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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고등학교에는 '직업 십계명'이란 것이 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사뭇 비장하기도 하고, 어떤 계명은 슬쩍 웃음이 나오게도 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의 직업 선호도와 비교해본다면 대단한 역설로 가득찬 계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창고등학교는 기독교 계열의 학교이기에 아마 성경에 나오는 '좁은 문' 말씀을 직업 선택의 지침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느 누가, 어느 부모가 본인을, 또는 자식을 왕관이 아닌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보내려고 하겠는가. 지난해에 교육과학기술부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의뢰하여 진로진학상담교사가 있는 고등학교 학생, 학부모 4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교사였고, 학부모가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이었다.

교사와 공무원을 넘어서는 변방의 창조들

교사와 공무원, 이 두 직업의 공통점은 신분과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업이라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정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거창고등학교 직업 선택 십계명에 비추어본다면 지나칠 정도로 역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위의 조사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진로를 결정하는 데 고려하는 요인 중 압도적인 1위가 소질과 적성(학생 57.1%, 학부모 62.8%)이라니, 이런 모순에 도리어 웃음이 난다.

젊은 사회적 기업가 12인의 아름다운 반란
▲ <청춘, 착한 기업 시작했습니다> 젊은 사회적 기업가 12인의 아름다운 반란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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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회적 기업가 12인의 아름다운 반란을 엮은 책 <청춘, 착한 기업 시작했습니다>(이희수 엮음, 부키)는 이렇게 교사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는 사회분위기를 따르지 않고,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여,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서 '변방의 창조'를 일구어낸 사람들로 출렁거리는 책이다. 

나는 이 시대의 경제 생태계를 바꾸겠다며, 기존 경제 구조와 고정관념과 인식의 틈새를 파고드는 용기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여다 보았다. '사회적'이라는 수사가 가지는 공익적 요소와 '기업'이라는 말이 주는 경제적 요소를 어떻게 조화시켜 '사회적 기업'을 창업할 수 있었는지, 또 이를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책은 그런 궁금증을 상당히 많이 해소시켜 준다. 그리고 다양한 경제적 상상력도 제공한다. 마치 눈가리개를 쓰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이미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그 길밖에는 길이 없는 듯이 스펙을 쌓으며, 무한 경쟁에 빠져 있는 청춘들에게 그 길만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있음을 상상하게 해준다. 

그 경제적 상상력은 주로 문화 예술, 그리고 교육과 환경 등의 분야로 길을 내고 있으며, 이 분야는 창업의 동력을 불어넣어 주기에 매우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도 문화로 희망을 꽃피우는 이야기와 사람과 환경을 살리는 창업에 열정을 쏟은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미술 문외한이 미술 사회적 기업을, 어떻게?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사회적 기업이 매우 강렬하게 눈을 잡아끌지만, 그래도 그 중에 특히 눈에 띄는 하나를 꼽으라면 미술 분야에서 사회적 기업을 열어젖힌 '에이컴퍼니'를 꼽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미술이라는 분야 자체가 대중적이지 못하고, 특정 애호가들에 의해 좌우되며, 미술 작품도 고가이다. 게다가 미술작품 수집이 때로 부정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미술 분야와 사회적 기업 운영이라는 연결고리가 잘 연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에이컴퍼니 정지연 대표는 미술 분야를 전공하지 않은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미술 분야가 가진 이러한 문제점을 밑거름 삼아, 다양한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미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을 창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에이컴퍼니의 에이는 미술(Art)를 뜻한다. '공정한 미술 유통과 아티스트들의 매니지먼트를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 에이컴퍼니는 이렇게 소개된다. 미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은 에이컴퍼니가 유일하다.

정지연 대표는 '연예인처럼 미술작가에게도 팬이 있다면?' 하는 물음으로 '아티스트팬클럽'이라는 카페를 개설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첫 사업으로 '반짝쇼'를 기획했다. 딱 두 시간 전시회를 열어 작가와 관객이 함께 하는 파티 같은 전시회였다. 물론 큰 호응을 얻었다.

또 한 가지는 '브리즈 아트페어'라는 미술전을 열어 국내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는데, 10개월 무이자 할부로 전시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창작공간인 '미나리 하우스'를 작가들에게 6개월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그 작업의 결과물을 전시하게 하여, '미나리 하우스' 자체를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모든 사업들이 기존 미술 유통 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이었다.

기존 경제 생태계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길들'

이 책엔 이런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청춘들이 소개되어 있다. 전국에서 버려지는 많은 양의 폐목재와 폐가구를 수거하여 고치고 디자인을 만들어 새로운 용도를 만들어내는 '명랑에너지발전소', 연극으로 모든 세대가 소통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모토를 가진 사회적 기업 '토크앤플레이'는 청소년 연극과 실버연극을 만들어 세대 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특허를 낸 '소셜코어'는 장애인이 만든 사회적 기업이다. 윤리적 패션과 친환경 의류 사업을 지향하는 '오르그닷', 커피찌꺼기를 이용하여 버섯을 생산하는 생태 기업 '꼬마농부', 옥상정원사업과 도심양봉을 결합하여 '달짝지근'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비틀에코'는 곤충에 주목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적 역량을 가진 직장인들이 멘토 그룹이 되어 차세대 리더의 자질을 갖춘 대학생들의 진로를 지도해주고, 대학생들은 그 대가로 소외계층 청소년들의 학습지도 봉사를 하도록 이어주는 '점프'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민 금융의 대명사인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처럼, 저신용자에게 차별과 문턱을 없앤 착한 금융 '팝펀딩'도 매우 신선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사회적 기업과 창업만이 만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진로 잡지를 무료로 만들어 배포하는 '모두커뮤니케이션즈' 권태훈 대표는 이 점을 아프게 지적한다.

"정부에서 창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이들 중 몇이나 살아남을까 생각해 보면 청년들을 창업으로 내모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는 정책이죠. 사업을 뒷받침해줄 인프라나 대책이 전혀 없이 그저 '창업'에만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에 취지도 좋고, 언뜻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지만 청년들을 고생길로 내모는 행위입니다."(본문 95쪽)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추구하는 창업자들은 '가치'의 고상함에 취하거나 공익적인 부분만 강조하여 경제적 보상에 약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지적하는 목소리를 낸다. 성취 가능한 가치를 냉정하게 추구하자는 목소리도 있고, 젊은이들의 열정과 봉사에 경제적인 보상을 충분히 해줌으로써 그들의 전문성과 노하우가 계속 쌓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청춘들이여, 창업의 희열을 느끼라'이다. 자신이 만든 사회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이 사업을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말하는 '꼬마농부' 이현수 대표의 다음 말은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보인다.

"꿈은 변해갑니다.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해야 할지, 무엇을 더 공부하고, 누구를 만나 부탁이라도 해 볼지 고민하는 과정이 모두 희열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가 만들어 놓은 과정만 밟아서는 그런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본문 157쪽)

덧붙이는 글 | <청춘, 착한 기업 시작했습니다>, 이희수 엮음, 부키, 2013년 10월 31일, 1만 3천 원



청춘, 착한 기업 시작했습니다 - 젊은 사회적기업가 12인의 아름다운 반란

이회수.이재영.조성일 지음, 부키(2013)


태그:#사회적 기업, #변방의 창조, #직업 십계명, #창업의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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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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