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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친일과 독재 미화 논란을 빚었던 교학사 교과서 파동이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완패로 끝나는 양상이다. 전국엔 3000여 개의 고등학교가 있는데, 23일 현재 논란이 된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은 '0%'이다. 이런 가운데 2개 학과, 학급 수 9개, 학생 수 237명인 서울디지텍고가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참고용으로 채택하겠다고 나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까지 끈질기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고자 하는 이 시도의 중심에는 이 학교 곽일천 교장이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대한민국 족벌사학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교과서 채택 여부는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 교사들의 몫이어야 한다. 현재 서울디지텍고에 근무하는 역사교사는 모두 2명인데, 모두 기간제 교사다. 1년 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사립학교 비정규직 교사들이 학교장에게 정면으로 맞서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반대하는 건 쉽지 않다.
서울디지텍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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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디지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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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학교 곽일천 교장은 교사 출신도 아니고, 역사와는 동떨어진 도시행정학과 지역개발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 출신이다. 이런 이력의 교장이 역사 전문가인 것처럼 나서서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하는 모양새는 좋지 않다. 어떻게 교장이 역사교사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역사교과서 채택의 중심에 설 수 있었을까?

이 학교는 1975년 유성실업이라는 학교로 출범한 이후 설립자이자 교장인 이채선 여사(현 곽일천 교장의 어머니)가 운영을 해왔다. 이후 현재까지 사립학교의 3대 핵심 직위인 이사장, 교장, 행정실장을 가족들이 맡아왔다. 2009년 8월 설립자이자 교장인 이씨가 작고하기 전에는 설립자의 아들인 곽일천 경원대 교수(현 교장)가 이사장을 역임했고, 설립자의 딸이 행정실장을 맡았다. 이씨가 작고한 뒤 이사장을 맡았던 그의 아들(곽일천)이 교장으로 부임했고 교장의 처남(설립자의 사위)이 이사장으로, 곽 교장의 배우자가 행정실장을 맡아 현재까지 그 직을 유지하고 있다.

기간제 역사교사들이 이런 족벌사학에 반기를 들기는 힘들 것 같다. 디지텍고의 교학사 교과서 병행채택은 족벌사학과 힘없는 비정규직 교사라는 구조적 문제가 겹쳐 나타난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 파동이 보여준 대한민국 사학의 민낯

서울디지텍고 이외에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하다가 동문과 학부모, 교육단체 등의 거센 반발에 채택을 철회한 학교들이 20여 곳에 이른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전국 고등학교 19곳 중에서 16곳이 사립이었고, 운정고와 성주고, 포산고 등 3곳만 공립학교였다. 이들 공립학교들은 기숙형 또는 자율형공립고이며 이 중 둘이 대구경북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포산고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고등학교 2100개 중 사립고는 930여 개로 비율로 치면 45% 정도이고 나머지 55%가 공립학교이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한 고등학교 중 84%가 사립학교라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이는 대한민국 사립학교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했던 공립고는 문제가 되자 곧바로 채택을 철회하고 다른 교과서로 바꾸었다. 학교장이 고집을 부릴 이유가 상대적으로 적으며, 독단적으로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립학교들은 좀 다르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시도했던 사립학교들 중 몇은 과거 사학비리나 족벌사학 등으로 인해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 곳들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장 이상했던 건, 교과서 채택은 이사장 권한 밖 문제인데도 언론에 교장보다 이사장 이름이 훨씬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그 한 예로, 울산현대고는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실제로 현대가가 운영하는 학교다. 이 학교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에선 교장이 아니라 정몽준 전 이사장의 입장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보도가 이어졌다. 더 단적인 사례가 전북 상산고의 홍성대 이사장이다. 상산고가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복수의 교과서를 채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의 모든 언론이 홍성대 이사장의 입을 쳐다보고 그와 인터뷰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했던 학교의 대부분이 사립학교이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했던 학교의 대부분이 사립학교이다.
ⓒ 김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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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과서 채택은 이사장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현행 법률상 교과서 채택을 포함한 교육과정에 관한 사항은 학교장의 권한이다. 또 사립학교법 제20조의2에 의하면, 이사장이 학교장의 학사행정에 관한 권한을 침해하면 이사 승인 취소 사유가 되어 이사(장)에서 쫓겨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언론들은 교과서 채택 관련 멘트를 듣기 위해 학교장이 아니라 이사장의 입을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더 황당한 것은 이들 사립학교들 중 또 일부가 과거 사학비리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학교이거나 우리 사학의 고질적인 병폐인 족벌사학이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수원의 동원고와 동우여고는 경복대학교 등과 같은 학원 소속인데, 이 학교 설립자는 경동대와 동우대·경복대, 경문대 등을 포함해 10개에 가까운 사립학교를 소유하고 있다. 대표적 문어발사학인 것이다.

서울 창문여고도 '족벌세습 사학'이라는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학교는 부부가 이사장과 교장을 하다가 이후 그 아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줬다. 40대 초반이었던 부부의 아들은 '전국 최연소 교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현재까지 교장을 역임하고 있다. 분당 영덕여고는 부부가 이사장과 교장을 맡고 있고 아버지는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경남 창녕고도 설립자 배우자가 교장을 하는 등 크게 다르지 않다.

교학사 교과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했던 대다수 학교의 전교조 조합원 비율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시도했던 학교 중 창문여고, 동원고, 동우여고, 청송여고, 분당 영덕여고, 지리산고, 상산고 등 등 10여개 학교는 아예 전교조 교사가 한 명도 없었고 전체 19개 학교에 전교조 교사는 24명으로 학교당 평균 1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최대 교원단체라는 교총은 326명이나 있어서 전교조 교사의 14배나 되었다.

이는 교장이나 이사장과 같은 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학교에서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이번 교학사 교과서 파동은 역설적으로 족벌운영과 독단적 운영이라는 대한민국 사학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군인자녀들을 위한 학교인 한민고가 사실상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포기함으로써 끝나는 듯했던 교학사 교과서 파동은 서울디지텍고(청지학원)가 이어갈 듯하다. 서울디지텍고는 오는 24일 학교운영위원회를 열어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포함한 교과서 채택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디지텍고는 교학사 교과서를 복수로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곽일천 교장도 지난 9일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학교에 비치해 교육자료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시교육청도 자료를 통해 "서울디지텍고가 교학사 교과서를 정식 교과서로 채택하는 게 아니라 학교 측이 일부 구입해 일정한 장소에 비치하는 참고자료로 활용하려 하기에 복수 채택은 아니다"라고 거들었다.

서울시교육청까지 진화에 나섰지만,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일부 누리꾼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고 있다"며 비판했고 시민사회단체와 교육계, 역사학계도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이 이렇게 우려하는 이유는 교학사 교과서가 한 학교에서라도 살아남는다면 이를 시작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교학사 교과서 파동을 통해 노출된 대한민국 사학의 족벌경영과 독단적 운영은 국민의 상식과는 맞지 않다. '족벌세습'과 '독재'는 보수 우익이 입만 열면 증오하는 북한 체제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사학의 문제라는 점을 교과서 파동이 보여주고 있다.


태그:#교학사 교과서, #서울디지텍고, #족벌세습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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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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