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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 기자회견 관람기

지난 6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많은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자회견을 당선된 지 무려 1년 만에 처음 가지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집권 1년 차에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이런 전대미문의 시국에서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혹여 대통령이 지난 1년간 정권의 정당성을 뒤흔들고 있는 국정원 사태에 대해 그 수습방안을 내놓지 않을까? 최근 철도파업 이후 불거지고 있는 국민들의 민영화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통 큰 제안을 하지 않을까? 또한 취임 이후 줄줄이 파기되고 있는 복지 공약에 대해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까?

그러나 역시 기대는 금물이었다. 대통령은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민영화를 추진할 것 같은, 그래서 도대체 정부가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는데 경제혁신3년 계획, 비정상적 관행의 정상화, 공공부문의 개혁, 창조경제, 내수 활성화, 북핵문제 해결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뻔 한 말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엄중한 현실은 거세된 채 반복되는 정치적 수사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러면 그렇지'라며 기자회견 전체를 폄훼하고자 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대통령도 위와 같은 불만을 의식했었는지, 이미 짜여진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면서 기자회견 전체를 뒤엎을만한 발언을 구사한 것이다.

"통일은 대박"

역설하는 대통령
▲ 통일은 대박입니다. 이만큼 역설하는 대통령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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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그 뜨악함에 대하여

처음 대통령의 입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무엇보다 내 귀부터 의심해야만 했다. 보수 정권의 대통령이 통일을 운운했음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하필 그 다음에 이어진 단어가 '대박'이기 때문이었다.

평소 지상파나 보수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항상 우아한 옷을 입고 고상한 말만 하는 분이시어야 한다. 넘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절대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분. 그런데 그런 대통령의 입에서 '대박'이라는 속어가 튀어나오다니. 우리와 같은 시정잡배들의 시쳇말이 대통령의 취임 후 처음으로 여는, 동시에 신년맞이 기자회견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게다가 '대박'이란 단어를 보자. 그 속에는 살벌한 약육강식이 유일한 삶의 법칙이 된 현실에서 오로지 '한 방'만이 해답이라는 한탕주의의 절박함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 '대박'이라는 어휘를 구사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도 바쁜 서민들이나 쓸 수밖에 없는 단어를, 서민들의 절박한 생계를 해결해야 할 정부의 수장이 되레 차용하여 나선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과연 그들은 '대박'이라는 한탕주의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가.

물론 혹자들은 이런 대통령의 단어 선택을 두둔하기도 한다. 조금 심한 감이 없지 않지만은 그래도 항상 서민들을 생각하시는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되어 있지 않느냐는 논리다. 그러면서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예를 늘어놓기도 한다. 노 대통령 역시 기자회견 등에서 '대통령 짓 못해먹겠네' 등등의 막말(?)을 했는데, 왜 그때는 문제를 삼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대박' 발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것과 비교하여 매우 큰 차이를 지닌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들은 대통령이 기자들의 날선 질문에 각본 없이 대응하면서 나온 것에 반해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질문까지 정해져 있던 당시 기자회견의 성격 상 계산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요컨대, 박근혜 대통령은 이와 같은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대박'이란 단어를 정제된 어휘로서 선택한 것이다.

'대박'이란 단어의 음험함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정부는 하필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 뒤에 굳이 '대박'이라는 속어를 붙임으로써 논란을 자초했을까? 혹자들의 말마따나 단순하게 대통령이 통일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그건 '대박'이라는 단어가 주는 파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청와대는 '대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담론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이나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이야기하면서 야당의 아젠다를 무력화시켰듯이, '대박'이란 단어 한 마디로 보수에게 불리하게만 여겨졌던 통일담론을 자기 입맛에 맞게 요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박'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 외에 기존의 통일 담론에 영향을 끼친다. 생각해보자. '대박'은 단순한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당장 매우 성공한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이 전후맥락과 상관없음을 전제로 한다. '대박'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성공만 하면 된다는 천박한 욕망과 함께 몰 역사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일이 대박이라니. 이는 결국 현 정부의 통일 담론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귀결될 것임을 의미한다. 통일이 현재 매우 시급하고 필요하지만, 대신 전후맥락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어쨌든 경제적으로 매우 이득이 되니, 다른 건 묻고 따지지도 않는 대상으로서의 통일.

문제는 '대박'으로서만 통일이 인식될 경우 통일의 당위성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같은 민족이니까 무조건 통일해야 한다는 맹목적 통일 담론 역시 지양의 대상이지만, 통일의 당위성 생략은 분단 원인에 대한 고찰을 방해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분단의 원인을 고민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영달을 위해 분단을 획책했던 이들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묻힐 것이며, 분단으로 인해 왜곡되어진 우리의 체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상처를 안고 사는 자이니치(在日) 등과 같은 많은 이들이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며, 통일의 또 다른 주체로서 북한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 역시 흐릿해질 것이다. 통일의 필요성이 당위성을 집어삼키는 순간, 통일은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이 아닌, 자본의 소원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기우일 수도 있다. 고작 '대박' 한 마디에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핀잔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친일과 독재를 찬양하는 교과서가 버젓이 발행되고, 유신 때나 가능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신년 벽두부터 통일을 떠들고 다니는 보수신문과 정권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은 옳다. 통일은 공동체 복원의 시발점이 될 것이고, 냉전체제에서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더 큰 꿈을 품을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경제적 이득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태그:#통일 대박,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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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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