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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의 교수들이 2013년 한 해를 규정하는 사자성어로 꼽은 말입니다. <교수신문>이 전국의 교수 622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204명(32.7%)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문 측은 박근혜 정부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정책과 인사를 반복하는 것을 우려한다는 뜻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권은희, 여걸·21세기형 유관순·헌법 수호자"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수사 실무책임자였던 권은희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지난 5월 '국정원 대선개입·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에서 10시간 넘게 참고인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 참고인 조사 받은 권은희 수사과장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수사 실무책임자였던 권은희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지난 5월 '국정원 대선개입·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에서 10시간 넘게 참고인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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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행역시를 언급한 것은 <오마이뉴스>의 '올해의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올해의 인물'로 권은희(40)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선정했습니다. 지난 11일부터 선정 위원들이 꼽은 결과입니다. (관련기사 :'2013년 올해의 인물' 선정위원으로 모십니다)

기사의 댓글과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등 SNS의 투표를 종합했습니다. 지난해 대선 전후부터 박근혜 정부에 쓴소리를 해온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박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다 정부와 여당, 보수단체에 '종북 신부'로 낙인된 박창신 원로신부, 윗선의 수사 방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징계를 당한 윤석열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장 등도 뒤를 이었습니다.

누리꾼들은 권 과장을 '여걸', '21세기형 유관순 열사', '헌법 수호의 일인자' 등 다양하게 평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두운 음모에 한줄기 빛으로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줬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분', '부당한 상부 지시에 당당하게 맞서 진실을 밝힌'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그야말로 순리를 거스르려는 움직임에 맞섰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권 과장은 이미, '리영희재단'의 제1회 리영희 상, 참여연대의 '의인상', 경제정의실천연합의 '경제정의실천시민상'을 수상했습니다.

2013년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많이 일어난 한 해였습니다. 국정원을 비롯해 국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많은 국민이 분노했습니다. 또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정국을 혼란시켰죠. 정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통합진보당을 탄압하는 등 국민행복, 소통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이어왔습니다. 이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누리꾼들의 마음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용기를 가진' 권은희 과장에게 모아진 것 같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도 말문이 막히다

권은희 과장은 2004년, 33기로 사법연수원 수료한 뒤 변호사로 개업했다가 2005년 특채로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사법고시 출신의 첫 여성 경정으로, 당시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원칙은 지키되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온화하고 부드러운 조직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과거의 역사적인 경험으로 국민들이 경찰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국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친절하고 헌신적인 경찰상을 정립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후 7년 만에 다시 언론의 관심이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지난해 12월 11일, 당시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었던 권 과장은 '국정원 직원이 오피스텔에서 대선 개입 댓글을 달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그 뒤 두 달 가까이 수사를 지휘하다 석연찮은 이유로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전보됐습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 다음 날 그는 "경찰 윗선의 개입으로 수사가 축소됐다"고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했습니다. 이 폭로 이후, 지난 8월 국회 국정조사 특위를 비롯해 현재 진행 중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증인석에서 그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당 의원들의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8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때였습니다.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이 질문했습니다.

김태흠: "공무원이라 밖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당선되길 바랐죠?"
권은희: "수사를 진행하기에 여념 없어서 투표도 못했습니다."
김태흠: "마음속에 (지지했던 후보가)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도 이 나라 대통령이 문재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권은희: "의원님이 하고 있는 질문은 헌법에서 금지하는 '십자가 밟기'와 같은 질문입니다."

'십자가 밟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기독교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밟고 가도록 강요한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헌법에 보장되는 양심의 자유를 건드리는 것을 질책하는 이 발언에, 김 의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권은희 과장 수상소감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다"

'국정원 댓글사건'을 축소하라는 상부의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한 권은희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서 수사과장)이 지난 4월, 서울 송파경찰서로 출근한 뒤 업무를 보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국정원 댓글사건' 경찰 윗선 개입 폭로한 권은희 수사과장 '국정원 댓글사건'을 축소하라는 상부의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한 권은희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서 수사과장)이 지난 4월, 서울 송파경찰서로 출근한 뒤 업무를 보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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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신 발언으로 권 과장은 청문회 스타가 됐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사무실에 찾아와 빵과 응원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힘내라"는 응원 메시지가 담긴 화분이 배달됐습니다. 자연히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사태의 본질이 흐려질까 염려했고, 공직자로서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올해의 인물' 선정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그는 같은 이유로 난색을 표했습니다. 대신 수상 소감을 보내왔습니다. 공직자로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순리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됩니다. 다음은 권은희 과장의 수상 소감입니다.

"저는 마땅히 수사과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와 누리꾼이 선정하는 '2013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어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많은 이들의 바람처럼 진실을 소중하게 지키는 모습으로 늘 함께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한 해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에는 순리대로 움직이는, 행복한 대한민국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2000~2012 <오마이뉴스> '올해의 인물'

2000년 문정현 신부(매향리 공대위 활동 등)
2001년 화덕헌(누리꾼. 이문열 도서 반환운동)
        박경석(장애인이동권연대 상임공동대표)
        덕성여대 총학생회 및 교수협의회
2002년 행동하는 누리꾼
2003년 문규현 신부(새만금 및 부안핵폐기장 투쟁)
2004년 국보법 폐지 여의도 천막농성단 1000명
2005년 노충국 부자
2006년 평택 대추리 사람들
2007년 참언론실천 시사기자단(전 <시사저널> 기자들)
2008년 촛불소녀
2009년 용산참사 유가족
2010년 천안함 북풍 이겨낸 6·2 지방선거 유권자들
2011년 희망버스 기획자 송경동 시인
2012년 왕복 40시간 대선 투표 인도 벵갈루루 거주 재외교포 김효원씨



태그:#권은희 수사과장, #올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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