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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지, 여덟 살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막내 여동생이 나와 여덟 살 차이고 그 위로 남자 동생과는 다섯 살 차이이니 두 녀석 중 누구의 출산 장면이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이상한 풍경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군불을 때서 뜨거워진 방바닥에는 지푸라기가 가득 깔려 있고, 여기저기 붉은 핏물이 흘러 있었다. 핏물이 흥건해진 짚불더미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엄마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힘을 쓰고 있는 엄마의 얼굴은 몹시도 무서워 보였다.

그 험악해 보이는 얼굴에 무서워진 내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저 지지배 좀 데려 가!" 

화가 북받친 목소리로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그때까지도 아내의 출산에는 별 관심도 없이 잠만 자고 있던 아버지가 나를 번쩍 안아들고 방문을 열고 마루를 지나 고구마가 가득 들어 있던 작은 방에 나를 내려놓았다.

어린 시절 느닷없이 마주하게 된 엄마의 출산 장면은 그렇게 한 장의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문득문득 엄마의 출산 장면은 가끔씩 내 기억 속을 헤집고 찾아 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건 그리 썩 유쾌한 일만은 아니라는, 어쩌면 어둡고 습하고 칙칙하기까지 하다는 어떤 고집스런 생각이 자리 잡기까지는 어린 시절 우연히 목격한 엄마의 출산 장면이 단단히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험하게 살았나 싶당께"

이 글을 시작하다가 말고 오늘 아침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긴 눈이 왔는데 거기도 눈 왔어?"

어쩌고 날씨 얘기를 하다가 "엄마, 그때 엄마 아이 낳을 때 말이야, 왜 방바닥에 가득 지푸라기를 깐 거야?" 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땐 집집마다 다 그랬제."
"세균이 많았을 건데 왜 짚을 깔고 출산을 한 거야?"

"뭐, 그땐 지금같지 않고 뭐 마땅헌게 있었어야제, 젤 흔헌 게 지푸레기고, 그땐 지푸레기도 깨깟했어야."
"시골에선 짚이 있었으니깐 짚을 깔았을 거고 도시에서는 뭘 깔았어?"

"뭐, 헌옷을 깔았다는 얘기도 있고, 빈 밀가루 포대를 깔았다는 말도 있고, 그랬제 아마? 그런데 그런 건 새삼스럽고로 왜 묻는디야?"
"아니, 그냥 생각이 나서."

"아이고, 그때 생각을 허먼 지금도 어쩌고 그렇게까지 험허게 살았나 싶당게, 아이 일곱을 날 때꺼정 느 아버지는 탯줄 한 번 안짤라줬니라. 난리 통에 니 큰오래비 날 적에만 외할매가 와서 한 번 들여다 봐주고는 그만이었제. 아이 낳고 사흘 만에 일어나 갯도랑에 나가서 빨래를 허먼 온 몸이 팅팅 부어서는......"

엄마의 말은 그 뒤로도 한없이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또 울음으로 우물거린다. 삼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옛 이야기에서 깨어난 엄마가 돌연 생기어린 목소리로 자랑을 하신다.

"잉, 근디 나는 요새 집 고쳤어야, 니 큰 오래비가 골프장으로 살림살이 옮기고 얼매 있다가는 이 집으로 들어온단다."
"그래, 오빠랑 함께 살면 덜 외롭겄네 엄마."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학교 앞 자취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던 나는 그 작은 방에서 첫 딸아이를 출산했다. 토요일 이른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는데 물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뭔가가 한순간에 푹 쏟아졌다.

"하늘과 땅이 딱 붙는다고 생각 될 때 나온당게"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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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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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었다. 아직 출산 예정일이 일 주일 가량 앞둔 상태였는데 엷은 핏기가 섞인 이슬이 쏟아진 거였다. 그 시절엔 요즘처럼 산부인과 진료를 매달 받지도 않아서 택시를 탔더니 익산역 근처에 있는 산부인과에 데려다 주었다.

그때가 토요일 저녁 7시 30분경이었다.

"첫아이세요?" 묻더니 입원수속부터 하고 관장부터 하자는데 진통보다도 그 관장하는데 더 진이 빠졌다. 관장을 한 후 입원실 하나를 내주고 돌아간 간호사는 저녁 아홉 시경에 얼굴을 한 번 비추고 이튿날 아침이 될 때까지 내다보지도 않았다.

아침이 되자 익산역 근처에서 옷가게를 하시던 시고모님이 병원에 오셨다. 지난밤에 산통이 있어 병원 간다고 시골에 전화를 한 아이들이 출산 소식이 없자 답답해진 시어른이 고모님을 보내신 거였다.

밤새도록 진통을 하면서도 간호사를 부를 생각은 못하고 나는 내내 엄마의 말만 되풀이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 아이는 언제 나와?"
"하늘과 땅이 딱 붙는다고 생각 될 때 나온당게."

진통이 지나고 나면 다시 살 만해지고 다시 진통이 시작되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시간을 열 시간 넘게 반복하면서도 출산은 으레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참고 있었다.

"자 보래이, 힘주는 거 보니까네 아는 벌써 낳고도 남았것고마는, 얼렁 의사선생부르레이."

이른 새벽에 병원을 찾아오신 고모님이 내 상태를 보시고 채근을 하셨다. 그때까지 마누라 옆에서 끙끙거리며 속앓이나 하고 있던 남편이 뛰어 나가 의사를 불러왔다. 새벽 단잠에 빠져 있던 젊은 의사가 겨우 가운만 걸친 부스스한 모습으로 뛰어왔다.

의사는 내 상태를 보자마자 분만대에 끌어올리다시피 하더니 아이를 억지로 꺼낸 후 울음소리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간호사를 향해 참지 못하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누구 옷 벗기려고 작정을 했나? 여태껏 잠만 퍼 자고 있었던 거여?"

진통 열두시간만에 세상에 나온 첫딸아이의 이마에는 붉고 검은 반점이 커다랗게 생겨 있었다. 오랜 시간 진통을 하느라 생긴 자국이었다. 그런데도 원래 아이가 붉은 반점을 달고 세상에 나온 줄만 알고 아이를 키웠다.

딸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도, 더 자라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그 붉은 반점은 반듯한 이마에 훈장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성형수술을 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아이의 이마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딸아이가 자라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이마에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다가 그 붉은 반점이 없어진 걸 보고서야 출산할 때 생긴 반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 준비도 없이 출산에 임한 무지한 엄마 때문에 이마에 붉은 반점이 생길 때까지 오랜 시간 산통에 시달렸을 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애 낳고도  너무 멀쩡한 조카, 알고 보니

그리고 며칠 전 조카가 첫아이를 출산했다. 이모랍시고 아이를 들여다보러 갔더니 조카는 산모 같지 않은 멀쩡한 얼굴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뭐, 아이 낳은 산모가 그렇게 멀쩡하냐고 농담을 했더니 "이모, 난 아이 나오는 느낌이 거의 없이 그냥 나오던데요"라고 한다. "뭔 소리래? 그렇게 아이 낳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했더니, "난 다른 산모에 비해 무통주사발이 너무너무 잘 받는다던데?"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빙글빙글 웃는다.

산통은 어찌해도 피해갈 수 없는 여자의 형벌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진통 없는 분만을 저리도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으니. 그나저나 산후조리는 어찌 하냐고 물었더니 산후조리원에서 2주하고 산후 도우미 서비스를 3주 가량 받기로 했단다.

"그 녀석 친정엄마 성가시게는 안하는구나."

기특해서 내뱉는 내 말에 날름 답변을 하는데 참 기가 막힌다.

"어설프게 친정엄마 도움 받다가 더 피곤해지잖아요, 전문가들이 하면 아이한테도 산모한테도 훨씬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하여튼 영리한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조카아이의 카톡 프로필에는 아이의 자고 있는 얼굴이 올라 와 있다. 요즘 아이들은 제 아이 커가는 모습도 저렇게 예쁘게 실시간 생중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 세상 참 눈부시게 많이 좋아졌다.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공모 응모글입니다.



태그:#엄마, #출산,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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