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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덴마크 학생들은 등록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후 2년 동안 정부로부터 매달 300만 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여유있게 미래를 준비한다.
 덴마크 학생들은 등록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후 2년 동안 정부로부터 매달 300만 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여유있게 미래를 준비한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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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부럽다'고 했다. 독일 학생들이 대학까지 수업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랬고, 덴마크 학생들은 등록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후 2년 동안 정부로부터 매달 300만 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여유있게 미래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그뿐인가. 영국 병원은 치료비를 받기는커녕, 환자들에게 교통비를 준다는 말을 했을 때에도 사슴 눈을 하며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핀란드에서는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기본으로 넉 달의 유급휴가를 받고, 그뒤 부모가 번갈아가며 반 년씩 유급휴가를 더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입을 헤 벌리고 말했다.

"진-짜 좋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부럽다'와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상대는 입을 닫았다. 입가에 꿈꾸듯 떠올랐던 미소도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대화는 갑작스럽게, 그러나 너무나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바뀌었다.

부럽다면서 꿈꾸지 못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이 아닐까. 우리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 '부러운 이야기들'은 비행기를 타면 당일 도착할 수 있는 현실인데도, 우리는 그 현실을 우리 것으로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지금과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생각, 우리는 그런 생각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다.

국민이 꿈꾸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더없는 행복이다. 꿈꾸지 않는 국민은 국가에 요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국민은 선거날 표를 주고, 꾸역꾸역 일해 세금을 내주고, 국가 도움 없이 자녀를 길러 노동력과 납세자를 국가에 공급한 후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중년 노동자의 6000만 원, 아동 재벌의 100억 원

잠시 부러워한 뒤 현실에 순응하기. 비단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예컨대 젊은 재벌 3세가 수조 원 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거나, 그들이 누리는 화려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말이다.

대기업은 말단 사원을 해고할 때조차 '경쟁'이라는 경영학 원리를 내세우지만, 회사 최고경영자를 뽑을 때는 '유전자 친밀도'라는 생물학적 원리를 따른다. 신기하게도, 기업들의 이런 억지가 사회적 분노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유산을 둘러싼 자식들간의 싸움도 경쟁이라면 경쟁이겠으나, 한국인 대다수가 죽을 때까지 형벌처럼 치러야 하는 생존경쟁과 같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분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연봉 6000만 원을 받는 철도공사 '귀족노동자'의 '철밥통' 이야기를 들을 때를 생각해 보자. 국내 30대 재벌가의 10살 짜리 아동이 100억대 주주가 되고, 4살 짜리 유아 상속자가 10억대 자산가가 됐다는 소식은 그저 부러울 뿐이지만, 어린 갑부 나이의 다섯 배 세월을 현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6000만 원 짜리 연봉에는 분노와 질투가 밀려온다.

이 신기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모순이 한국을 휘저었던 코레일 철도조노 파업과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그리고 무엇보다 '안녕'과 거리가 먼 한국인 대다수의 불우한 삶을 잘 설명해 준다고 믿는다. '귀족노조'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는 한국의 노조가입률을 한 자릿수(9%)로 떨어뜨리는 데 기여했고, '철밥통'에 대한 반감은 정부와 기업이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하는 지렛대가 되어주었다.

노조의 몰락과 '철밥통'의 소멸. 이로써 우리는 더 잘 살게 되었을까? 그 언어를 만들어 낸 보수언론과, 그 말을 열심히 퍼뜨린 정부와 기업의 약속에 따르면 그래야 한다. '강성노조'가 초토화된 만큼 투자가 물밀듯 밀려와 사방에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철밥통'이 깨진 수만큼 공정한 보상의 시대가 도래했을까?

'귀족노동자'와 '철밥통' 자리에 남은 비정규직

오른쪽 부터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김명환 위원장, 이상무 공공운수노조연맹 위원장이 지난 달 30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철도노조파업 중단을 선언하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철도파업 중단 선언하는 민주노총 오른쪽 부터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김명환 위원장, 이상무 공공운수노조연맹 위원장이 지난 달 30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철도노조파업 중단을 선언하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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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알듯, 결과는 정반대였다. 노조가 쇠퇴한 시기에 일자리는 늘기는 커녕,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기업들은 걸핏하면 노조 때문에 한국에서 기업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이들은 노조조직률이 가파르게 떨어진 기간에 도리어 대규모 해외이전을 감행했다. 삼성처럼 노조가 없던 회사도 사업부를 열심히 외국으로 옮겼다.

여기서 '노조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해외이전이 는 게 아니라, '노조의 쇠퇴 때문에' 해외이전이 가속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독일의 경우, 노조가입률이 한국의 두배가 넘고, 노조대표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기업주가 일방적으로 해외이전을 결정할 수 없다. 그로 인해 독일은 다른 선진국과 달리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잃지 않고 있다. 독일의 총 수출액 가운데 제조업 비중은 70%를 넘어선다.

경영참여는커녕, '철도 민영화 반대'라는 공익적 요구조차 '불법'으로 몰려 공권력의 철퇴를 맞는 코레일 노조가 '귀족 노조'라면, 회사의 운영을 좌지우지하는 독일 노조는 '황제 노조'쯤 될까? 게다가 한국에서는 '한물 간' 산업으로 간주하는 제조업까지 틀어쥔 채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텅스텐 밥통'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런 독일이 왜 망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망하기는커녕, '고용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실업률이 낮으며, 세계 경제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잘 나가며 '부러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독일 기업은 경기가 나쁠 때 직원을 해고하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여 고용을 보장하고, 국가는 줄어든 임금을 보상해 준다. 기업이 직원을 멋대로 자르도록 만드는 것을 '개혁'과 '선진화'라고 부르는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기업, 언론, 정부, 시민이 합심해 '노조'와 '철밥통'을 때려 잡았다.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은 '고용유연화'와 '효율성' 측면에서 가장 '선진화'된 고용 형태일 것이다. 손쉬운 해고가 보장된 데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지나지 않으니 '철밥통'과는 거리가 멀고,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할 조직을 갖기 어려우니 '귀족노조' 논란에서도 자유롭다.

이제 꿈에 그리던 결과를 얻었으니 행복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청년들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로 전락했고, 노인들은 절반 가까이가 빈곤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계부채는 1000조 원을 넘어섰고, 자영업자의 절반은 한 달에 100만 원도 벌지 못한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철밥통'을 찬 진짜 '귀족'

보수언론은 '귀족 노동자'라는 희한한 말을 유행시켰는데, '귀족'은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권력층을 말한다. 귀족은 품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즉 '노동자'의 반대 개념이다. 한국사회에 귀족이 있다면, 회사와 상대하기 위해 '노조'를 구성할 필요도, 처우 개선을 위해 '파업'을 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기업을 물려받는 재벌의 자손이나 수억에서 수십 억 연봉을 받는 기업의 등기이사들, 또는 억대 연봉을 받는 고위공무원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지난해 1월, 서울방송(SBS)은 공무원의 보수와 수당을 인상하기로 한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고 보도했다. 그 결과, 대통령 연봉이 3.3% 올라 2억 가까이 받게 됐고, 국무총리의 연봉은 1억 4928만 원, 장관급은 1억 977만 원, 차관급 연봉은 1억 661만 원으로 2012년에 비해 300만 원 이상이 올랐다.

언론은 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할 때마다 '경제난'과 '방만경영'을 비난했지만, 공무원 임금인상을 비판한 언론은 찾기 어려웠다. 최저의 경제 성장률에 사상 최대의 국가부채를 기록 한 상황에도 말이다. 이들 대다수가 상당한 재산가들이어서 월급 인상이 생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고위 공무원들의 연봉인상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나라살림이 어려워도 재산가 고위 공무원들의 임금을 올릴 필요가 있다면, 경제가 나빠도 재산 없는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노조나 파업 없이 '의결' 만으로 임금을 올릴 수 있는 '초합금 밥통 귀족'들이 한 푼 더 받기 위해 거리에 나서야 하는 노동자들을 '귀족'과 '철밥통'이라는 말로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노조가 '강성'이라는 인식을 주게 된 것은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 탓이다. 이 경우 노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위와 파업뿐이기때문이다. 독일 노조가 자주 파업하지 않는 이유는 국가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영 참여가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밥통'이 왜 나쁜가?

ⓒ sxc
'철밥통'이라는 말은 자리가 보장된 안정된 직장을 말한다. 이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보수언론에서 이 말을 '펑펑 놀면서 월급 타가는 직장'이라는 뜻으로 써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고위직을 제외하면 이런 일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정부는 2013년 국민소득이 2만 4000 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한국인 한 명이 2500만 원 이상을 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득이 개인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평균적인 3인 가족의 가계수입이 7500만 원, 4인가족은 1억 이상을 벌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4인 가족의 연수입이 1억이 안 된다면, 그 가정의 수입원을 '귀족'이나 '철밥통'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만 4000 달러 조국에 사는 우리들은 마땅히 '1억 연봉'의 꿈을 꿔야 한다. 사실 '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 부가 제대로 분배된 공정사회라면 1억은 평균 연봉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와 기업에 요구하기보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다른 노동자의 연봉을 빼앗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데 동참했다.

그 결과, 우리는 초등학생 꿈이 '9급 공무원'인 나라에 살게 되었다. 공무원을 꿈꾸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안정된, 다시 말해 '철밥통'에 가까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공무원이 되길 바라고, 공무원 배우자를 원하면서도 남의 자리는 '철밥통'으로 비난했다.

우리가 모순적일뿐 아니라,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유는 정부와 언론이 부추긴 '질투의 정치'때문이다. 안정되고 수입이 보장된 직장인을 보면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하나는 내게도 그같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언론-정부-기업 연합은 후자가 '선진화'며, 그를 통해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꼬드겼다.

신기한 일은, '귀족노동자'와 '철밥통'에 대한 분노가 뜨겁던 시절에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남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부자되라'고 말했으니, 이만한 '엿먹이기'도 없다.

모두가 '철밥통'을 차는 사회를 꿈꾸며

일자리에 대한 불안은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경제, 따라서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용불안정과 저임금은 노동의 열정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의 한 대목을 보자.

"한 노동자는 자신이 10년 가까이 현대차에서 일했는데, 그 사이 자신을 고용한 인력회사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새로운 고용 계약서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니가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가'하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략) 더 절실하게 들렸던 얘기는 그들이 일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일자리에 대한 불안과 저임금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은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지적하고 있다. 집, 자녀교육,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생산 투입 에너지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아울러 "노동자들에게 의욕을 불어넣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바로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믿음"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그들은 임금을 주는 척만 했고, 우리는 일하는 척만 했다"는 러시아 속담은 지금 우리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말이다.

결국 노동자 개인의 불행은 우리 모두의 불행일 수밖에 없다. '귀족노조'와 '철밥통' 이야기가 잔인할 뿐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의 밥그릇을 지켜주지 않으면 내 밥그릇도 무사할 수 없기때문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강조한 것은 바로 이 공감의 정신이었다. 따라서 나는 새해 인사로 이렇게 말하려 한다.

"새해에는 '철밥통' 쟁취하세요. 저도 돕겠습니다."


태그:#철도노조, #코레일, #철밥통,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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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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