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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우씨(고대 경영학과)가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학내 게시판에 붙여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13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학우들의 연이은 지지하는 대자보들이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연이은 수많은 응답하는 대자보 주현우씨(고대 경영학과)가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학내 게시판에 붙여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13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학우들의 연이은 지지하는 대자보들이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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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6일) 아침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교무실 창가에 느런히 놓인 사물함에 기대선 채 책을 읽었습니다. 반은 운동 삼아 하는 저만의 독서 습관입니다.

그때 아이들 넷이 찾아왔습니다. 모두 올해 저와 함께 고3을 나고 있는 녀석들이었습니다. 네 아이는 모두 서로 다른 반이었습니다. 조금 의아했습니다. 서로 다른 반에 있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

"선생님,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궁금증이 더 일었습니다.

"응, 괜찮아. 안 바빠. 이야기해 보렴. 근데 무슨 일이야? 반이 다 다른데 한꺼번에 떼로 몰려왔어? 무섭다야."

농담처럼 대꾸했습니다.

"선생님, '안녕들 하십니까' 아시죠?"

한 아이가 고려대학교 주현우 학생이 써서 붙인 '안녕' 대자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응, 잘 알지."
"저희, 대자보로 응답하려고요."
"그래? 아니,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어?"
"그냥요. 인터넷으로 그 대자보를 보니 괜히 마음이 울컥해지더라고요. 관련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럼 써서 붙이면 되지. 내가 무슨 해줄 일이 있나?"
"아니요. 별거 아닌데, 쓴 글 좀 봐주시라고···."

내가 국어 선생이니 아마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봐달라는 것이었을 테지요. 한 번 보마 했습니다. 쓴 글을 가져와보라고 했습니다. 보니 작은 글자로 A4 용지 넉 장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쓰인 글도 글이거니와, 담담하게 자신의 소회를 밝힌 내용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대충 봐도 손 댈 곳 하나 없이 잘 쓰였다. 대단하다, 너희들."

울컥해진 마음을 감추며 일부러 큰소리로 칭찬해 주었습니다.

"저희, 대자보로 응답하려고요...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더 주고받았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익명으로 대자보를 몰래 붙일 요량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교장·교감 선생님이나 학생부장이 불러 야단을 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문제로 머리를 썩인 듯합니다. 아이들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글을 봐도 특별히 민감한 내용이 없구나. 그러니 자연스럽게 애초 계획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제자들은 바로 오늘을 기약하며 교무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 사이에 교무실에는 인근에 있는 여고 1학년 학생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교내에 예의 '안녕' 대자보에 응답하는 글을 써 붙였다가 10여 분 만에 강제 철거(?)를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분명 그 학교에서는 학교 시설물에 관한 이런저런 관리 규정 같은 것을 들먹였을 테지요.

학생이 올렸다는 글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기말고사 시험을 막 끝낸 1학년 학생이었더군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단정한 글씨로 써내려가는 그 학생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세상 일에 무관심한 자신을 꼬집는 '안녕했고'를 반복하다, 그 이유로 "왜냐하면 저는 고등학생이니까요"를 적는 학생의 떨렸을 손끝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군산여자고등학교에 붙은 대자보
 군산여자고등학교에 붙은 대자보
ⓒ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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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흘렀습니다. 일이 있어 잠깐 외출하고 돌아왔습니다. 동료 교사 한 분이 조용히 나를 불렀습니다. 바로 직전에 우리 학교 1학년 학생이 '안녕' 응답 대자보를 붙였는데, 교장·교감이 불러 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뜻이 있어 붙였겠으나 학교 시설물에 무단으로 부착물을 붙이는 건 안 된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교장·교감 선생님께서는 이왕 쓴 글이니 페이스북 같은 데 올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조언도 한 듯합니다. 그나마 인근 학교 교장·교감 선생님에 비하면 유연하고 친절하다고 해야 할까요.

인근 학교 학생이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새겨 넣은 대자보를 다시 찬찬히 살펴봅니다.

국어 교과서 지문 속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너는 저 깊고 수많은 안방들 속의 사생활 뒤에 음울하게 숨어 있는 우리를 상상해 보구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생활에서 오는 피로의 일반화 때문인지, 저녁의 이 도시엔 쓸쓸한 찬 바람만이 지나간다."

소설가 황석영이 쓴 <아우를 위하여>의 일절입니다. 진정한 교과 수업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이보다 더 훌륭한, 살아 있는 민주 시민 교육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교과서 따위(?)에 실린 글을 이처럼 훌륭하게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들여 체화하는 경험을 틀에 박힌 학교 수업에서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 최대 비극이다"

이번에는 제 제자들이 써 온 글의 일부를 봅니다.

'고등학생이 무엇을 한들 달라질까. 난 지금 공부나 해서 내 갈 길이 우선인데, 아직 학생인데 내가 나설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난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이런 것이다'라며 저 스스로 합리화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제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다며,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사회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난 지금도 저는 그러한 합리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능 전에는 '수능이 우선이다', 수능이 끝난 후에는 '알바도 해야 되고 면허도 따야 되고···'라면서 합리화를 하고 있던 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놀아 주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세상 일을 피하고 외면한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못 가지만 다음에는 꼭 간다며 기약 없는 무망한 약속을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침묵과 회피를 거름 삼아 세상은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딴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몸이 피곤하지 않을 때가 없었고, 일이 바쁘지 않을 때 또한 없었으며, 아이들은 스스로 놀기도 하다는 것을 부러 모른 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제자가 쓴 이 구절이 정말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제 제자들은 아침이면 시린 손을 불어가며 벽과 계단에 대자보를 붙이겠지요. 그러자마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쓴 대자보를 부리나케 철거할 것입니다. 철거된 대자보의 흔적을 보며 제자들은 과연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요.

혹여 교장·교감 선생님에게 불려가 시설물 관리규정에 관한 일장 훈시를 들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규정을 모르지 않는 아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 시설물 관리 규정보다 못한 게 민주주의이겠거니 하는 자괴감 때문에 말이지요.

하지만 믿습니다. 이 시린 겨울, 조그만 종이에 정성들여 적어 내려간 그 대자보 한 장이 평생을 버티게 하는 단단한 초석이 되리란 것을. 그 경험과 기억의 힘으로 세상에 당당히 맞서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리란 것을. 아이들이, 학교 시설물 관리 규정에 막혀 대자보 철거를 당할지라도 침묵을 선택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음 글 속에 '고등학생'이어서 지켜야 했던 침묵을 우리 아이들이 깬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에 이런 글귀를 보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고.'

대자보는... 안녕하지 않습니다
'침묵'을 깨려던 제자들의 몸짓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학교에서는 일부 3학년 학생들이 '안녕' 응답 대자보를 교내에 부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염려한 선생님들이 '애정'어린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충분한 징계감'이어서 학생부에 징계 사실이 기록되면 대학 입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지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교장과 교감에게 부착 사실을 알리고 허락을 얻은 후에 붙이게 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하튼 대자보가 시설물 관리규정에 막혀 침묵 속으로 빠지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한 인문계 고등학교의 '소통 민주주의' 수준이 딱 이 정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안녕들 하십니까, #'안녕' 응답 대자보, #침묵,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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