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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해직된 MBC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가운데), 최승호 PD(오른쪽), 강지웅 전 노조사무처장이 17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MBC본부 노조원 44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 선고공판에서 승소하자, 서로 안아주며 기뻐하고 있다.
▲ MBC 해직 언론인들, 해고무효 소송 '승소' 판결 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해직된 MBC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가운데), 최승호 PD(오른쪽), 강지웅 전 노조사무처장이 17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MBC본부 노조원 44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 선고공판에서 승소하자, 서로 안아주며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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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KBS의 공정방송이 백척간두에 섰다. 노조에 협조적인 서영훈 사장이 그대로 있는 한 KBS 장악이 어렵다고 판단한 노태우 정권은 연예PD 배임수뢰사건을 만들어 내고, 이어 감사원 특별감사를 통해 KBS의 도덕성에 먹칠을 했다. 마치 KBS 노사가 합작해 국민의 세금을 수당으로 떼어먹은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견디다 못한 서 사장이 사퇴하고 정부 대변인까지 지냈던 아무개신문 사장이 신임 사장으로 왔다.

KBS 노조는 당연히 사장 출근저지투쟁에 나섰고 신임 사장은 즉각 경찰력 투입을 요청했다.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5월 18일까지 38일간 계속된 파업투쟁은 신문들의 편파적인 보도로 폭넓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내부 분열까지 겹쳐 20여 명이 구속되는 참담한 결과만을 안고 끝나고 말았다.

이후 10월 29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KBS 전 노조위원장 안동수와 당시 현 노조위원장 김철수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 이석형은 "피고인들이 적법절차에 따른 공정방송 추구노력을 저버렸고, 극단적 제작거부로 인한 파행방송이 국민생활 전반에 불안을 초래한 점은 실정법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없어 이같이 선고한다"면서 각각 1년 6개월의 실형을 때렸다.

23년

그런데 23년여가 흐른 후 같은 남부지법 재판부는 언론사 파업에 대해 180도 다른 판결을 내렸다. 2012년 공정방송을 내세우며 170일간 파업을 벌이다가 해고 등 징계를 받은 MBC 노조원들이 제기한 해고 및 정직처분 무효소송에서 "공정방송은 노사 양측에 요구되는 의무이자 근로조건에 해당한다"며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원고 전원 승소판결을 내린 것이다.

세상이 온통 거꾸로 돌아가는 마당에 이번 MBC 판결 하나를 두고 법의 정의가 살아났다느니, 그래도 역사는 진보한다느니, 과도하게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렇게 양심적이고 소신 있고, 언론인들보다 더 언론을 걱정하는 판사 한 사람(박인식 부장판사)이 등장할 수 있을 만큼 23년이란 세월의 두께가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기꺼움같은 것이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언론의 공정성을 이야기할 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 기준이 하나 생겼다는 희망 같은 것이다.

문제는 MBC다. MBC는 판결이 나온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1심 재판부의 판단은 파업의 목적범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으로 깊은 유감을 표한다"면서 "설사 방송의 공정성 여부가 근로조건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당시 언론노조 MBC본부의 파업은 '방송의 공정성이 훼손됐다'는 노조의 일방적 주장에 의해 시작됐으며, 따라서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밝혔다. MBC <뉴스데스크> 역시 이 판결 소식을 전하면서 회사의 입장을 충실히 반복했다.

다시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김영삼 정권은 1993년 들어서자마자 4만여 명에 대한 대사면 조치를 내렸다. KBS 사태로 유죄판결을 받은 해고자들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어 6월 29일 서울지법 남부지원 민사합의 6부(재판장 이석우 부장판사)는 안동수 등 노조원 8명이 회사 측을 상대로 낸 해고무효 확인소송에서 "KBS가 노사합의를 깨고 노조원들을 해고한 것은 부당하다"고 원고 승소판결했다.

이번처럼 "공정방송도 근로조건"이라는 논리에 입각한 전향적 판단이 아니라 "유죄판결이 내려져도 해고하지 않겠다"는 노사합의를 깨고 해고한 것은 잘못이라는 판결이었지만, 회사 측은 즉시 해고자들에 대한 복직 절차에 들어갔다. KBS의 경우 법원은 가뒀지만 회사 내 방송언론인들이 힘을 합쳐 이들을 원상회복 시킨 것이다. 복직한 이들은 KBS에서 고위간부직을 역임하고 대부분 정년퇴임했다.

MBC 경영진은 그럴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MBC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전임 김재철 사장 때 발생한 일이므로 부담감 없이 징계대상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표할 만도 하고, 사법부가 던진 '공정방송'이란 화두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시작하자는 제스처를 쓸 만도 한데, 오히려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오기 같은 것까지 느껴지는 완강한 태도다.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MBC 경영진의 '비언론 마인드' 탓으로 본다. 방송인으로서의 경력은 화려하되 정신적으로 이미 방송인임을 포기해버린 이들이 경영과 인사를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MBC는 안팎으로 무너지고 오히려 방송인이 아닌 판사가 공정방송을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재철 전 사장은 물론이고 아마도 현 김종국 사장도 언론의 소명의식은커녕 MBC의 위상에 대한 고민조차 없는 듯하다. 오히려 MBC를 망치면 망칠수록 자신들에게 들려오는 박수와 칭찬 소리가 요란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MBC는 지금 시청률·공정성·신뢰도에서 바닥을 기고 있다. 지난해 광고 매출액이 2년 전에 비해 2천억 원 가까이 급감했다고 한다. 그 2천억 원은 아마도 조중동 종편들과 SBS가 나누어 먹었을 것이다. MBC가 처한 상황에 대해 김재철 전 사장과 함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김종국 현 사장의 연임설이 나오는 이유다.

희망과 두려움

170일이라는 최장기간 파업을 겪었고, 지난 17일 법원으로부터 역사에 남을만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MBC의 정상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지난 2012년 3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앞에서 파업중인 MBC 노조원 1천여명이 총집결해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모습이다. 노조원들이 펼쳐든 플래카드처럼 MBC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170일이라는 최장기간 파업을 겪었고, 지난 17일 법원으로부터 역사에 남을만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MBC의 정상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지난 2012년 3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앞에서 파업중인 MBC 노조원 1천여명이 총집결해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모습이다. 노조원들이 펼쳐든 플래카드처럼 MBC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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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토마스 프랭크는 보수정권이 권력을 농단하는 매커니즘을 "적진을 파괴하고 돌아오면 회전문이 기다린다"는 압축된 말로 표현한다. 어떤 기관에 대해 적대적인 인물을 수장으로 임명하고, 그가 (그 조직을 파괴하는) 임무를 완수하면 다른 자리로 보상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프랭크는 유엔을 비난하는 데 앞장선 존 볼턴을 부시 대통령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일, 공립학교를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윌리엄 베넷을 레이건 대통령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한 일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지만, 한국의 보수정권 아래에서도 그런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명박 정권 때의 '3철'(대법원의 신영철, 인권위의 현병철, 그리고 MBC의 김재철)이 비근한 예일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MBC 노조는 MBC 자체를 파괴하려는 MBC 경영진과 그 배후에 도사린 방송문화진흥회를 상대해야 하고, 박인식 판사의 1심 판결은 한명숙 전 총리에게 느닷없이 유죄판결을 때린 2심 법원과 신영철이 버티고 있는 대법원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공정방송'이 가야 할 길은 대표적인 '비정상의 정상화' 작업일 텐데, 여전히 멀고 험하기만 하다.


태그:#MBC, #KBS, #해고무효소송, #공정방송, #박인식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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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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