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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오마이뉴스>로부터 '19기 인턴기자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꿈꿔왔던 일인 데다 혼자 서울생활을 한다는 게 마냥 신났다. 

인턴 생활을 위해서는 우선 서울에서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우리집은 대구에 있고 출근까지는 일 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인터넷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 검색한 결과, 회사에서 철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에 있는 고시원을 찾았다. 고시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상으로는 넓고 쾌적해 보였다. 작지만 창문도 있었다. 

고시원에 입주하던 날, 새로운 기분으로 힘차게 대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문에 걸려 있던 종이 맑고 청명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종소리와 달리 고시원은 어두컴컴했다. 좁고 어두운 복도에는 빨래 건조대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불 보따리를 옮기다가 빨래 건조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여기 와이래 캄캄하노, 낮이라 그카나 불을 안 키니까 하나도 안 비네."

나의 슬픈 고시원. 인터넷에서 본 쾌적한 느낌과는 달랐다.
 나의 슬픈 고시원. 인터넷에서 본 쾌적한 느낌과는 달랐다.
ⓒ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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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방은 넓고 환하고 깨끗하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내가 지내게 될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본 '넓고 쾌적한' 느낌이 아니었다. 좁고 으슥했다. 벽지는 칙칙한 회색이었다. 조명도 책을 읽으려면 스탠드를 켜야 할 정도로 환하지 않았다. 게다가 천장도 높았고 스프링클러 배관도 훤히 드러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 공사 중인 건물에 사는 느낌이 들었다.

방을 둘러본 엄마는 "세련된 교도소 같다"고 했다. 아빤 "최신식 닭장"라고 하셨다. 그만큼 좁았다. 딱 한 명만을 위한, 잠만 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침대도 병원의 보호자 침대 크기만 해서 잘못 돌아눕다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살다가 보니 고시원 뒤쪽엔 폐가도 몇 채 있어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울 사람들, 다 이런 건 아니죠?

앞서 말했듯 내가 지낸 고시원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공용전기세는 1/n로 내야 했기에 다들 복도등을 켜지 않는 것 같았다. 컴컴한 복도를 지나다 어떤 방에서 누가 문을 열고 나오면 나는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엄마야!"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택배 상자가 어떤 방 앞에 놓여 있더라도 어두워서 보지 못해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빨래를 했는데 빨래를 널 곳이 마땅찮았다. 마침 옆방 사람의 빨래 건조대가 좀 비었기에 내 빨래도 널었다. 쿠키를 챙기고 옆방 문을 두드렸다. "제가 빨래를 했는데 널 곳이 없어서 빨래 건조대에 널었어요. 마르면 바로 걷을게요. 미안해요"하며 쿠키를 건넸다. 옆방 사람은 별 거리낌 없이 그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준비에 정신이 없어 빨래 걷는 것을 깜빡했다. 퇴근 후 돌아와보니 내 방문 앞에 전날 널어놓은 빨래들이 쌓여 있었다. 마침 옆방 사람이 나왔다.

"저기요, 어제는 그쪽이 이미 널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나갔지만 계속 제 것 쓰라고 한건 아니었거든요?! 앞으로 제 것 쓰지 마세요."

톡 쏘아대는 옆방 사람. 내가 그렇게 잘못 했나 싶었다. 예부터 '서울 사람 깍쟁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

옆방의 소리까지 다 들리는 나의 집 '고시원'. 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옆방의 소리까지 다 들리는 나의 집 '고시원'. 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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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고했어. 이제 퇴근해."

모든 직장인에게 반가운 소리다. 물론 '인턴'인 나도 이 말을 들으면 반갑다. 그런데 퇴근하라는 명을 받잡고 회사를 나서지만 언젠가부터 '고시원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부터 컴컴하고 무서운 그 곳. 방문을 열면 뽁뽁이로 도배된 창문으로 아주 희미한 불빛만 들어오는, 삭막하고 생명감 없는 곳. 내게 고시원은 그랬다. 하루를 돌아보며 뿌듯한 날도 있었고 자책하는 날도 있었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외로움, 공허함만이 내 기분을 지배했다. 불을 켜면 겨우 어둠이 가셨다. 생명력 없는 그 곳에서 나는 벽을 마주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친구,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지만 고시원은 방음에 취약했다. 석고보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의도치 않게 옆방 사람의 전화소리, 생리 현상을 참지 못하고 배출되는 소리까지 듣게 됐다. 잘 때 돌아눕다가 팔꿈치로 벽을 치면 '쿵'하는 소리가 들려 잠잘 때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고시원 생활에 점점 지쳐갔다. 외로움과 적막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소심해져갔다. 소음과 어둠에 대한 스트레스도 점점 커졌다. 그 무렵 확성기를 내 귀에 대로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나오는 꿈을 자주 꿨다. 자다가 식은 땀을 흘리기도 했다. 도중에 깨는 것도 모자라 6시 50분으로 맞춰놓은 알람보다 10~20분 더 일찍 일어났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길 잃고 쓰러지다

아침저녁으로 발제하는 사회부 기획안이 '진부하다. 대안은 뻔하지 않겠냐'며 '킬'되는 날이 이어졌다. 밖에 나가서 아이템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날(24일)은 대한문 앞에서 '이명박 구속과 박근혜 사퇴 위한 3차 기독교 평신도 거리 시국기도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아이템도 찾고 취재도 하자는 목적으로 길을 나섰다.

오후 2시 반쯤, 1호선을 타고 시청역에 내렸다. 그런데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어지러웠다. 지하철역의 천장과 바닥이 뒤집혀 보였다. 얼른 나가야겠다 싶어 출구를 찾았는데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출구가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모르겠는데요", "바빠요. 딴 데 물어보세요"라는 답들이 돌아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탁 막혀오는 것 같았다. '나 이대로 여기서 못 나가는 건 아닌가'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어지러움이 더해져 걷다가 픽 넘어졌다. 그런데 넘어진 나를 보고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서러움이 밀려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 걷는데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겨우 계단을 오르다가 또 넘어졌다. 걷다가 유리문을 하나 열자 '시민청'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내 데스크를 겨우 찾아가 출구와 병원을 알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내게 찾아온 우울증세, 어떡하지

안내데스크 직원의 도움으로 '기어오다시피'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고 진료를 기다리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 살았구나'하는 안도감과 넘어진 나를 지나치던 서울 사람들에 대한 야속함이 밀려왔다.

의사와 마주한 자리에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갑자기 바뀐 환경과 처음 하는 서울 생활에 내가 적응을 못한 데다 지금 살고 있는 고시원 환경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수액을 맞고 잠시 쉬라고 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나를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람들이 주사바늘을 들고 달려드는 꿈을 꿨다. 그 고시원에서 지낸 지 22일째 되던 날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의사의 권유로 수면환경부터 바꾸기로 했다. 홍대 근처에 있는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학가에 있는 곳이다 보니 거리에서도 활력이 느껴졌다. 고시원은 전에 있던 곳보다 밝고 깨끗했다. 고등학교 동문이자 같이 인턴을 하는 언니도 그곳에 살고 있어 외로움도 덜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잘 살아보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누군가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꼭 도와줘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박윤정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고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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