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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먹는 음식 가지고 절대 까탈지는 게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밥상머리 교육을 받은 덕분인지 어떤 음식이든 주는 대로 있는 대로 먹는, 그러니까 절대 맛을 따지지 않는 '절대미각'의 소유자가 됐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까탈부리지 말라고 하신 게 '맛에 대한 평가'를 거부하신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까다로운 식성에 대한 반감으로 나에게 그리 이르신 것은 아닌지 짐작해본다.

맛을 따지지 않는 태도는 실생활에서도 굉장히 편하다. 어떤 회식자리에도 낄 수 있고, 아내의 타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아무거나 잘 먹어주는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 받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런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러 종류의 어묵을 비롯해 롤캐비지, 곤약, 무, 달걀, 스지 등 수많은 재료를 함께 끓이고 좋아하는 재료를 골라 먹는 오뎅은 '에도의 패스트푸드'였다. 기타큐슈 시의 오뎅 전문 야타이 '하루야'
 여러 종류의 어묵을 비롯해 롤캐비지, 곤약, 무, 달걀, 스지 등 수많은 재료를 함께 끓이고 좋아하는 재료를 골라 먹는 오뎅은 '에도의 패스트푸드'였다. 기타큐슈 시의 오뎅 전문 야타이 '하루야'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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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맛집을 소개하거나 함께 가야 하는데 잘못된 선택을 한다든가, 주변에선 맛이 이상하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쯤 되니 맛에 대해선 센스가 없는 걸로 낙인이 찍혔달까. 내가 소개하는 맛집은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도 힘들고 맛에 대한 평가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절대미각의 좌절이다.

좌절 극복을 위한 방편으로 가끔 음식, 요리, 맛집에 대한 책을 보는데 이게 실제 음식을 요리하거나 맛집을 찾아가는 것보다 재밌고 유익할 때가 있다.

일본 음식일까 서양 음식일까... 화혼양재가 낳은 음식문화

"일본음식의 탄생과 번창의 역사적 맥락을 좇으며 일본인의 정신과 콤플렉스까지 읽어 낸다"(황교익 맛칼럼니스트)는 추천사는 '뻥'이 아니다.
 "일본음식의 탄생과 번창의 역사적 맥락을 좇으며 일본인의 정신과 콤플렉스까지 읽어 낸다"(황교익 맛칼럼니스트)는 추천사는 '뻥'이 아니다.
ⓒ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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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도서출판 따비)는 일반적인 맛집 소개 책과는 레벨이 다르다. 책 뒤표지에 있는 추천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때로는 포르노가 진짜보다 생생할 때가 있다. 스토리가 있는 놈이면 더 좋을 것이다. 박상현의 책이 딱 그렇다"(요리사 박찬일), "일본음식의 탄생과 번창의 역사적 맥락을 좇으며 일본인의 정신과 콤플렉스까지 읽어 낸다"(황교익 맛칼럼니스트)는 추천사는 '뻥'이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일본음식, 아니 음식과 문화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에 일단 놀라게 된다. 그것도 일본 규슈라는 작은 지역만 놓고 음식에서 시작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방을 짚어가는 글쓰기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저자 스스로 "어쩌면 '한일 해협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으로 기네스북 등재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책을 쓰기 위해 수많은 참고 자료를 찾아 읽고 취재에 공을 들였다는 것은 1장 '화혼양재, 일본음식이 된 서양음식들'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즐기는 대부분의 일본 음식은 일본의 전통과 정신을 바탕에 두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인 '화혼양재' 스타일이다. 돈가스와 카레, 교자, 오코노미야키 등이 그렇다. 특히 원래 인도의 혼합 향신료 '마살라'가 일본 음식 카레로 변모한 유래는 상당히 흥미롭다.

'절대미각'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가족들의 아침밥을 꼬박꼬박 챙겨야하는 요리담당자로서 카레는 상당히 매력 있는 음식이다. 돼지고기, 감자, 당근, 양파 등 재료를 넣고 한 솥 끓이기만 하면 다른 반찬이나 찌개가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고, 특히 방학 때는 아이들보고 "알아서 챙겨 먹어라" 하기 좋은 간편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리 과정에서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긴 하지만 기본만 지키면 거의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것도 카레의 장점이다.

마살라가 카레로 변하게 된 건 영국과 인도를 오가는 선원들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여러 명이 나눠먹을 수 있는 스튜에 마살라를 첨가하게 된 것이 나중에 영국 해군의 스튜 조리법으로 발전하게 된 것. 병사들이 먹는 음식이란 게 대부분 최대한 오래 보관하기 쉽고 간편 조리가 가능한 형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전파되기도 쉽다. 영국 해군의 마살라를 첨가한 스튜 조리법은 메이지 유신 이후 영국을 모델로 삼은 일본 해군(육군은 프랑스와 독일을 본으로 삼았다)에 그대로 전해졌다.

이후 영국의 식품회사 'C&B'(크로스 앤드 블랙웰) 커리 파우더가 일본에 수입되었고, 1923년 야마자키 미네지로가 영국식 커리 파우더를 개량해 일본식 카레 파우더를 개발했다. C&B를 모델로 'S&B(선 앤드 버드)'라는 회사를 세우곤 카레 파우더를 출시했다. 카레의 대중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1950년 즉석 카레와 레토르트 카레의 출시였다.

이미 일본에서 카레의 대중화 역사는 90년이 넘었다. 인도에 이어 일본이 향신료 소비량 2위라는 사실은 일본인이 얼마나 카레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카레는 화혼양재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일본 해군의 주요 주둔지였던 가나가와현 요코스카항이 일본 카레의 발상지로 자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지자체가 눈여겨 봐야할 카라토와 단가 시장 부흥기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의 장점은 음식을 놓고 역사성을 들여다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면 음식과 축제 그리고 지자체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식견에 무릎을 치게 된다. 먼저 지자체 공무원이나 지역 축제 기획자가 필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용 없이 주먹구구로, 예산을 쓰기 위해 이름만 내건 향토음식 개발, 혹은 축제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포장마차와 같은 야타이는 후쿠오카 시의 명물이다. 라멘, 스시, 덴푸라 등 요리 전문 야타이도 있지만, 손님들이 어깨를 맞대고 술 한잔하며 정을 나누는 풍경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르지 않다.
 우리의 포장마차와 같은 야타이는 후쿠오카 시의 명물이다. 라멘, 스시, 덴푸라 등 요리 전문 야타이도 있지만, 손님들이 어깨를 맞대고 술 한잔하며 정을 나누는 풍경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르지 않다.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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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향토음식의 밑바탕이 되는 재래시장은 대형할인마트의 공세에 이미 아사 직전이다. 경남 소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2년 가까이 5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재래시장의 옛 번영회 사무실을 작업실로 임대해 사용했다. 큰 도로에 붙어 있으면서도 빈 점포가 즐비한 시장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내가 있는 곳뿐 아니라 다른 시장도 대부분 마찬가지 신세다.

시모노세키의 가라토 시장과 키타큐슈의 단가 시장 사례는 부러움을 넘어 지자체가 열정만 있다면 어느 수준까진 충분히 '따라하기'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향토음식을 바탕으로 관광객을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가라토와 단가 시장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부러웠다. 재래시장 활성화 방안이 단지 돈을 대주고 시설만 개선하는데 그치는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긴 힘들다.

100년 역사를 자랑했지만 대형 유통업체 때문에 불황의 길을 걷던 단가 시장이 활로를 찾은 사례는 눈여겨 볼 만하다. 재개발보다 보존을 선택하고, 지자체, 지역 대학과 연계해 시장 활성화를 위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런데 여기서 초점은 시장 활성화 연구를 철저하게 현장에서 했다는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아무리 아이디어를 짜내고 숫자놀음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시장 내 빈 점포를 활용해 '대학당'을 개설하고 연구자들이 그곳에 상주하며 시장을 분석하고 상인과 방문객과 소통했다. 이렇게 현장에서 발로 뛴다면 성공확률은 말할 것이 없다.

시장 사례뿐 아니라 지역 축제, 농업, 축산업, 숙박업, 프랜차이즈업 등 음식과 관련된 대부분의 주제를 이 책은 다루고 있다. 오랜 취재와 연구가 바탕이 되어선지 허투루 흘릴 내용이 없다. 음식 관련 업을 삼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씩 읽어보라 권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 책의 좋은 점을 나열했지만 가장 핵심은 역시 규슈의 맛집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규슈라면 주머니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유럽 맛집, 아메리카 맛집, 중국 맛집, 동남아 맛집을 소개한 책보다, 뭐 내키면 한 번쯤 가볼 수 있는 규슈 맛집을 소개했기 때문에 이 책이 좋다. 저자가 부산에 살고 있다하니 부산이나 경남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 나오길 은근히 기다리게 됐다.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 밥 위에 문화를 얹은 일본음식 이야기

박상현 지음, 따비(2013)


태그:#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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