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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는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곳이다. 24시간 끝나지 않는 거리 파티로 온통 흥분 시켜 놓고는, 차분한 듯 매혹적인 탱고로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더 이상 놓을 정신이 없을 때쯤이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모든 것이 고요하게 흘러가는 엘 칼라파테가 모습을 드러내며 지친 여행객에게 달콤하고 따뜻한 휴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엘 찰튼(El Chalten) 에 닿으면,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내려놓고 단잠에 빠질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깨지 않을.

구름에 가려진 피츠로이산의 모습
 구름에 가려진 피츠로이산의 모습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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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뿜는 산을 품은 마을

번쩍이는 네온 사인도, 근사한 레스토랑도, 낭만을 부르는 카페도 없는, 인구 수백 명에 불과한 이 작은 시골마을을 해마다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이유는 바로 마을의 뒷산, 피츠로이 트레킹을 위해서다. 마을의 입구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피츠로이의 주변은 저 높은 봉우리에서 뿜어내는 것만 같은 하얀 구름들이 항상 가로 맺혀 있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도 엘 찰튼, '연기를 뿜는 산'이다.

엄청난 바람과 하늘을 수놓은 거짓말 같은 구름, 바람까지도 비출 것 같은 맑은 호수, 이 세 가지가 엘 찰튼이 가진 전부다. 그렇지만 엘 찰튼은 피츠로이 산자락에 안긴 그 모습 자체로 시간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만큼 강렬하다.

나지막한 언덕에서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 다시 내 주위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시간이 지금 여기에 흐르는 현실의 시간으로 소리 없이 파고들어 내가 지금 언제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그것은 냄새도 색깔도 없는 연기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발을 떼어 놓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고요한 엘찰튼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고요한 엘찰튼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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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엘 찰튼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커플을 만났다. 120km 떨어진 엘 칼라파테에서 1박 2일간 자전거로 달려왔다는 그들에게 "어땠어"라고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Wind!(바람!)"

곧 다른 한 명이 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A lot of wind!(많은 바람!)"

그들은 엘 찰튼에 쉬어갈 바람을 만났나 보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든 예술 마을

하이킹의 성지, 엘찰튼의 멋드러진 간판
 하이킹의 성지, 엘찰튼의 멋드러진 간판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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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 바로 아래에 터를 잡은 엘 찰튼은 시시때때로 강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바람은 남반구의 낮은 구름을 만나 마법 같은 광경을 분 단위로 연출한다. 한동안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이 잠시 멎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채화 같은 하늘과 민들레가 고개를 내민다. 해가 지면 더 거세지는 바람은 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들지만 그래도 놓칠 수 없는 풍경이 있다.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 낸 예술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 낸 예술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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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제멋대로 휘저어 놓은 것 같은 구름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낸 이런 마법 같은 풍경을 보고 영감을 얻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인지 엘 찰튼의 골목골목에는 재미있는 건축물과 예술품이 가득하다.

마을곳곳에 숨겨져 있는 이름모를 예술가의 작품들
 마을곳곳에 숨겨져 있는 이름모를 예술가의 작품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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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디엔가 숨어있을 이들을 찾기 위해, 나는 바람을 꿰뚫고  온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같은 사람이 만들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예술품은 모두다 쓰레기통을 소재로 했는데 위트가 넘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술가는 이 신비로운 마을을 자기 나름대로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체 누구였을까? 자연이 마법을 부리는 이 동화 같은 마을의 쓰레기통을 이토록 멋지게 꾸민 사람은. 그도 엘 찰튼에서 무심코 배낭을 내려놓고 그 시간에 갇혀 버린 여행자였을까? 누군가 엘 찰튼에 간다면 쓰레기를 담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이 예술품들을 찾아보자. 마을 여기저기에 더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쉬어가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조 건물들과 풍경
 잠시 쉬어가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조 건물들과 풍경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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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하고 따뜻했던 숙소는 또 어떠한가. 현관문을 열자 펼쳐지는 긴 식당을 지나 나무로 된 계단을 오르니 밝은 색의 화사한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파와 탁자가 놓인 거실에는 그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품은 창이 자리잡아 주인의 성품을 엿보게 했다.

한쪽으로 자리잡은 통 유리창으로는 햇살이 풍성히 쏟아졌고 그 밖으로는 노란 민들레밭이 자리잡았다. 그 소파에 앉아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란.

구름에 가려진 피츠로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1년에 겨우 다섯 번 정도다.
 구름에 가려진 피츠로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1년에 겨우 다섯 번 정도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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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틀을 머물렀을 뿐인 그곳에서 나는 모든 것이 그저 물러났으면 했다. 그것은 이틀간의 고된 트레킹으로 인한 엄살일지도 모르지만, 남은 여행도, 곧 복잡해질 앞으로의 삶도, 일 년에 겨우 다섯 번, 피츠로이가 구름 사이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찰나에 묻혀 사라졌으면 했다.

한 번 소용돌이 치기 시작한 생각은 멈출 줄을 모르고 나는 기어코 이곳까지 오게 된 나의 지난 날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 때 만일 저 창 밖으로 나서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겪어야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얼음이 녹고 다시 봄이 오면, 거리는 이 시간에 갇힌 듯한 마을을 보기 위한 여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꽃은 한껏 몸집을 부풀리고, 그 때쯤이면 거리의 예술품들이 몇 개쯤 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고요한 마을의 시간도 서서히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이 작은 마을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겠지.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 듯이 바닥난 여행자의 몸을 다독여줄 만한 곳이.

나는 아직도 그곳에 더 머물다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기타여행정보
엘찰튼에서 가장 가까운, 비행기가 있는 마을은 120km 거리에 있는 엘 칼라파테(El Calafate) 다. 많은 사람들은 엘칼라파테에 거점을 두고 당일치기로 피츠로이 트레킹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엘 칼라파테에서 자전거를 빌려 바이크 하이킹을 시도하기도 한다. 엘 칼라파테에서 하루에 두 번 출발하는 버스가 매일 같이 있으며 엘 찰튼의 모든 상점은 해가 지면 문을 닫으니 식료품등은 낮에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엘 칼라파테에서 출발한 버스는 마을 입구에서 트래킹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전원 하차 후 가이드의 설명을 듣게 한다. 영어와 스페인어로 나뉘어서 진행되며, 이때 날씨와 지도, 각종 정보를 들을 수 있으니 새겨 듣도록 하자. 물론 오리엔테이션은 완전히 공짜다.



태그:#엘찰튼, #피츠로이,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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