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매년 같은 시기마다 반드시 나오는 뉴스가 있다. 봄에는 진달래 개화, 여름은 홍수, 가을은 단풍놀이. 홍수는 자연 재해니 반드시 보도해야 하지만 꽃놀이나 단풍놀이는 귀중한 시간을 소비해가며 꼭 해야 할지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다. 매년 10월마다 나오는 뉴스가 하나 더 있다. 노벨문학상 소식이다.

 

작년도 한국 언론은 고은 시인의 수상 여부를 보도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황석영의 수상 가능성도 언급되었다. 결과는 이미 알려진대로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수상이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앨리스 먼로의 이름은커녕 북미 작가의 수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상 결과가 발표되기 네 시간 전, 영국과 캐나다 등 영어권 언론은 앨리스 먼로를 강력한 후보로 꼽은 뉴스를 내보냈다. 요즘은 구글로 검색하면 얼마든지 외신 뉴스를 볼 수 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한국 기자들은 구글 검색조차 못할 정도로 바쁘거나, 게으르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노벨문학상과 고은을 연관짓는 기사를 실어 트래픽을 끌 생각밖에 없는 것일까.


노벨문학상은 1901년 초대 수상자 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 이래 1914년, 1918년, 1940~43년을 제외하고 매년 '이상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되어 왔다. 유진 오닐, 윌리엄 골딩, 앙드레 지드 등 문학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도 한두 번쯤 들어본 유명한 문학자들과 윈스턴 처칠, 앙리 베르그송 등 비문학 분야의 문필가들에게 영광이 돌아갔다. 1964년 수상자로 결정된 장 폴 사르트르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여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노벨문학상은 전세계의 훌륭한 대문호들에게 공평하게 상을 나눠주고 있는 것일까? 현대문학에 크게 기여한 작가들 중에서 노벨상의 영광을 맛보지 못한 작가는 얼마든지 있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 제임스 조이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대표적이다. 전후 프랑스 문학의 문제적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포스트모던 문학 기수로 불리는 마누엘 푸익과 최근 타계한 카를로스 푸엔테스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작년 수상자로 중국의 모옌이 발표되자 중국 문학 애호가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모옌?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의 위화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와 수상하지 못한 작가들을 살펴보면 상을 타기 위한 첫째 조건은 일단 오래 생존하는 것이다. 살아서 자신의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는 운 좋은 작가는 많지 않다(작가는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이다). 2007년 수상자 도리스 레싱은 당시 무려 88세였고, 2013년 11월 17일에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조건은 가능하면 유럽에 태어나는 것이다. 수상 작가의 국적은 압도적으로 유럽이 많다. 세 번째 조건은 순문학을 고집하는 것이다. SF, 판타지를 비롯한 장르 문학이 쌓아올린 문학적 업적에 노벨문학상은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의 작품은 이미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고, 작품성 등 모든 면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에 못지 않다. 1998년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세상에서 단 한 명만 남겨두고 모두 눈이 먼다는 설정으로, 다분히 SF와 판타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분류상' 순문학 작가이고 <눈먼 자들의 도시>는 SF물이 아닌 순문학으로 홍보되었다.

 

이렇듯 노벨문학상 수상 리스트를 살펴보면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들이 기반을 닦고 쌓아올린 근대 문학의 얼개에 충실한 작품에 점수를 높이 주는 경향이 있다. 반면 해체주의 등 포스트모던한 경향에는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단 프랑스문학의 해체주의적 경향은 눈감아주는 듯하다. 1945년 칠레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수상할 때까지 타고르를 제외하고 모든 수상자는 유럽에서만 배출되었다. 이후 비유럽권 수상자가 나오려면 1966년 이스라엘의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까지 기다려야 한다. 혁명이 유럽을 휩쓸던 1960년대는 과테말라, 일본, 아일랜드에서 노벨상을 가져갔다.

 

이후 노벨문학상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근대 문학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작가들을 발굴하는 주요한 통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71년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1982년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86년 나이지리아의 윌레 소잉카 등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특히 네루다와 마르케스의 전세계적인 명성은 라틴아메리카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까지 조명을 비추었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까지 연장되어 멕시코의 옥타비오 빠쓰, 아파르트헤이트의 야만을 고발한 나딘 고디머, 흑인 민권 투쟁과 여성주의 운동의 대문호 토니 모리슨도 상을 받았다. 1994년 수상자인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는 투쟁적인 작가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시기마다 목소리를 내어 양심을 일깨우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1999년 수상자는 독일의 귄터 그라스였다. 그의 수상에 대한 반응은 대개 이랬다. "<양철북>으로 받았으니 이번에는 두 번째 수상인가?" <양철북>의 어마어마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라스는 1999년에야 겨우 인정받았다. 그때 그는 일흔두 살이었다.

 

2000년대부터 노벨문학상은 대륙별, 장르별, 성별 안배에 더욱더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노벨문학상은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중하게 대륙별로 나누어주는 모습이 었다. 비유럽권에서는 가오싱젠, 존 맥스웰 쿠체, 오르한 파묵, 헤르타 뮐러 등이 영광을 안았다(뮐러는 동구권 출신으로 독일에 귀화한 뒤 수상했다). 2010년은 10년간 소외되어 있었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상을 가져갔다. 그러나 수상자는 해체주의적 기법으로 멕시코의 식민지 참상을 고발한 후안 룰포나 공포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한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아니라 남미에서 드물다는 우파 성향의 작가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였다.


작품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상은 없다. 노벨문학상도 무난함과 대륙 안배에만 신경쓰다가 중요한 작가를 빼놓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이 수행하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활자 매체가 위축되는 추세에서 노벨문학상은 세계적 차원에서 문학의 공공 펀드 역할을 하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만으로 해당 작가의 책은 전세계 언어로 번역되고 출간된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도 노벨상 수상 작가 작품에 관심을 가진다. 문학상 수상이라는 레테르는 적어도 작품의 중간 수준은 보장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뿐만 아니라 저명한 문학상은 정해진 시기마다 출판 시장을 자극하여 독자를 유지하고 책을 판매시킨다. 2012년 수상자 모옌이 "이제야 베이징에 온 가족이 모여 살 집을 샀다"고 말하듯이, 가난하고 힘든 작가들에게 문학상만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장치도 드물다.


상에 따라오는 보상이 커질수록 형평성에 대한 요구는 커지고, 파격적인 작품보다 무난한 작품이 수상하는 경향도 따라서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상의 파급력이 크기로 유명한 미국 SF 문학의 대표적인 문학상 네뷸러 상은 상금이 없고 트로피만 시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더구나 세계적 차원의 상이라면 국제정치적 차원이 파생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2009년 버락 오바마와 2012년 유럽 연합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노고에 대한 치하가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는 메시지에 가까웠다.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인해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을 벌이기가 쉽지 않게 되었고, 유럽 연합은 경제 위기가 가하는 압박을 이겨낼 숙제를 받게 되었다.

 

가오싱젠과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중국의 문화적 국제 무대 데뷔를 의미하기도 했다. 현재 중국은 각국의 대중문화가 놓고 싸움을 벌이는 광대한 시장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사상과 문화를 지닌 나라로 인식된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은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기획된 정교한 프로젝트였다. <설국>의 번역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평범한 번역가가 아니라 매우 뛰어난 근대 일본 연구자였다. 사이덴스티커의 일본 연구는 일반적인 학술적 차원을 넘어 아예 그 시대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대표적 저서 <도쿄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에도의 골목을 누비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느 골목에 몇 집이나 살고 있고, 그들이 오늘 먹은 점심 메뉴와 입은 옷과 저녁에 관람할 공연 레퍼토리까지 모조리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사이덴스티커의 연구가 일본의 국가적 지원 하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사이덴스티커가 받은 지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국가의 소프트 파워 증진을 위해 프로젝트화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적극 활용하여 이점으로 바꾸어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한국도 이러한 기획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국가의 소프트 파워 증진 차원에서라도 노벨문학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10년 단위의 정교한 기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문학번역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기획을 지켜보면 솔직히 "일본이 받았으니 우리도"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웃나라가 받은 상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한국의 비참한 출판 시장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출판 시장은 점점 쪼그라들고, 노벨상 후보자로 거론되는 황석영의 신작은 사재기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가 작가와 출판사 명성에 지울 수 없는 먹칠만 남았다. 고은은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지만 정작 신작에 대한 리뷰는 언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장르문학에 대한 무지를 넘은 지적 폭력은 거론하지 않겠다. 한국의 출판 시장이 초라할수록 남의 나라가 받은 상은 더욱 부럽고 커보일 수 밖에 없다.


노벨문학상 논의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 문학의 전세계적인 위치이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한국 문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해야 한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기존에 알려진 고전 명작 대신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들이 주목받을 수 있다. 예컨대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박경리의 <토지>는 읽기 전에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역사부터 학습해야 하는 지나치게 길기만 한 소설이다. 김내성의 <마인>은 동일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셜록 홈즈 이래 형성된 근대적 인간형을 해체한 진보적인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 서정주는 독보적인 언어 감각을 과시하지만 막상 번역해 놓고 보면 내용의 깊이에서 한용운이나 김춘수만큼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듯 한국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려면 냉정한 외부의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문학에 정말 필요한 것은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지식인 중심의 창작/발표 환경을 대중에게 개방하여 죽어가는 출판 시장을 되살리는 것이다. 문학은 삶을 즐겁게 하는 고급 오락이다. 노벨상으로 소위 말하는 국격을 드높이는 것보다 시민들로 하여금 문학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문학정신에 더 어울리는 길이 아닐까.


태그:#노벨문학상, #문학, #책읽기, #언론 문학 보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