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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를 신뢰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침내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제국의 공동 운영자 중의 한 사람으로 점지하고 그것을 확실시한다는 의미로 그를 인척의 반열에 올린다.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기혼이었던 아그리파를 부인과 이혼 시키고, 자신의 딸 율리아(이 딸은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딸)와 결혼 시킨다. 이로써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에서 네로로 이어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복잡한 결혼 정책을 쓴다. 그로 인해 아우구스투스의 복잡한 가계도가 탄생한다. 몇 가지 중요한 결혼과 그것으로 탄생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보복당하지 않기 위한 생존전략, 정략결혼


우선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가 된 인물이 티베리우스인데,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전처 소생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1세와 결혼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로서는 티베리우스를 완전히 자기와 피가 통하는 이의 남편, 곧 사위로 삼지 않고서는 대권을 물려주기가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아그리파가 죽는 바람에 홀몸이 된 딸 율리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율리아는 당시 천하가 아는 방탕한 여자였다. 로마의 셀 수 없는 남성들과 바람을 비운 여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딸을 티베리우스에게 보낸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임신하여 애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이들 부부를 이혼 시키고 아그리파를 사위로 삼았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정략결혼이었다.

한편, 아그리파는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2세(大아그리피나)를 얻었는데, 그녀가 바로 티베리우스 다음 황제인 칼리굴라의 어머니이자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율리아 아그리피나(小아그리피나)의 어머니이다. 네로 황제 전에 클라우디우스라는 황제가 있는데 이 사람은 클라우디우스가의 아들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였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으로부터 네로에 이어지는 다섯 황제 모두를 피로 연결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가들이 벌이는 공통적 현상 하나를 발견한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을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에게 넘겨 주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 군주국이지만, 비록 정체(政體)가 군주국이 아니라 할지라도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어 있으면 그 실질은 변함이 없다. 이것은 지금 한반도의 북쪽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3대에 걸친 소위 '백두혈통'이라는 게 그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절대 권력가는 그 권력을 피로 잇길 바랄까?

나는 그것을 권력의 공포성에서 찾고자 한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면서 공포정치를 한 자는 그 권력이 얼마나 흉포한 것인지를 잘 안다. 만일 그 권력이 타인에게 돌아간다면 그는 죽어서도 부관참시될 수 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은 권력으로부터 심각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 권력을 남에게 줄 수 없다. 반드시 그 권력은 자신의 분신에 넘겨야 한다. 그래야만 안심하고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절대권력자가 항시 자신과 자식의 혼인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의 중심에 자신의 혈족이나 인척들을 입성 시켜야 한다. 이것은 북한뿐만 아니라 지금 전 세계에서 독재가 횡행하는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프린키파투스의 괴벨스, 마이케나스

 마이케나스(아일랜드 갤웨이, Coole Park, Co. 소장 : 이 사진은 위키피디아 저작권 공개사진입니다.)
 마이케나스(아일랜드 갤웨이, Coole Park, Co. 소장 : 이 사진은 위키피디아 저작권 공개사진입니다.)
ⓒ Cghe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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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에게는 아그리파 외에 또 한 명의 걸출한 친구가 있었다. 마이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 기원전 70~8)라는 친구다. 이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한지는 아그리파에 비하여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로마의 문화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재위 시절 로마의 최고 문학가이었던 호라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의 후원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문학가 혹은 예술가의 강력한 지원자였다. 후대 사람들이 문화예술의 후원자라는 의미의 단어로 만든 메세나(mecenat)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추측하는 바로는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문화부 장관 혹은 선전부 장관 역할을 한 인물일 것이다. 그의 주된 책임은 아우구스투스 재위의 정당성을 풀뿌리에서 인정토록 하는 것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다음 왕조의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을 상기하면 쉬운 상상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권력에 우호적인 여론을 능숙하게 이끌고, 심지어 새로운 여론을 만들 정도의 능력을 갖춘 가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왼쪽에는 무력을 관리하는 가신이자 대리인인 아그리파가, 그 오른쪽에는 문화와 예술을 담당하는 조력자이자 특별보좌관인 마이케나스가 자리를 잡았고, 이로써 아우구스투스의 황제정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가 로널드 사임은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를 이야기하면서 이들 둘이 경쟁적 관계이었으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그리파는 평민 출신으로 로마의 군인이자 농부의 덕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고, 반면 마이케나스는 좋은 집안(에트루리라 왕들의 후손)에서 태어나 공공연히 사치와 환락에 빠져 사는 사람이었다. 마이케나스는 한 연회에서 색다른 맛이라면서 어린 당나귀 살코기를 소개했고, 아그리파는 이를 역겨워했다.

둘은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 경쟁했지만, 최종 승리는 아그리파에게로 돌아갔다. 아그리파는 묵묵하고 비밀을 간직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마이케나스는 그 입이 문제였다. 그는 권력가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비밀수호의 원칙을 한두 번 어겼고, 이로 인해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여하튼 이곳에서는 마이케나스의 역할에 집중해 보자. 권력이 그저 벌거벗은 채로 날뛰는 것만으로는 영속성이 없다. 그 권력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력의 정당성을 피지배자들이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권력에 자발적인 충성이 생기고, 경쟁자로부터의 위협 없이 더욱 안전하게, 더욱 오래동안 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문화와 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히틀러가 그저 물리적 힘만으로 독일국민을 나치즘의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다. 유구한 독일철학을 탄생시킨 독일국민들이 그저 총칼로 위협한다고 해서 나치즘의 신봉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자발적으로 나치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수단이 발휘되었고, 히틀러는 이를 통해 성공적인 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선전부장관 괴벨스다. 그의 선전 선동은 교묘하여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치즘은 독일국민의 사상이 되었고, 거기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맹렬한 극우 나치이스트가 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은 먼 외국의 일만도 아니다. 바로 이 한반도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역사이기도 하다. 북쪽에서는 3대에 걸쳐 세습되는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난 반세기 이상 문화투쟁을 벌여왔다.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령의 영도, 수령의 독재는 주체사상의 교육을 통해 자연스레 정당화되어 왔다.

북쪽 사람들은 그저 권력의 총칼 때문에 '최고 존엄'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 반세기 이상 권력을 받쳐주기 위해 이루어진 사상교육의 결과가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동토의 나라로 만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체철학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이다. 철학이 인간을 세뇌할 때 어떤 극단적인 현상을 만들어 내는지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어나고 역사를 똑똑히 목격했다.

남쪽-대한민국, 요즘 종북이라는 말이 하도 성행해서 나도 좀 위축된다. '남쪽'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자칫 종북주의자로 매도되기에 십상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쓰는 '남쪽'이란 말은 문맥상 그리 쓴 것에 불과하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70년대 유신독재를 상기하자. 그 당시 독재를 정당화하는 방법의 하나는 모든 교육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유신독재 하에서는 그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 표방하면서 서구의 민주주의와 다른 우리 나름의 민주주의라 설명했다. 남북한의 대결구조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서구식이 될 수 없고,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십에 의해 영도되는 정치질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분열과 무질서로 또 다른 국란을 맞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많은 국민은 이러한 정치적 교육에 넘어갔고, 지금까지도 이 교육세대의 상당수는 우리나라의 보수층을 이루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요사이 일어나는 역사논쟁, 교과서 논쟁도 다를 바 없다. 정부가 나서 역사교과서의 내용에 관여하고, 우편향의 교과서를 지원하는 사태는 권력의 소프트 랜딩을 위한 전술이고, 우리 사회의 보수층을 결집하고자 하는 얄팍한 전술이다.

지금 이러한 논쟁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조용한 역사쿠데타, 한국판 문화혁명이다. 만일 이러한 현상이 현실화된다면 이 사회의 자유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살려내기 위해 지난 40년간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데, 부지불식간에 그 자유는 땅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찌하면 이 안타까운 상황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을까. 시민의 각성, 또 각성이 필요한 때이다.

"안녕, 리비아!" 아우구스투스의 최후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코펜하겐 칼스버그 박물관) 리비아는 클라우디우스의 처로서 아들 티베리우스를 낳고 임신 중이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 비상식적인 결혼은 로마의 권력층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결혼은 단순히 정략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 부부는 50년 이상 해로했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의 품 안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코펜하겐 칼스버그 박물관) 리비아는 클라우디우스의 처로서 아들 티베리우스를 낳고 임신 중이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 비상식적인 결혼은 로마의 권력층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결혼은 단순히 정략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 부부는 50년 이상 해로했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의 품 안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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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병약한 편으로 오래 살 것 같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소화기관이 약했고 약골이었다. 그는 평소 냉수욕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매일 같이 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던지 그는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오래 살았다. 기원후 14년 그는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권력을 잡고 거의 50년 가까이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옆에는 사랑하는 아내 리비아가 있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가 24세 되는 해에 첫눈에 반해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임자가 있었던 몸,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제국의 주인이 되어 가는 시기였다. 아무도 그의 사랑을 막을 자는 없었다. 급기야 그는 이미 남편과 세 살 된 아들 티베리우스가 있었고, 둘째 아이까지 임신한 리비아를 차지하기 위해 리비아의 남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는 마침내 그녀를 차지했고 평생 사랑했다. 그가 유언장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아내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였다.

듀런트가 묘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순간이 인상적이다. 이것을 옮겨 보면서 아우구스투스 이야기를 맺는다.

"놀라(Nola)에서 그의 나이 76세에 죽음이 조용히 찾아왔다.(서기 14년) 그는 침대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로마 희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 종종 사용되었던 대사인 "제 역을 잘했으니 박수 쳐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포옹하면서 "우리의 오랜 결혼 생활을 기억해 주시오, 리비아, 그럼 안녕"라고 말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작별을 하고 그는 죽었다." (문명이야기, 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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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지난 20년 이상 변호사 생활을 해왔으며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이 공간을 통해 제가 그동안 공부해 온 것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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