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년 전 나는 숲을 무대로 한 작품을 어느 매체에 연재하고 있었다. 당시 쓴 원고를 잃어버려 제목도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도 숲의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치열한 싸움을 그리고자 했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월간 연재라 원고는 더디게 나갔고, 몇 개월 만에 나는 스스로 연재를 중단했다. 그 이유는 당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촛불에 참여하는 것과 불통의 성인 명박산성을 넘어야 한다는 급박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갔고 소설은 끝내 사산되고 말았다.

5년이 지난 2013년. 국정원 선거개입으로 촉발된 현 상황은 5년 전보다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민들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루에도 수차례나 들어야 했으며 민주주의를 가장한 반칙과 불법 또한 곳곳에서 성행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은 어느 것이 상식이고 어느 것이 비상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2013년 올해는 촛불을 드는 대신 소설 작업을 하기로 했다. 5년 전 사산된 작품을 모티브로 새로운 작품을 잉태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작품이 <원숭이 그림자>이다. 이번 작품의 무대는 '피스'라고 하는 숲이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숲통령 먹바위 딸과 평화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한 판 대결을 그릴 작정이다.

이 작품은 숲을 무대로 한 우화소설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재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린다. - 필자말

평화는 어디에.
 평화는 어디에.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원숭이 숲을 점령하다

애초 피스(peace)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도 고요한 숲이었다. 울창한 숲엔 먹을 것이 풍부했고 누구 하나 군림하거나 힘센 척 하는 이도 없었으니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따로 없었다. 그랬던 피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백여 년 전 강 건너 숲에 서식하던 원숭이가 떼로 몰려와 피스를 강제로 빼앗은 일 때문이었다.

원숭이들이 피스 숲을 점령한 기간은 무려 사십여 년. 그 사이 피스는 원숭이 세상이 되었고, 원숭이 말이 숲의 공용어로 쓰였다. 숲민들은 원숭이 말을 강제로 배워야 했고, 살기 위해선 그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들며 원숭이처럼 울고 웃어야 했다.   

피스 점령에 성공한 원숭이들은 피스를 통치하기 쉽게 모든 숲민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했다. 고유번호는 마을 이름을 앞에 붙이고 뒤에 숲민의 번호를 적는 식이었다. 고유번호는 목숨 패와 같아 늘 가슴에 달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발견 즉시 개코원숭이나 다람쥐원숭이의 밥이 되었는데, 초기에만 해도 하루 수 십 마리씩 죽임을 당했다.

고유번호 착용을 끝낸 원숭이들은 고유번호를 기준으로 숲민의 성향을 분류하였다. 불령 숲민으로 분류된 곰과 담비, 들개, 고라니, 노루, 고슴도치 등은 일가를 이끌고 일찌감치 대륙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그곳에다 터전을 일구었고, 군사를 조직해 피스를 되찾는 일에 앞장섰다.

피스 통치에 자신이 붙은 원숭이들은 피스를 자신들의 숲으로 만들기 위하여 곳곳에 원숭이 마을을 만들었다. 그 결과 숲 여기저기에서 원숭이를 닮은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그들은 피스의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원숭이로 태어나지 못한 여우와 삵 등은 원숭이 흉내를 내며 원숭이들에게 아첨을 떨었고, 그들은 곧 원숭이들의 일급 참모가 되어 숲민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도 아니면 원숭이 군대에 자진해 들어가 피스를 짓밟는데 앞장서거나 이름만이라도 원숭이로 바꿔 스스로 원숭이 나라의 일원이 된 이들도 많았다. 이러한 일은 피스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 편에서 보면 가관도 아닌 것이었다.

사슴과 노루를 비롯한 몇몇 숲민들이 거병을 하거나 원숭이 우두머리를 처단하기도 했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원숭이들을 감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피스 숲의 생태계가 원숭이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자 숲에 살던 여타 동물들은 피스 인근 숲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피스에서 세력을 키운 원숭이들은 인근의 숲으로 슬금슬금 눈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구실이 없었다. 회의를 거듭한 결과 원숭이들은 피스에서 자신들에게 불만이 가장 많은 마을에다 불을 지르기로 했다. 불령마을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근 숲을 공격할 구실도 찾겠다는 일거양득의 전략이었다.

은밀히 전쟁준비를 끝낸 원숭이들은 새벽을 기해 불령마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하늘로 치솟자 원숭이들은 인근 숲에서 자신들을 공격했다며 붉은 곰의 서식처를 무차별 공격했다. 

전쟁이 벌어지자 숲민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친원파들은 '젊은이들은 전선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을 독려했다. 전선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은 원숭이들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피스의 딸들은 원숭이들의 성노예로 살아야 했다.

원숭이 떼가 연전연승을 하며 주변의 숲까지 점령해 들어가자 먼 대륙에 서식하고 있던 북극곰과 흰머리독수리가 연합하여 원숭이 숲 본토를 공격했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숲이 쑥밭이 되자 원숭이 왕은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원숭이들이 떠나자 대륙에서 피스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군들이 속속 숲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설 자리가 없었고, 크게 반겨주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깨어진 평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숲

원숭이가 떠난 피스 숲은 새로운 점령군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피스를 절반씩을 나누어 가진 후 저들이 원하는 체제로 만들어나갔다. 그 일로 피스 숲은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 북쪽 숲은 북극곰이 차지하고 나머지 숲 절반은 흰머리독수리가 차지했다.

혼란에 빠진 숲민들은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북극곰과 흰머리독수리는 서로 자기네가 차지한 숲이 좋다고 선전했지만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도 없었다.

피스는 분단 이후에도 양쪽 모두 피스의 이름을 따 'S·피스', 'N·피스'라 칭했다. N·피스는 북극곰의 지원을 받은 독립군 대장 출신 곰이 숲통령을 맡았고, S·피스는 흰머리독수리의 지원을 받은 원숭이군대 장교 출신인 먹바위가 숲통령 자리에 올랐다. 원숭이 군대 장교로 독립군을 잡아들이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먹바위가 숲통령에 오르자 친원파들은 살았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분단된 두 개의 숲은 겉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표방했지만, 숲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지도 못했다. 두 숲의 체제에서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N·피스는 먹이를 공동으로 생산하여 고루 분배하는 정책을 펴 특별히 가난한 이도 과하게 부자가 된 이도 없었다. 반면 S·피스는 땅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써서 가난한 이들은 한없이 가난하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 기형적인 숲으로 만들었다.

또 N·피스는 원숭이들이 떠나자 원숭이에게 빌붙어서 호위호식 하던 세력을 다 몰아낸 반면, S·피스는 원숭이에게 협력했던 여우나 삵, 멧돼지, 족제비 등을 다시 등용하여 이전의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제공했다. 그런 일로 두 숲은 피스의 정체성을 두고 서로 다투다 큰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3년에 걸친 긴 전쟁이었으나 인근 숲들이 개입한 탓에 결판을 내진 못했다. 

N·피스는 초대 숲통령에 올랐던 곰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자식과 손자로 숲통령을 이어갔다. S·피스는 종신집권을 꿈꾸던 먹바위가 부하의 총격으로 절명하자 숲은 일대 혼란을 겪었다. 친원파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시작할 무렵 숲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하지만 먹바위의 충직한 부하였던 대머리독수리가 권력을 찬탈하면서 S·피스는 또 다시 독재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대머리독수리에 이어 시궁쥐 숲통령 되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실현을 외치던 숲민들은 대머리독수리 부하들에 의해 떼 죽임을 당했고, 그 시체는 다람쥐원숭이의 먹잇감으로 가공되어 헐값에 팔려나갔다. 대머리독수리가 집권 칠년 만에 숲통령 자리에서 쫓겨나자 S·피스는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권력에 눈 먼 자들은 서로 숲통령을 하겠다며 세력을 모았고 그 결과 반란과 혁명이 밥 먹 듯 일어났다. 한바탕 싸움질하던 그들은 돌아가면서 숲통령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결국 오년에 한 번씩 숲통령을 뽑는 것으로 E·피스 법에 명시했다.

근래에 숲통령이 된 자는 먹바위 집에서 집사 노릇을 했던 시궁쥐였다. 그는 타고난 사기꾼이었으나 먹바위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숲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시궁쥐는 숲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S·피스를 풍요로운 숲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약속했지만, 재임 기간 내내 쥐 산책로를 만들거나 자신들의 별장과 식량 창고를 짓는 데만 열을 올렸다. 그는 틈만 나면 공사 현장을 찾았고 가족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5년 금방 간다. 더 챙겨라 더!" 

시궁쥐는 S·피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계곡을 파헤치곤 그 자리에 별장과 식량 창고를 지었는데, 그 일로 숲 여기저기에서 소요가 일었다. 시궁쥐는 그럴 때마다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먹바위의 집사답다는 원성을 크게 샀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이 가고 새로운 숲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이번엔 종신 숲통령을 꿈꾸던 먹바위 딸과 피스 독립운동가 집안인 느릅나무 후손이 맞붙었다. 피스의 독재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후보들인지라 선거운동 기간 내내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친원파가 장악한 피스에서 느릅나무 후손의 선전은 피스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피스가 오랜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숲 전체로 퍼지자 먹바위 지지자와 친원파는 크게 당황했다. 선거전이 어렵게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은 먹바위 궁까지 전해졌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강기희 기자는 소설가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는 장편소설 <개 같은 인생들>, <도둑고양이>,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연산> 등이 있습니다.



태그:#친일파, #평화, #박정희, #이명박, #원숭이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