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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관 밖을 나서자마자, "영화 너무 잘 만들었다"며 "서너 번 눈물 흘린 것 같다"고 운을 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관 밖을 나서자마자, "영화 너무 잘 만들었다"며 "서너 번 눈물 흘린 것 같다"고 운을 뗐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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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바람이 불면 그리운 사람이 찾아온다"고. 그래서였을까? 영화 <변호인>이 개봉하는 19일, 부산에서도 바람이 거셌다. 얼마나 그리운 사람이 찾아오려고 바람이 이리도 거세게 부는 걸까? 

장원덕(66)씨의 마음이 그랬다. 그는 '노변'(노무현 변호사의 약칭이자 애칭)이 지난 1978년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연 뒤 채용한 첫번째 직원이었다. 지금은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그는 35년간 노변 앞과 뒤의 역사를 밟으며 걸어왔다. 그래서 노변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은 그에게 각별하다.

노무현 추모와 찬양 사이


이날 부산 서면의 한 영화관에서 영화 <변호인>을 함께 본 장씨는 "노변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라며 "정의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불의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렇게 노변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 계기는 1981년 부림사건이었다. 노변도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림사건은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고백했다. 장씨는 "노변이 그 전에는 술도 자주 먹었는데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에는 우리와 술 한 잔 먹어본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영화 <변호인>은 부동산 등기와 조세소송 등으로 '돈 잘 버는 변호사'가 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역)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모델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노변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노무현 추모 영화'이고, 누군가(특히 애국보수진영)에게는 '노무현 찬양 영화'로도 읽힌다. 물론 장씨는 전자의 경우다.

장씨는 "노변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게 되면 '이런 인간적인 삶이 있었구나' 느끼며 그에게 돌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며 "저쪽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반신반인'으로 모시는데 노변은 그냥 인간이다"라고 강조했다. "암울한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영화 <변호인>이 '노무현 추모'에만 머문다면 그 의미는 반쪽이 될지 모른다. 복고는 현재와 연결될 때에만 또다른 반쪽의 의미를 불러온다. 이 영화는 '노변의 법정투쟁'을 통해 우리가 여전히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뜨겁게 증명한다. 한 누리꾼(@90m**)은 "영화는 과거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윤회처럼 영화 속 시대를 이어서 살고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고 했다.

법정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을 외치자 차동영 경감(곽도원역)이 "이 빨갱이 새끼야!"라고 호통치는 장면. 그것은 최근 박근혜 정부가 벌이는 종북몰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야만의 시대가 윤회한 것일까? 장씨는 "보수쪽에서 이 영화를 종북영화로 보고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내지 않을까 싶다"라며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부산의 밤거리는 여전히 바람이 거셌다. 한때 이곳은 '부산의 자존심'이었던 노변의 '진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속물 변호사'의 진지였고, 고문의 흔적을 보고 "자유와 인권, 인간다움과 민주주의"(@slowgood***)에 눈뜬 노동-인권변호사의 진지였다. 그래서 영화관과 돼지국밥집, 카페 등에서 장씨와 나눈 대화가 '노무현 추억하기'에만 머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정말 괄시받았어요"

- 영화 보면서 눈물 흘리셨죠?
"저도 33년 전이 생각났어요. (부림사건은) 제5공화국이 자기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공안정치를 하면서 용공으로 조작한 거잖아요. 이호철이는 무죄받고, 나머지는 나중에 재심해서 무죄받았어요. 노변은 부림사건을 하고난 이후부터 '공권력이 이러면 이 나라가 안되겠다' 싶었던 거예요. 그때부터 시국사건 등 모든 사건과 현장에 다 뛰어다닌 거예요. 재판도 안해요. 그러니 생활비도 못주고, 우리한테 봉급도 못주고. 그러더니 자기가 정치권에 가서 국회의원이 돼서 이것을 바로잡겠다는 거예요. 안그러면 바로잡지 못한다, 이거예요."

- 저는 영화 초반부터 찡하더라구요.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됐다고 동료들에게 괄시받고.
"정말 괄시받았어요. 변호사들한테 오만소리 다 듣고. 부산변호사회에서 쫑크 주고. 그때는 대부분이 서울대출신이었어요."

- 영화는 노변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거기가 어딘가요?
"버스타고 출근할 때 노변은 대신동에 살았어요. 대신동에 있는 작은 일반주택에서 전세로 살았죠. 사무실은 법원 앞에 있었구요. 그런데 그때 버스는 안탔어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지) 두달 만에 차을 뽑았어요. 차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다닌 거죠."

- 실제로 노변이 (노가다로) 삼익아파트를 지었나요?
"실제로 변호사 되기 전에 고시공부 하면서…. 사모님한테는 공부하러 간다고 속이고."

- 노가다를 뛴 건가요?
"노가다를 했지요. 두어 달 했지요. 노가다. 영화에 나오는 거처럼.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재벌은 대진건업이에요. (노변에게 고문변호사 제안했던) 대진건업도 세무조사 받았어요. 그때 전두환시대여서 죽이겠다는 거지요. 부림사건은 정권의 통치기반를 확보하기 위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면서 만들어낸 용공 조작 사건이에요.". 

-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남천동 삼익아파트 살 때 진짜로 웃돈을 더 주고 산 거예요?
"그렇게는 안했어요. 그때 남천동은 부산에서 잘 나가는 판검사들, 기업 사장들만 사는곳이었어요. 30층에 올라가면 끝내줘요."

- 배우 송강호씨가 노변 역할을 아주 잘했죠?
"잘하데요. 대사 외우고 하느라 욕봤겠지만."

"소탈하고 맘을 편하게 해줬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은 "노변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라며 "정의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불의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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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변이 개업한 1978년에 들어가신 거죠?
"노변이 1978년도 5월에 개업했어요. 판사생활 6개월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하겠다고 해서 한 거지요. 그때는 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저항하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그저 돈을 벌어서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거죠."

- 누가 노변을 소개해준 건가요?
"법조계 아는 친구를 통해 소개받았는데, 소개받자마자 바로 일하자고 하데요."

- 노변의 맘에 드셨나보네요.
"그랬지요."

- 그 전에는 뭐 하셨어요?
"제가 26살 때 화상을 입어서 그때까지 직장을 못 다니고 있었어요. (화상입은 손과 팔의 일부를 보여주며) 손도 이래가지고…."

- 처음에 노변을 만났을 때 어땠나요?
"경상도 억양이 있으면서 소탈했고, 특히 맘을 편하게 해줬어요. 저는 31살이고, 노변은 33살이라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갔어요. 저는 그때 화상 입어서 긴 소매를 입고 갔어요. 그런데 노변이 '옷 한번 올리봐라' 해서 올리니까 '앞으로 사무실 나올 때는 반소매 입고 오라'고 해요. 제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손님이나 누가 보면 손 위로도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근데 넌 이것밖에 화상을 안입었다 아이가, 근데 왜 숨기나? 떳떳하게 나가자'고 했지요. 그때부터 용기내서 여름에는 반소매를 입었지요. '떳떳하게 살라'는 거예요."

- 영화를 보면 가난에 맺힌 한이랄까? 권 여사님 출산 비용도 대지 못할 정도로 그랬던 것 같더라고요.
"가난했죠. 너무너무 가난했죠. 그때는 고시 공부할 때였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물공장에 처음 취직했어요. 그게 부산에 있었지요."

- 그물공장에 있다가 고시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고시공부한 거죠. 형님도 법대 나왔잖아요. 그렇게 어깨 너머로 공부하다가 권 여사도 만났지요."

- 그렇죠. 형님인 노건평씨가 법대를 나와서 세무공무원을 했죠.
"아니에요. 법대 나온 형은 제일 큰형이구요, 세무공무원을 한 분은 둘째 형 노건평씨죠. 두 형님이 노변 뒷바라지를 많이 해줬어요. "

"유독 강자에게 독했죠"

- 영화에도 나오지만, 서울대 연대 고대 등이 대부분인 변호사 사회 속에서 상고출신 변호사가 살아남는다는 게 엄청 힘든 일이었을 것 같아요.
"살아남는 것도 있고 열등의식도 있었죠. 같은 사건의 원고와 피고를 맡았다고 할 때 노변한테 지는 변호사는 쪽팔리잖아요. 노변은 젊은 혈기로 대충대충하지 않고 파고들어가요. 판례를 연구하고 공부하고, 형사 변론요지나 민사 준비심리 등을 다 손수 준비했어요."

- 학력 콤플렉스가 상당했을텐데.
"너무 강했지요. 선후배가 없잖아요. 변협에도 선후배가 없어요. 그나마 은행에 가면 선후배 대우를 받아요. 법원도 마찬가지에요. 사무관들도 인문계 나왔지 상고출신은 없죠. 법정에서 공손하게 재판하면 될텐데 강한 기질이 있어요. 지금은 인터넷에서 재판 결과를 보면 되는데 그때는 기록을 열람하지 않으면 다음 재판을 준비할 수 없는 시절이에요. 복사가 안됐거든요.

기록을 좀 보러가면 법원 직원들이 짜고 '기록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 판사실 올라가요. 그래도 기록을 안내려줘요. 그럼 재판을 준비할 수 없잖아요. 노변이 쫓아와서 '내 노무현 변호삽니다, 기록 좀 봅시다, 재판은 준비해야 할 거 아닙니까?' 해요. 그렇게 쫓아와서 메모해 준비해가요. 그런 시절을 얼마나 보냈다구요."

- 그것도 상고출신을 차별하는 것 아닌가요?
"검사한테 달라들고 법률적으로 판사한테 브레이크 걸고. 영화처럼 심하게는 안했지만요. 변호사는 보통 재판장에게 고개 숙이는데, 노변은 재판장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요. 그럼 법원 경위가 와서 '다리 좀 풀어주세요'라고 하면 '내는 이게 편한데 와요?'라고 해요."

- 하긴 법정에서 변호사는 다리 꼬지 말라는 규정은 없잖아요?
"그런 규정이 없죠. 판사 얼굴을 봐주라 이거에요. 판사가 사형을 때릴 수 있도 있지만 그(다리 꼬지 말고 판사 얼굴을 보라는 것) 자체가 아니꼽지요."

- 판사의 권위, 검사의 권위에 도전한 셈이네요.
"그렇게 정면으로 도전했죠. 판검사 출신들은 퇴임하면 교도관 출신이나 경찰출신 등 사건을 유치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요. 그 사람들이 사건을 주면 20%의 리베이트를 줍니다. 부산 변호사 99%가 그래요. 그걸 알고나서 노변이 변협에 의안을 제기해서 '모가지 잘라라'라고 요구했는데 유야무야됐지요."

- 동료 변호사들은 노변이 불편했겠네요.
"불편했지요. 변호사끼리라도 자기가 원고 사건을 맡았는데 피고 변호인이 노변이다, 그럼 피곤하지요. 물고 늘어지니까요."

- 왜 그렇게 변호사 시절에 검사의 권위, 판사의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했을까요.
"첨에는 과연 저래서 이 계통서 밥은 묵을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건이나 올 수 있을까 생각했죠. 일반 직원들도 별로 안 좋아했어요."

-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돈이라도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죠. 노변은 요즘으로 치면 돌직구 스타일이에요. 말을 가슴에 담아두는 스타일은 아니죠.
"그래도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근데 유독 강자한테는 마 쎄리 독해요."

"등기·조세 사건해서 돈벌고..."

- 변호사 개업한 지 얼마 만에 사건을 수임했나요?

"보통 개업은 신문에 알리고, 실제 개업은 그로부터 한달 뒤에 해요. 물론 그 사이에라도 사건은 수임할 수 있어요. 협회에 변호사 등록만 하면 되니까요. 그때 처음에 형사사건 맡았지요. (판사출신) 새 변호사니까 전관예우가 안되겠나 싶어서 노변한테 왔는데, 판검사한테 고개를 숙이나요? 그 시절만 해도 고개만 숙이면 안될 것도 없던 시기였어요. 영화에서도 보면 구형을 조율하잖아요. 그때만 해도 '선배님, 후배님' 하면 바로 됐어요. 근데 노변한테는 선후배가 어딨어요? 상고출신인데. 거기부터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원리원칙대로 하겠다 이겁니다. 민형사소송법 대로 따지겠다는 거죠. 그래서 강하게 나갔어요."

- 처음에는 사건 수임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상고 출신들이 판사하다가 변호사 한다니까 은행에 있는 선후배들이 사건을 갖다줘요. 거기에 기대를 걸었지요. 안 그러면 어떡하나? 인맥이 아무도 없는데요. 자기 인맥은 김해니까, 김해서 논 관련해서 사건이 많이 왔어요."

- 부동산 등기로 돈을 좀 벌었던 것 같은데요.
"(노변이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그거는 사법주사들이나 하는 거라고 안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노변이 법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명함을 직접 팠어요. 그리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명함을 돌렸어요. '내가 변호삽니다'하고. 쪽팔리지. 쪽팔려도 변호사를 알려야 된다면서. 그리고 차를 한대 더 빼자고 했어요. 택시를 타고 다니면 기동성이 없다고요. 택시 타고 각 등기소를 돌 때 드는 택시비를 계산해본기라. 상고출신이니까요. 자기는 교도소 갈 때 직원들은 차로 돌리는 거예요.

사람들이 사무실로 등기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아파트로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근저당 설정할 거면 은행에 나가요. 사무실에는 아무도 안와요. 직원들이 나가서 사건을 받아오는 거예요. 밤샘을 많이 했지요. 전 등기파트가 아니라 서무파트였는데도 손이 모자라서 밤샘을 몇번 해줬어요. 새벽 6시엔가 자기가 사무실 나가 보니 사무실에 불이 들어와 있어요. 보니까 등기 밤샘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뒤부터는 등기파트에는 돈을 펑펑 줬어요. 이렇게 고생하는지 몰랐다고요. 글고 돈이 막 벌어지는 거에요. 그때는 카드가 어딨겠어요. 다 현금이에요."

- 하긴 영화에도 보니까 자루에다가 돈을 담아왔더라구요.
"돈은 집으로 안가지고 가요. 은행에 넣었지요. 은행에서도 '선배님 우리 은행 많이 넣어 달라'고 했어요. 등기로 재미보다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해서 세금 소송을 해보자고 했어요. 그 시절만 해도 세무소송은 있었지만 대부분 세무사들이 이의신청을 했지 변호사는 맡지 않으려고 했어요. 변호사들이 숫자 개념이 좀 없어요. 인문계를 나왔으니 뭘 알아야지. 노변은 숫자개념이 빠삭하잖아요. 그러니까 세무사들이 우리한테 사건을 주는 거예요. 또 승소율이 높았어요. 그래서 '세무소송은 노무현 변호사다'라는 얘기가 나왔어요. 판사도 노변한테 배웠어요. 노변이 준비한 서면이 판결문에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거 해서도 돈을 많이 벌었어요. 등기해서 돈 벌고, 세무해서 돈 벌고 참 잘 나갈 때였지요. "

- 조세소송은 계산에 밝은 상고출신이 유리했겠네요.
"인문계 출신은 잘 몰라요. 상고 출신은 계산에 밝으니까 유리하죠. 조세소송은 인문계 출신한테 안갑니다. 그때 최도술(청와대 전 총무비서관)이 조세실장으로 초안을 많아 잡았어요. 초안을 잡아서 올려주고, 자기도 노변하고 같이 연구하면서 배웠어요. 도술이도 조세공부를 많이 했지요. 도술이는 제 1년 후배예요. 우리는 조세의 조자도 몰라요."

- 노변이 조세소송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지요?
"이름을 많이 날렸지요. 우리가 거의 도맡다시피 했으니까요. 지금은 18곳이지만 부산에 세무서가 5~6곳밖에 없었어요. 그 세무서에 노무현이 세무소송에 밝다면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세무소송에 이긴 사람의 입으로도 퍼졌어요. 기업에도 많이 퍼졌죠."

부동산 등기에 찍힌 '변호사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영화 속 주인공인 송강호가 연일 먹었던 돼지국밥과 '소맥'이 저절로 생각난다"며 돼지국밥 식당을 찾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 속 돼지국밥 식당 에피소드는 영화적 허구라며 노 전 대통령은 삼계탕을 참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영화 속 주인공인 송강호가 연일 먹었던 돼지국밥과 '소맥'이 저절로 생각난다"며 돼지국밥 식당을 찾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 속 돼지국밥 식당 에피소드는 영화적 허구라며 노 전 대통령은 삼계탕을 참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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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 등기로 돈 많이 벌어서 남천동 아파트도 사고, 번듯한 사무실도 마련하고?
"사무실도 3층을 다 빌렸어요. 직원도 6명으로 늘리고 차도 콩코드로 바꿨어요."

- 노변 머리가 좋았네요. 당시로서는 일종의 틈새시장을 파고든 거잖아요. .
"그런 거죠. 더 놀란 것은 이거예요. 정말 뛰어난 사람이죠. 부동산 등기하면 필증이 나오잖아요. 필증을 보면 법무사 누구누구의 도장 찍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변호사 노무현'이 찍히거든요. '장 부장 보세요. 내가 상고 나와서 어디다 선전할 겁니까? 그런데 이 모든 등기에 내 이름이 찍히면 이 사람들이 법률상담도 하지 않겠나? 이래가 내를 알리는 거예요.' 1년 반 동안 부산시에 아파트붐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쎄리 선후배들 찾아가서 등기달라고 해요. 아파트가 은행에 1차 담보가 들어가고, 은행에서 여기서 부동산 등기하라는데 우짤깁니까? 그래서 모든 등기에 '변호사 노무현'이 찍히는 거예요."

- 변호사 세계에서 노변은 '별종'이었죠.
"(나이트클럽에 명함 돌리는 것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때만 해도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이라면 걸음걸이도 딱 이렇게 걷고, 목에 딱 힘주고 그런 시절인데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겠어요?"

- 부동산 등기를 2년 동안 한 건가요?
"부동산 등기를 1981년 1월초에 시작해서 1년 6~7개월 하다가 그만뒀어요. 1982년도까지 했어요. 그리고 조세로 넘어갔죠."

- 부동산 등기로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조세 전문가로도 이름을 날려 변호사로서 그 위상이 높아졌잖아요. 그러면 변호사 사회에서도 그 이미지가 개선됐나요?
"아니요. 그렇게 해도 칭찬 안해주고 또 깎아내려요. 연구하면 될텐데 연구는 안하고 자기들은 판검사 출신으로서는 그런 걸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일반 사건들만 해도 돈 버는데 뭐 하러 머리아프게 조세를 하나? 이런 겁니다."

- 변호사로 잘 나갈 때 술 먹으러 많이 다녔나요?
"많이 다녔지요. 부림사건 애들 면회하기 전까지는 노변이 술 먹으러 가자 해서 많이 다녔어요. 인간적으로 제가 존경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때 당시 변호사 기사들은 변호사들이 12시에 나오든 1시에 나오든 밖에다 대기시켜놓거든요. 밥 먹으면서 노는 데가 있는데 노변은 그런 자리에 기사를 앉히는 거예요. 원래 기사들은 변호사 이야기를 들어서도 안되고 그저 동전치기나 하는 시절이에요.

말이 새면 안된다고 했는데도 '저 친구는 괜찮다'면서 (멀리 있는) 저쪽에 앉히는 것도 아니고 계란을 돌려서 정했어요. 계란을 돌려서 지가 걸리면 중간에 앉아야 해요. 평등하게. '기사도 똑같이 먹고 놀아야 해.' 그렇게 인격적으로 2-3년 하니까 저까지도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인격적으로 대해주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변호사하고 술 먹었다고 온동네 자랑하고 다니고. 그런데 기사가 노변하고 술마셨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미친 놈 아니냐?'고 했어요. 그때 기사는 종이었으니까요."

- 그때는 밥도 같이 안 먹었죠?
"그랬지요."

- 노변에게는 '시대적 파격'이 있었네요.
"노변은 꼭 참석시켰지요. 100프로 참석시켰어요. 근데 제가 왜 참석시키지 않으려고 했냐면 정보가 그런 기사들한테 나오기 때문이에요."

- 여하튼 기사가 있을 정도면 노변도 잘 나갔던 것 아닌가요?
"근데 기사들한테 자리까지 마련해줬어요. 머리 돌아버리지요. 동전치기, 돈따먹기 이런 거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전 7시에 출근하라고 해서 1년간 공부시켰어요. 그런 뒤에는 기사가 기록을 들고 법원에 접수하러 갔어요. 그런 것을 계기로 이후에는 기사 겸 주사를 뽑는 거예요. 기사가 주사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 것을 노변이 만들어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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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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