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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선생이란다. 하여, 풀꽃을 좋아하든지 풀꽃 같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교사이겠거니 했다가 책 뒤표지에 실린 다음 글을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꽃얼굴이 작아서 예쁜 줄 모르는 풀꽃들
고개 숙여 들여다보면 다 달라요, 다 예쁘고
아이들 한 명 한 명 보아주는, 저는 풀꽃선생입니다.
 

'꽃'이 작아서가 아니라 '꽃얼굴'이 작아서라니! 나도 풀꽃을 무척 좋아한다. 아니, 그 정도의 말로는 부족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반 무릎 자세로 앉아 고 작고 앙증한 꽃을 가만 들여다본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지만 나는 꽃을 보았지 꽃얼굴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도 풀꽃선생처럼 꽃에서 꽃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23년째 남자 중학교에서만 근무한 '풀꽃선생'

안정선의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교육공동체벗> 표지
 안정선의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교육공동체벗> 표지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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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선생 안정선(서울 경희중학교)은 23년째 남자 중학교에서만 근무하고 있는 국어교사다. 안 교사의 눈에 비친 요즘 중학생들의 모습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학교의 현실에 투영된 아이들의 모습이(빛과 어둠) 그 두 가지를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안 교사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다는 데서 더 중요한 이유를 찾고 싶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우리 아이들, 수업시간에 정말 '졸라' 잔다. 난 그걸 또 열심히 깨우고 다닌다. 내가 존경하는 한 선배 교사는 자는 아이들 손을 꼬옥 잡아준다고 한다. 그러면 미안해서 살며시 깨는 아이도 있지만 선생님 손을 꼭 잡고 편히 자는 아이도 있단다. 나도 처음에는 손을 꼬옥 잡아 주지만 이내 등짝을 후려치고 옆구리를 찌르며, "애들아, 밥 먹고 학교 가야지!"하는 엄마 코스프레까지 한다.

깨우면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스스 일어나던 아이들도 수업 만족도 조사를 할 땐 "깨워주셔서 감사하다.", "우릴 깨우는 걸 보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것 같다." 이런 말을 쓰는 걸 보면 자기들도 그냥 자게 두는 걸 원한 건 아닌 것 같다. (215쪽)'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 물론 안 교사도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졸라' 자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그 답을 아프게 재확인하는 쪽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큰 틀로만 사고하다 보면 놓치기 쉬운 또 다른 진실의 얼굴을 발견해내는 것이 풀꽃선생 안정선의 능력이자 미덕이다. 뭔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걸맞은 근거들을 모아놓은 듯한 정형화된 글을 읽을 때의 식상함이 안 교사의 글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풀꽃선생의 제자 중에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영화 공부를 하는 녀석이 있단다. 스승의 날 몰래 집을 찾아와 우편함에 선물과 편지를 넣어 두고 가기도 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을 연습장 한 권 가득 직접 손으로 베껴다 주기도 했던 꽤 감성적이고 순수한 아이였다는데, 안 교사의 기억에는 녀석의 해맑은 얼굴보다는 까만 머리꼭지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하긴 일년 내내 잠만 잤으니까 그럴밖에.

하지만 졸업 후에 청년이 되어 찾아온 제자가 중3 시절 수업시간에 배운 한 편의 시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안 교사는 놀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어려운 시를 자면서도 듣고 있었다니! 아마도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썼음직한 풀꽃선생의 자작시가 참 멋지다. 마치 아이들의 영혼으로 들어가서 쓴 듯하다. 
       
누군가 나를 깨울 때까지
내가 잠들었다고 해서 아주 세상을 등지려는 건 아니외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울 사람을 기다리고 있소.
언젠가 내가 스스로 깰 때까지든,
누군가 진짜로 내 잠을 깨울 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나는 잠시 엎디어 있을 테요.
그렇다고 아주 잠들었다고 생각지 마오.
이렇게 납작 엎드려서도 세상을 다 보고 있소.
이렇게 딴 세상을 꿈꾸는 듯 보여도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있소.
우리는 주워듣고도 큰다오.
그러니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마오.
그러니 제발 우릴 버리지는 마오.


안 교사의 글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아니, 묵직하면서도 따뜻하다. 이 또한 학교 교육을 바라보는 안 교사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지만, 무거울 수도 있는 것을 조금은 덜 무겁게 느끼려는 긍정의 안간힘이 글의 행간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환하게 아픈 형용모순의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중에서 근무하는 안 교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딸은 안 교사가 가르치던 학교아이들과 같은 학년인 적이 있었다. 중3 때였다. 딸아이의 심리검사 결과 '불안'이 높게 나왔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이맘 때 여자아이들은 많이들 그런다며 안심을 시키지만 잠깐 호전된듯하던 증세가 다시 3~4년째 지속되자 안 교사의 고민은 깊어진다. 

다행히도 딸의 불안심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해소가 된듯하다. 책에는 아예 그런 언급이 없다. 안 교사가 딸아이의 불안심리를 거론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안 교사는 성인인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도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심지어는 딸아이의 우울과 불안이 자신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도 모른다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두워질듯하던 글의 분위기가 곧 반전된다.

'딸아이는 프라이팬 손잡이가 사람 쪽으로 놓여 있으면 와서 야단한다. 이러다 툭 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느냐고. 불안은 한편으로는 사고를 예방하고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오늘도 수업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수업준비를 한 번 더 한 덕분에 아이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맙다. 나의 불안!(243쪽)'

안 교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꿈이 교사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이 '시골학교 선생님'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그녀의 꿈을 부추긴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뼈아프게 경험한다. 그 일로 야학을 그만두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교사의 꿈마저 접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만, 풀꽃선생은 오히려 그 일로 교사로서 더욱 단련된다. 안 교사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생각도 이렇게 뒤바뀐다.

'안이하게 살면서 자기가 좋은 교사인양 착각하는 선배교사들을 많이 보아 왔다. 나 자신도 어느새 그런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럴 일이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책망의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에 감사할 일이다. 아무 데서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때 나는 가장 나태한 교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247쪽)'

학교가 죽어야 한다면, 저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소년에게 물들다>와 2부<이 죽일 놈의 사랑>에는 유쾌하고 엉뚱한 소년들의 매력이 담뿍 담겨 있다. 답답한 학교 안에서도 쉴 새 없이 기발한 놀이를 만들어 내는 건강한 모습과 사춘기 소년들의 거칠고 미숙한 심리와 특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을 교사만이 아닌 사춘기의 자녀를 둔 학부모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그만큼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자식 간에 서로 소통하는데 큰 보탬이 될만하다.

3부〈천진하고 무식한 아름다움이여>와 4부 <학교를 그리다>는 자신의 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천진난만한 소년들과의 수업 이야기를 통해서 교사와 학교의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한다. "샘은 우리가 무식해도 얼마든지 이해해 주실 거죠?" 하는 아이들의 순진한 표정에 풀꽃선생은 그 천진한 무식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한편, '교사는 어떻게 늙어 가는가?' '그래도 학교는 버릴 수 없다.' 등의 글에서 드러나는 풀꽃선생의 중견교사로서의 교육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뭉클하고 깊다. 책의 말미에 가서는 내내 담담하던 어조가 갑자기 뜨겁게 솟구치기도 한다.
      
'가끔 '왜 대안학교를 꿈꾸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학교가 죽어야 교육이 산다'는 일리치의 오래된 담론을 새삼 들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나…… 학교에 한번 와 보라. 먼지투성이 좁은 책걸상에 앉아 있는 저 아이들은 왜, 유학도 가지 않고 대안학교로 가지도 않고 홈스쿨링도 검정고시도 택하지 않고 저기 앉아 있는가. 학교가 죽어야 한다면 저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기 앉아 있는 아이들 중에는 '원수 같은' 사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아이들도 많다. 아니 어쩌면 엉덩이가 터지게 매를 맞을지라도, 소매가 반들거릴 만큼 새까맣게 때가 앉은 교복을 입고서라도 '학교에는' 나오는 그들에게 학교는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다.(295쪽)'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풀꽃선생이 중학교가 아닌 고등학교(특히 인문고)에서 오래 근무했다면 이런 풋풋하고 온기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사실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인 체험의 자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엇비슷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3년차 풀꽃선생 안정선의 교단일기인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을 강권하는 이유기도 하다.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 - 풀꽃선생의 남중 이야기

안정선 지음, 교육공동체벗(2013)


태그:#풀꽃선생, #안정선, #교육공동체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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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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