그룹이 나눠진 뒤 따로 이뤄졌다. 이런 추첨을 통해 정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자들이 우선적으로 앞 번호를, 무소속 후보들이 그 뒷번호들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4년 6월 13일 치 <동아일보> 기사(선거법 협상 실무자 회담 여측 정당기호제에 찬성)에 따르면, 당시 제1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은 '추첨으로 투표용지 후보자 인쇄 순위를 결정토록 한 현행법을 고쳐 정당기호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제1당 후보를 1번, 제2당 후보를 2번 등으로 하고 기타 후보자에 대해서는 성명 가나다 순으로 순서를 정하자고 한 것.

이 제안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찬성했지만, 소수당이이었던 한국국민당(국민당)은 "기존의 원내세력에 의해 다음 선거가 영향받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결국 1987년 민정당과 민한당은 국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추첨제를 폐지, 정당기호제를 부활시켰다.

이처럼 기득권 세력에 유리하게 개정된 두 개의 선거법(대통령 선거법과 국회의원 선거법)은 1994년 제정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공직선거법)에 그대로 흡수됐고, 지금의 공직선거법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수 정당에 유리한 정당기호제는 1969년부터 2014년까지 약 46년 동안 적용돼왔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진보정당 등 새로운 정치세력에는 진입장벽 중 하나로 작용했다.

진보정당들의 문제제기 "후진적인 기득권 유지 수단"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소수정당들은 '선거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는 3월 신당 창당을 준비 중인 새정치추진위원회(아래 새정추)는 지난 7일 '기초선거에 한해 정당기호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새정추 소통위원장을 맡고 있는 무소속 송호창 의원은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시키는 제도는 폐지해야 한다"며 "이 제도는 제1당이나 유력 정당의 지위를 강화하는, 후진적인 기득권 유지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신당을 창당할 경우 신당은 1~4번을 받는 새누리당, 민주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에 이어 기호 5번을 받게 된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도 지난해 12월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구성을 앞두고 "선거의 규칙은 공정해야 한다"며 의석수에 따라 기호를 배정하는 방식을 문제삼았다. 그러면서 "공정한 기회를 통해 정정당당한 경쟁이 되기 위해선 추첨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심 대표는 '정당기호제를 폐지하고 기호추첨제를 도입하자'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추첨을 통해 투표용지나 선거벽보의 게재순위를 정해 선거의 공정성을 제고하자는 취지다.

노동당도 지난 16일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의회 정치개혁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소수정당에 공정한 규칙을 확립하기 위해 '후보자 기호순번제 전면폐지'와 함께 '비례대표 최소 50% 확대' '중선거구제 전면 시행' 등을 제시했다.

지난해 1월 녹색당과 녹색당 소속 당원 네 명은 정당기호제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김수민 구미시의원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지금의 현행법은) 투표용지 우선순위에 오르는 다수당에 '득표율 가산점'을 주는 꼴"이라며 "이것은 헌법 제11조 평등권과 제25조 공무담임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하승수 녹생당 공동운영위원장도 인터넷매체 <프레시안>의 기고글에서 "그냥 정당만 보고 투표하라는 것"이라며 "전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대한민국에서 '번호 보고 찍는' 투표 용지를 나눠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정당기호제는 유권자가 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숫자는 이름이나 정당명보다 훨씬 더 기억하기 쉽고, 기호를 통해 정당의 일체감을 주기에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정당기호제를 폐지하면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당기호제 폐지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김만흠 원장은 그의 논문에서 "그러한 편익에 비해 평등권 침해의 문제점이 더 심각하다"며 "정당의 일체감은 정당명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기호화가 오히려 '묻지마 투표'를 조장해 선거민주주의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에 없는 것은? 정당기호제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에는 거대정당을 우선으로 하는 정당기호제가 없다. 또 후보자 기호는 우리나라의 교육감 선거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처럼 추첨에 의해 결정되거나 알파벳순 또는 순환제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추첨을 통해 후보 순서를 정한다. 일부 주들은 현역 의원이나 양대 정당을 앞쪽에 배치했다가 법원으로부터 위헌 결정을 받아 시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투표용지에 지명이 확정된 후보자의 성명·주소·직업이 후보자 성명의 알파벳 순위로 인쇄된다. 프랑스는 투표용지에 선출할 의원의 수만큼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 따라서 투표용지에 후보자 순위 결정을 할 필요가 없다.

 2013년 7월 일본 참의원선거 유세 현장. 일본 선거에는 후보자에게 기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투표기재 방식도 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연필로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쓰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2013년 7월 일본 참의원선거 유세 현장. 일본 선거에는 후보자에게 기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투표기재 방식도 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연필로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쓰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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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독일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이전 선거의 정당득표율에 따라 기호순서를 정한다. 이전 선거에 진출하지 않았던 군소정당 출신 후보들은 알파벳순으로 순서를 정한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독일 유권자들은 인물이나 기호보다는 정당의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후보 기호가 없는 나라도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유권자는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투표하지 않고, 연필로 후보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 볼펜이 아니라 연필로 작성하는 이유는 잉크 때문에 종이가 서로 달라붙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연필로 이름을 또박또박 쓰면 되는데, 이름이 헷갈려 성이나 이름만 썼을 경우에는 반수(0.5표)로 계산한다.

구춘권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당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는 후보의 기호가 선거득표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치문화가 미성숙하다는 증거"라며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정당기호제 문제뿐만 아니라 비례대표제를 강화하거나 선거구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투표 비례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구소라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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