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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2010. 4.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자목련(2010. 4.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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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이제 곧 연말이다. 해마다 이즈음이 되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뜻으로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강추위 속에 올 연말연시 송구영신을 맞으면서 몹시도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철나자 망령난다"고 하더니 일흔에 이른 이제야 철이 든 모양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 한다. 이즈음 내가 원주의 한 아파트에서 살게 될 줄이야. 나는 서울에서도 30년을 넘게 차도 닿지 않은 북한산 중턱 단독주택에서 대문도 없이 살았다.

교단에서 물러난 직후 서울을 떠나 강원도 안흥 산골 말무더미 마을에서는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6년 남짓 살았다. 그러다 보니 집 가까운 곳에는 가게가 없었다. 그렇게 갑갑하게 살다가 이즈음에는 내 집 언저리에 온통 편의점으로 도시문명의 편리함을 한껏 누리고 사는 셈이다.

이즈음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빵집에 들릴 때면 나는 많은 종류의 빵 가운데 으레 별칭 '곰보빵'이라는 소보로 빵을 집는다. 그리고 그 소보로 빵을 씹으며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곤 한다.

가난했던 고교시절

내가 고교 때 서울 계동 중앙학교 옆 꼬부랑 할머니 집 건넌방을 사글세로 살았던 그 시절은 참 바빴다. 새벽 4시 통금해제 사이렌 소리나 교회 종소리에 잠이 덜 깬 상태로 옷을 주워 입고 대문 밖을 나가면 그 길로 청진동 동아일보보급소까지 달음박질이었다.

신문보급소에 이르면 4시 30분 전후다. 보급소 구역조장으로부터 신문 이백여 부를 받아 옆구리에 안고서 배달구역인 누하동으로 또 달음박질이었다. 한 시간 30분 정도 구역 독자 집에 배달이 끝나면 6시 30분 전후로, 거기서 계동 집까지 달려가면 7시가 조금 넘었다.

그제야 밥을 해먹거나 주인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수송동 조계사 옆에 있는 학교(중동고교)로 갔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들고 곧장 보급소로 간 뒤 석간을 받아 배달구역으로 달려갔다. 배달 후 보급소로 가서 가방을 찾아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계 침처럼 바쁘게 돌아가던 생활이다 보니 점심 도시락을 쌀 수 없는 날이 더러 있었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 구내매점도 없었다. 그런 날 점심시간에는 슬그머니 운동장 수돗가로 가 물로 배를 채운 뒤 교실로 돌아오곤 했다.

'두꺼비' 친구

그런 내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 내 뒤 자리 '두꺼비' 라는 별명의 한의섭(당시 신문 연재 인기 만화 '두꺼비' 안의섭 화백과 이름이 같기에) 친구는 그 며칠 후부터 아침에 등교하면 슬그머니 빵이 담긴 봉지를 내 책상에 아무도 몰래 넣었다.

"얘, 아무 소리 말고 먹어."

그런 날 나는 점심시간에 그 빵 봉지를 들고 수돗가로 가서 주린 배를 채웠다. 그 빵 봉지에는 곰보빵이라는 그 소보로빵이 두어 개 들어있었다. 그 빵은 꿀맛으로 입안에서 저절로 녹았다.

그 얼마 후 내가 가회동으로 숙소를 옮긴 뒤부터는 주인아주머니가 매일 도시락을 싸주셔서 그 친구의 빵 봉지는 사라졌다. 내 나이가 들수록 그때의 일이 새록새록 다시 돋아나 나는 지금도 빵집에 가면 그 소보로 빵을 집는다. 그때의 그 소보로 빵은 나에게 '눈물 젖은 빵'이었다.

나는 교단에 선 뒤 삶의 여유를 찾았다. 그때부터 두꺼비 한의섭 그 친구를 여러 번 찾았으나 여태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일찌감치 미국 LA로 이민을 간 모양이다. 동창회 주소록에 나와 있는 그의 집으로 몇 차례 편지와 전화로 연결해도 한 번도 닿지 않았다. 2004년 내가 LA에 가서 수소문해도 끝내 연결돼지 않았다.

고교친구 한의섭으로 그의 별명은 '두꺼비'였다(1965년).
 고교친구 한의섭으로 그의 별명은 '두꺼비'였다(1965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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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전, 고교 졸업앨범 속의 까까머리 내 모습(1965년).
 49년 전, 고교 졸업앨범 속의 까까머리 내 모습(1965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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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

이제 곧 고교를 졸업한 지 50년에 이른다. 나나 그나 이제 인생의 황혼기인 일흔에 이를 테다. 진짜 친구는 가난할 때 만난, 나에게 밥 한 그릇 준 친구일 것이다. 정말 그 친구는 죽기 전에 꼭 만나 내가 밥을 두어 번 사고 싶은데 현재로서는 만날 방법이 없다. 1965년 중동고교 졸업, 졸업 당시 그의 주소는 성북구 성북동 175-28이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독일의 시인 괴테는 그의 시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노래하였다. 나는 그때 그 친구가 몰래 책상에 넣어준  그 눈물 젖은 소보로빵 탓인지 늘그막에 이런저런 사람들의 인생을 얘기하는 글쟁이로 사나보다.

"가난한 시절의 참다운 우정은 꽃보다 아름답다."


태그:#곰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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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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