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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부터 해야겠습니다. 부끄러운 기억에 관한 것입니다. 대학 2학년 때였을까요. 교내 게시판에서 우연히 학군사관후보생(ROTC) 선발 공고를 봤습니다. 힘든 가정 형편으로 학비 조달 문제가 크게 다가왔을 때였습니다. 코앞으로 닥쳐온 군입대 문제도 괴로웠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홀연 'ROTC'가 해결해 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습니다.

그뒤 친하게 지내는 형에게 속내를 이야기했습니다. 1학년 때부터 학과 학회와 학생회 활동을 함께해 오면서 친해진 형이었습니다. 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형인지라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시절은 바야흐로 1980년대 말이었습니다.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치러진 선거를 통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때였습니다. 나름대로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출범한 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노태우는 독재자 전두환의 '하수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국민은 여전히 노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20대 청년들은 스스로의 살을 태우는 처절한 분신으로,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는 백골단 앞에 온몸을 내던지는 시위로 '하수인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시적이지만 그들 군사 정권에 부역하는 직업 군인이 된다는 건 '열혈 청년'으로서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습니다. 직업 군인이 되어 양심적이고 정의롭게 살자, 군 민주화에 조그마한 밀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럴 듯한 명분을 떠올려가며 부끄러워하는 저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심해서 결정했으니 잘 해 보거라."

힘이 생겼습니다. 부끄러움이 조금 가셨습니다.

'혈서'라는 말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1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학생회관 앞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앞으로 재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 서울대 "나의 안부를 전합니다" 1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학생회관 앞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앞으로 재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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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녕 부끄러운 일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형이 집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교내·외 집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함께 가자고 말하곤 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습니다. 처음 집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는 그런 일상적인 대화의 한 토막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은균아···."

형의 목소리가 은근해졌습니다.

"응, 형."
"이번 집회 중에 혈서를 쓰는 순서가 있어."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려던 제 목소리가 순간 조용히 잦아들었습니다. '혈서'라는 말 때문이었을까요. 무언가가 머리를 탁 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사정 없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습니다.

"OO, OO이도 혈서를 쓰기로 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형이 말한 두 사람은 모두 여학생이었습니다. 한 명은 우리 학과 동기였습니다. 나머지 한 명도, 저와 학과는 달랐지만 학번이 같은 입학 동기였습니다. 형은 그 여학생 동기들을 들면서 제게 혈서 쓰기에 동참할 것을 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독재자에게 분신으로 저항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집회 중 혈서 쓰기는 너무나 일상적인(?) 결의의 표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구나. 형, 근데 어떻게 하지?"

저는 형에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집회에서 혈서 쓰는 모습이 찍힐 수 있다, 공공연히 사찰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내 얼굴이 찍히게 되면 학군사관후보생 면접을 어떻게 보겠느냐, 집회에 참가해서 열심히 싸우겠다, 대신 혈서 쓰기는 뺐으면 좋겠다, 솔직히 칼로 단지해서 혈서를 쓰는 일도 내겐 너무 무섭다, 그런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습니다. 형의 대답은 의외로 흔쾌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형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겼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혈서 따위(?) 좀 쓴다고 학군사관후보생 선발에서 불합격시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그 역시 학군사관후보생 시험에 관심이 있던 기숙사 동기로부터 들은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문'이었기에 더 무서웠습니다. 형은 속으로 얼마나 '못난 놈' 소리를 했을까요. 그렇게 지레 걱정하면서도 부끄럽게 핑계를 댄 이유입니다.

그토록 비겁한 저에게 내린 하느님의 '응징'이었을까요. 체력 시험이 있기 전남 발, 무슨 때문엔가 술을 밤새 퍼마셨습니다. 다음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체력 시험장으로 갔습니다. 100미터 달리기와 턱걸이, 윗몸일으키기 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될 턱이 없었습니다. 시원하게 낙방했습니다.

동맹휴업 정당성 써내려간 나의 첫 대자보, 하지만...

비겁한 제 모습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1년 선배 하나가 저를 불렀습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나를 포함한 동기 몇몇을 '짱돌' 조달조로 발탁(?)한 형이었습니다. 그뒤 선배는 다른 선배 몇과 함께 인문대학 건물 옥상에서 우리에게 살벌한 표정으로 '짱돌' 제조 및 운반 작업을 교육시켰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 부사수'를 양성하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날 선배가 내게 요청한 교외 대자보 부착 작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내외 여기저기로 사복 경찰들이 활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차하면 그 자리에서 잡혀 닭장차(대학생들이 경찰버스를 속되게 일컫던 말)로 끌려가 한바탕 치도곤을 당하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내키지 않았습니다. 선배 말에 선뜻 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알았다'는 말을 내뱉고 떠나가던 선배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에 비하면 학과 학회실(일종의 학과 동아리방)에서 선배들을 도와 대자보를 쓰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늘 용이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대자보를 쓸 때면 가끔 선배들 사이에 뜨거운 토론이 이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깡소주라도 곁들여지면 그 자리는 으레 어두운 시대를 향한 과도한 울분과 자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대자보 따위(?)로 다른 학우들의 비분강개를 어떻게 끌어낼 수 있으랴 하는 냉소 때문이었습니다.

그 냉소는 결코 느닷없이 생겨난 게 아닙니다. 1학년 새내기 시절, 대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뜨거운' 오월을 맞이할 무렵이었습니다. '5·18 광주'의 날이 다가올 즈음, 햇병아리 우리 동기들은 난생 처음으로 동맹 휴업을 위한 '과토(학과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별다른 반대 의견 없이 대세는 휴업 결의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때 한 동기가 차분하게 학생 본분 등을 끌어와 반대 의견을 뱉어냈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눈치를 보기만 하던 다른 몇몇 동조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토론 끝에 다수결로 동맹 휴업이 결의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하던 동기들은 여전히 입술을 씰룩이고 있었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스스로 수강 권리를 차 버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논리였습니다. 열혈 청년이 돼가고 있던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한두 시간 강의 따위와 '광주'를 맞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가슴 한켠에서 분개심마저 차올랐습니다.

과토 후 기숙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저는 잠깐 짬을 내 문구점에 들렀습니다. 대형 전지 몇 장과 유성펜을 사 들고 기숙사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머릿속 생각을 가다듬은 후 동맹휴업의 정당성을 써내려갔습니다. 곧 비분강개의 문체로 절절하게 쓰인 대자보 한 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전공 강의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붙일 요량이었습니다.

스스로 대자보에 취해 흡족해하고 있을 즈음, 저랑 학과가 다른 기숙사 동기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에게 대자보의 첫 번째 독자 노릇을 부탁했습니다. 눈으로 훑어보던 동기가 말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 설득할 수 있겠냐?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가볍게 농담하듯 심상하게 내던진 친구의 말 몇 마디는 충격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 구구절절 써내려간 대자보였습니다. 감탄은 결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그런 노골적인 혹평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가득 찼던 그때 심정이 지금도 다시 오롯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그 어떤 소통 도구도 없던 그 시절, 대자보는 대학생들이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통로였습니다. 대학생들뿐이었겠습니까. 언론이 정권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던 당시에 대자보는 억눌린 채 살아가야 했던 모든 이들의 '펜'과 '마이크'였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대자보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시위대 꽁무니만 뒤쫓았던, 부끄러웠던 내 과거

17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명신관 앞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학생이 지나가며 보고 있다.
▲ '청춘들이여, 안녕들 하십니까?" 17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명신관 앞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학생이 지나가며 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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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자보 쓰기의 처절한 좌절감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대자보로 무언가를 알리는 일을 무척 어려워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애초 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다르게 이해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쓴 대자보를 읽고 그들은 과연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에 늘 곁에서 거들기만 할 뿐 정작 제 손으로 대자보의 한 줄 한 줄을 채워나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새삼 떠올려 봅니다. 저의 그런 어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혹시 그것은 어려움으로 가장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진짜' 어려움이 아니라, 내 삿된 이익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나 핑계거리로서의 '가짜' 어려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늘 시위대 꽁무니를 뒤쫓아 다니기만 할 뿐 정작 앞자리에 서서 뜨거운 구호 한 번 제대로 선창해 보지 못했습니다. 예의 형과 이런저런 선배들의 수많은 권유에도 불구하고, 저는 늘 이른바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았습니다. 그 경계에 선 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지요.

고려대 주현우 학생의 이른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많은 이가 뜨겁게 화답하고 있습니다. 정녕 '안녕'하지 못했으나, 압도적인 현실이 강요하는 굴종과 침묵 속에서 깊은 한숨만 내쉬던 이들의 목소리가 활화산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진정 어두웠던 시절, 대자보 한 장 제대로 쓰지 못했던 비겁한 제게, 스물일곱 살의 그 당당한 청년이 큰 스승처럼 다가옵니다.

어제(17일) 아침, 제가 가르치는 3학년 제자 넷이 찾아왔습니다. 예의 '안녕들 하십니까에 응답하겠다며 준비해 온 긴 글을 보여 주었습니다. 국어 선생이니 문장과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봐 달라는 아이들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지요. A4 용지 넉 장에 "영광 중고등학생 여러분 다들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그 긴 글을 보다가 다음 대목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이런 글귀를 보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고." 제일 중요한 것은 생각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아닌, 혼자라도 좋습니다. ··· 한 명이 일어서면 또 다른 한 명이 일어서고, 그렇게 하나 둘 용기 있게 나서게 된다면 우리 국민 전체가 일어서고, 그렇게 하나 둘 용기 있게 나서게 된다면 우리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제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언젠가는 쓰고 싶었던 마음속의 '대자보'를 제자의 글에서 본 것입니다. 이 시린 겨울이 결코 춥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 시린 겨울을 한숨과 탄식, 절망으로 지내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전화 한 통 넣는 게 어떨는지요.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해도 좋겠지요. 때마침 세밑입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조용히 건네 주세요. 여유가 있으시거든 짬을 내어 그들과 뜨거운 국밥이나 소주 한 잔 나눠 보세요. 그렇게 어깨를 겯고 가는 겨울이 어찌 시리기만 하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glog.ohmnews.comsaesk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대자보, #부끄러움, #고이용, #사교육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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