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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묻습니다. "진짜 스님이세요" 스님이 대답합니다. “머리 깎고 스님 흉내 내고 있단다”
▲ 인연 둘째가 묻습니다. "진짜 스님이세요" 스님이 대답합니다. “머리 깎고 스님 흉내 내고 있단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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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참 좋습니다. 속리산 문장대 거쳐 천왕봉으로 향합니다. 등산화에 아이젠까지 붙인 아내가 자꾸 산을 내려가잡니다. 눈 때문에 미끄러워 더 이상 못 걷겠답니다. 아내에게는 포근한 날씨와 맑은 하늘도 소용없습니다. 세 아들과 저는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아내 볼멘소리 흘려들으며 길을 걷습니다. 반대편에서 스님 한분이 고개를 넘어옵니다.

눈처럼 하얀 얼굴을 한 스님이 세 아들과 아내 그리고 제 꼴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이윽고 어디까지 가는지 묻습니다. 저는 당연한 듯 천왕봉 간다고 말했습니다. 스님이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아이들 등산화가 많이 젖었답니다. 곧 해가 질텐데 동상 걸릴까 걱정이랍니다. 뒤돌아 산을 내려가면 좋겠답니다. 눈 녹고 날 풀리면 산에 다시 오랍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눈치 없이(?) 고개를 심하게 끄덕입니다. 스님이 맑은 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거부할 수 없는 눈빛입니다. 하얀 눈길 헤치며 정상 밝겠다는 불타는 욕심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결국, 천왕봉은 포기하고 경업대로 발길 돌려 산을 내려왔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홀연히 스님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 분 말 한마디에 홀린 듯 산을 내려왔습니다.

자연이 아름답게 키운 나무, 자연이 아름다움을 반쯤 빼앗아 갑니다.
▲ 정이품 송 자연이 아름답게 키운 나무, 자연이 아름다움을 반쯤 빼앗아 갑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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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쌓인 법주사 팔상전이 아름답습니다.
▲ 법주사 눈쌓인 법주사 팔상전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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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꽁꽁 얼었습니다. 눈썰매장이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이 빙판길을 망아지처럼 달립니다.
▲ 빙판길 길이 꽁꽁 얼었습니다. 눈썰매장이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이 빙판길을 망아지처럼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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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차는 청마로, 아이들은 망아지로 변했습니다

지난 4일 새벽, 곤히 잠든 세 아들을 깨웁니다. 충북 보은과 괴산군 그리고 경북 상주군을 가르는 속리산으로 떠나야 합니다. 아이들이 의외로 쉽게 일어납니다. 출발이 좋습니다. 따뜻한 아파트를 벗어나 차에 오르기 전, 하늘을 봅니다. 새벽별이 총총합니다. 날씨도 포근합니다. 자동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갑자기 낡은 자동차가 콧바람을 뿜어내며 푸른 말로 변합니다.

이제 금속말을 몰고 속리산을 향해 힘차게 달리면 됩니다.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 낡은 차는 청마로 변해 좋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이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 부질없는 꿈이었습니다. 세 아들은 청마 뱃속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날뛰더군요.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차를 몰아 목적지에 닿았습니다. 속리산 들머리,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세 아들을 맞습니다.

정이품 벼슬을 지낸 소나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나무를 바라보니 한쪽이 허전합니다. 그 모양이 안타까워 안내문을 살폈습니다. 안내문에는 강풍과 폭설로 나뭇가지 한쪽이 많이 부러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자연이 아름답게 키워낸 나무, 야속하게도 그 자연이 아름다움을 반쯤 빼앗아 갔습니다. 안타깝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일, 부족한 인간이 탓할 필요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조금 들여다 본 후, 속리산으로 잰걸음을 놓습니다. 산으로 오르는 길옆에 법주사가 보입니다. 볼거리 많은 법주사, 하산 길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곧바로 세심정을 향해 걸어갑니다. 길 위에 눈이 수북합니다. 지난해 내린 눈이 녹지 않았군요. 시원스레 뻗은 가로수 아래는 빙판길입니다. 세 아들은 쌓인 눈이 마냥 신기합니다. 여수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세 아들은 쌓인 눈이 신기합니다. 여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 눈 세 아들은 쌓인 눈이 신기합니다. 여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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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뒤덮인 문장대에 올랐습니다. 문장대 아래 나무의자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 겨울산 하얀 눈이 뒤덮인 문장대에 올랐습니다. 문장대 아래 나무의자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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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는 거대한 바위입니다. 바위 옆으로 실처럼 연결된 철제계단 있는데 계단 타고 오르면 속리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 문장대 문장대는 거대한 바위입니다. 바위 옆으로 실처럼 연결된 철제계단 있는데 계단 타고 오르면 속리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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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문장대, 잘 찍은 흑백사진 같습니다

여수는 눈 구경하기 힘듭니다. 혹시 눈이 내리더라도 땅에 닿으면 곧 사라지죠. 아이들 입장에서는 참 야속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야말로 눈부신 눈(雪)이 눈(目)앞에 마음껏 펼쳐져 있습니다. 또, 길은 꽁꽁 얼었습니다. 눈썰매장이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은 타고난(?) 운동신경을 발휘하며 빙판길을 망아지처럼 달립니다. 신나게 미끄럼도 탑니다.

반면, 아내는 걸음이 늦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입니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길을 걷는데 평소보다 두 배는 늦습니다. 결국, 버티다 못한 아내가 산중턱 휴게소에서 아이젠을 샀습니다. 그 후, 등산화에 아이젠 붙인 아내가 의기양양하게 산을 오릅니다. 그렇게 하얀 눈이 뒤덮인 문장대에 올랐습니다. 오후 1시, 문장대 아래 나무의자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웁니다.

식은 김밥을 재빨리 뱃속에 집어넣고 문장대에 올랐습니다. 문장대(높이 1054미터)는 거대한 바위입니다. 바위 옆으로 실처럼 연결된 철제계단이 있죠. 그 계단 타고 문장대에 오르면 속리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겨울 산, 색다릅니다. 흰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잘 찍은 흑백사진 같네요. 문장대를 넘는 바람도 봄바람처럼 포근합니다.

그 바람에 취해 한참을 서 있는데 느닷없이 천왕봉이 떠오릅니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속리산은 어떤 모습일까요? 궁금증이 생깁니다. 정상에 발 딛고 싶은 욕심도 올라옵니다. 하여, 비경에 취해 넋 놓고 있는 아이들을 다그쳤습니다. 내쳐 천왕봉까지 가야지요. 넌지시 아내에게 천왕봉 가자는 말을 건넸더니 무리랍니다. 눈이 많이 쌓인 데다 아이젠도 없어 걷기 힘들답니다.

천왕봉 가는 길은 북쪽 능선입니다. 고마운 햇볕이 없습니다. 두껍게 쌓인 눈이 발을 적시고 바쁜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 천왕봉 가는 길 천왕봉 가는 길은 북쪽 능선입니다. 고마운 햇볕이 없습니다. 두껍게 쌓인 눈이 발을 적시고 바쁜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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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 머리는 이미 산 내려갈 길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경업대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 경업대 스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 머리는 이미 산 내려갈 길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경업대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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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와 막내가 눈길을 걸어갑니다. 두껍게 쌓인 눈이 발을 적시고 바쁜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 욕망 둘째와 막내가 눈길을 걸어갑니다. 두껍게 쌓인 눈이 발을 적시고 바쁜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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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깎고 스님 흉내 내고 있단다"

또, 시간도 부족하답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까지 어렵게 왔으니 무리하더라도 천왕봉에 가자고 졸랐습니다.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닙니다. 속리산은 여수에서 세 시간 넘는 거리에 있습니다. 큰 맘 먹고 찾아야 하는 곳이죠. 때문에 웬만하면 이번 산행에서 천왕봉을 밟고 싶었습니다. 망설이는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산길 오르다 여의치 않으면 군소리 없이 발길 돌리기로 했죠.

그렇게 눈을 헤치며 천왕봉 향해 산을 오르는데 길이 점점 수상해집니다. 문장대 오르는 동안에는 따뜻한 햇볕이 등을 적셨는데 천왕봉 가는 길은 북쪽 능선입니다. 때문에 고마운 햇볕이 없습니다. 다만, 두껍게 쌓인 눈이 발을 적시고 바쁜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막내 손을 꼭 붙잡고 힘겹게 산을 오릅니다. 얼마쯤 걸었을까요? 반대편에서 스님 한 분이 고개 넘어 나타납니다.

스님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습니다. 스님이 제 뒤를 따르던 아이들에게 말을 겁니다. 어디까지 가는지 묻는 모양입니다. 둘째가 목적지는 말하지 않고 느닷없는 말을 던집니다. 진짜 스님이냐고 묻습니다. 헌데, 스님 대답이 재밌습니다. 머리 깎고 스님 흉내 내고 있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어, 스님이 아내에게 아이들 신발이 너무 젖었답니다.

스님이 천왕봉까지 갈 참이냐며 재차 묻습니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소리 듣고 스님 표정이 심각해집니다. 이 상태로는 안 된답니다. 곧 해가 떨어질 테고 기온이 내려가면 아이들 손과 발이 얼어 동상에 걸리기 십상이라네요. 아내 눈이 커집니다. 눈길이 무섭던 아내가 스님 말을 듣고 결심을 굳힙니다. 아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님 말에 적극 동의합니다.

누군가 깊은 산중에서 눈을 치웠습니다. 지나는 길손을 위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 배려 누군가 깊은 산중에서 눈을 치웠습니다. 지나는 길손을 위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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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천왕봉은 스님 말처럼 날 풀리고 눈 녹으면 다시 찾아 오르면 됩니다. 시간 조금 지나도 천왕봉은 멀리 달아나지 않습니다.
▲ 생각 속리산 천왕봉은 스님 말처럼 날 풀리고 눈 녹으면 다시 찾아 오르면 됩니다. 시간 조금 지나도 천왕봉은 멀리 달아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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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옵니다. 무한도전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욕심 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 눈길 산을 내려옵니다. 무한도전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욕심 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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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해, 무한도전 좋지만 욕심 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고개 돌려 저를 바라봅니다. 그만 포기하자는 신호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내에게 단호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얀 얼굴이 인상적인 스님을 바라봤습니다. 스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 머리는 이미 산 내려갈 길을 더듬고 있더군요. 아무 말 없이 그동안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라는 듯 바라보는 스님 눈빛이 이상하게 불같은 정복욕을 끄고 말았습니다.

그날, 스님 얼굴만 쳐다보지 않았어도 천왕봉에 발자국을 남겼을 겁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스님 눈빛과 마주한 순간 모든 일이 부질없어 졌습니다. 발길 돌려 산을 내려오는데 세 아들이 산 내려가는 길을 끝까지 바라보던 스님 눈빛이 잊히지 않습니다. 무리하며 천왕봉 오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가족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속리산 천왕봉은 스님 말처럼 날 풀리고 눈 녹으면 다시 찾아 오르면 됩니다. 시간 조금 지나도 천왕봉은 멀리 달아나지 않습니다. 올 한 해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렵니다. 조급한 마음에 모든 일 한 번에 끝내려는 생각 접고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 살아야지요. 무한도전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욕심 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산속에서 발길을 돌리며 아내가 스님 이름을 물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굳이 이름까지 알 필요 없답니다. 잠시 나눈 몇 마디 대화로도 인연의 끈은 충분하다는 말이겠죠. 산 속에서 만난 스님 덕분에 속리산 천왕봉 구경도 못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속리산 천왕봉 밟지는 못했지만 썩 기분 나쁘지 않네요. 맑은 눈을 가진 스님 만났고 또 하나의 도전을 남겨뒀으니까요.

막내가 공연을 합니다. 판소리 한마당이 펼쳐졌습니다. 문장대에서 만난 등산객들이 배낭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꺼내 놓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 공연 막내가 공연을 합니다. 판소리 한마당이 펼쳐졌습니다. 문장대에서 만난 등산객들이 배낭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꺼내 놓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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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속리산, #문장대, #천왕봉, #법주사, #팔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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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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