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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의 관문 도시, 엘 칼라파테

스테이크와 와인으로만 하루 세끼를 때우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이틀 밤 동안 준과 나는 치열하게 부딪혔다. 두 달간 함께 남미를 일주하기로 했던 우리의 계획이 서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이면 탱고에 흠뻑 빠질 수 있는 분위기에 취한 나는 조금 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머물다 다시 북쪽, 칠레를 향해 방향을 틀자고 제안했고, 이과수 말고는 대자연을 느껴본 일이 없는 준은 남극까지 쭉 뻗은 남미 대륙의 끝을 보고 싶어했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잡기로 했다. 다소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강행군을 하는 것. 덕분에 이 아름다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두고 우리는 이틀 만에 다시 파타고니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얼음과 눈의 대륙, 파타고니아(Patagonia)
 얼음과 눈의 대륙, 파타고니아(Patagonia)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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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탈 때까지도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터벅터벅 내딛던 나는, 문득 바라본 비행기 창 밖의 풍경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낮게 깔린 구름은 비행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야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푸른 숲을 조금씩 집어 삼키듯 자리잡은 하얀 얼음은 지구별 여기저기에 생겨난 거대한 생채기를 유난히 돋보이게 한다. 아름답게 흩어진 하얀 그림자는 조금씩 이 광활한 대지를 물들일테고 마침내 겨울이 오면, 온 세상은 이 하얀 그림자 아래로 잠들것이다. 과연 내가 보게 될 곳은 저 많은 구멍들 중에 어디일까.

남극에 닿을 듯, 길게 뻗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위 39° 이남을 이르는 파타고니아 (Patagonia)는 아프리카와 더불어 인류의 손이 닿지 않은 대자연의 보고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름이 다가오는 11월에도 빙하로 뒤덮혀 있는 극지방이 많다는 점 정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그 파타고니아의 관문도시, 엘 칼라파테(El Calafate) 다.

엄청난 추위에도 여전히 푸른 엘 칼라파테(El Calafate)
 엄청난 추위에도 여전히 푸른 엘 칼라파테(El Calafate)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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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여전히 맑다. 24시간 비출 것만 같은 강렬한 태양과 방금 만들어진 듯한 공기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 온기는 온데간데 없이 차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은 살을 에일 듯 날카롭고 매몰차다. 오감을 자극하던 아름다운 도시의 파스텔 빛깔은 온데간데 없고 주위는 오로지 산과 바람과 구름뿐이다. 공항의 표지판에 의하면 여전히 해가 밝은 바깥의 기온은 영상 5도였지만 추위를 느낄 사이도 없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섰다.

여행을 하다보면 때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에 기쁠 때가 있다. 내게 엘 칼라파테가 그랬다. 낮게 드리운 구름과 겨우 푸른빛을 머금은 침엽수들, 개울가 좌우로 피어난 들꽃들,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지만 엘 칼라파테의 풍경은 나에게는 완벽했다. 버스가 마을에 막 들어섰을 때 준을 강제로 잡아끌어 내린 나는 그 느린 풍경 속에서 마음껏 길을 잃고 헤매기로 했다.

큰 도로 주변에 여행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모여있다.
 큰 도로 주변에 여행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모여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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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숨을 몰아쉬자 폐 속 깊숙히 온통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잔뜩 놀란 몸이 움찔 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숙소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겨울은 지났지만 봄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추운, 발걸음소리보다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텅빈 거리는 아직 여행자를 맞을 준비가 되지 않은 듯 대부분 문을 닫은 채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간다. 사람도, 구름도, 거리의 자동차도. 오로지 바람만이 세차게 부채질 할 뿐이다.

어디론가로 향하는 수많은 이정표를 새겨놓은 그 거리에서 우리는 낯익은 행색의 한 여행자를 만났다. 파타고니아 북쪽의 험한 협곡을 모두 거치고 마지막으로 칼라파테에 닿았다는 그는 곧 귀향을 앞둔 젊은 학생이었다. 무려 2년간의 코이카(KOICA) 봉사단 활동을 끝내고 귀국 전 여행길에 올랐다는 그. 어쩐지 수 년 전 겨울의 파리 거리를 홀로 방황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던 나는 기꺼이 그를 숙소로 초대했다.

아르헨티나 마트의 스테이크는 한국의 햄버거 만큼 싸고 흔하다
 아르헨티나 마트의 스테이크는 한국의 햄버거 만큼 싸고 흔하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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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와 감자, 채소 그리고 와인. 하얀 접시 위에 담긴 간소한 저녁식사는 그 어느때보다 만족스러웠고, 무심한 듯 베어문 고기의 육즙이 입안에 퍼지자 젊은 여행자는 연신 감탄사를 뱉어냈다. 혼자인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테이크를 살 몇 천원이 아니라 스테이크를 함께 하자고 말해줄 누군가 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둘임을, 우리는 그가 아직 젊음을, 서로 부러워 하며 그렇게 그 밤 가득 와인에 젖었다.

마침내 마주친 푸른 거인 – 페리토 모레노 빙하

밤 8시까지도 대낮처럼 햇빛이 내리쬐더니, 빙하를 만나러 가던 날 아침은 어제부터 해가 이어진 듯 여전히 뜨거웠다. 비록 차가운 대륙이긴 하지만 이토록 뜨거운 태양 아래에 과연 빙하가 있을 수 있을까. 준과 나는 자신을 구라고 소개했던 젊은 여행자와 함께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언덕위의 하얀 집
 언덕위의 하얀 집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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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 시간 동안, 버스는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광활한 땅을 그저 말없이 달렸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거라고는 낮게 자란 풀과 곧 하늘을 온통 뒤덮을 것 같은 구름들. 간간히 그런 풍경 속에 거짓말처럼 자리잡은 저택들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기어코 구름이 온 하늘을 덮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태양이 사라지자 대지는 온통 차갑고 어두웠다. 구는 파타고니아에서 맑은 하늘을 바라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온통 회색으로 변해 버린 강을 따라 흐르는 얼음 조각들은 특유의 빛을 잃었다. 그러나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던 창 밖 시선 멀리, 그 짙은 안개 사이로 나는 거대한 장벽을 보았다.

빙하 위로 비치는 신비로운 빛
 빙하 위로 비치는 신비로운 빛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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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과 그린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빙하인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예상치 못하게 듣게 된 스포일러 처럼.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자 뛰어내린 우리는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서둘러 다가갔다. 마치 눈앞의 빙하가 곧 녹아 없어지기라도 할 것 처럼.

남극과 그린란드를 제외한,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모레노 빙하
 남극과 그린란드를 제외한,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모레노 빙하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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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만 5km, 세로는 무려 30km로 하늘에서 봐야만 그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초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양쪽으로 숲을 낀 채, 거대한 호수를 가로 막고 우뚝 선 거대한 장벽은 참으로 위압적이었다.

빙하의 푸른 빛은 견뎌온 세월과 비례한다.
 빙하의 푸른 빛은 견뎌온 세월과 비례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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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실제인가? 이 거대한 빙하는 호수 위에 떠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뿌리 깊이 박혀있는 것일까. 위태롭게 엉켜 붙은 조각들은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 수 많은 질문들이 물밀 듯 몰려왔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얼음이 투명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억겁의 시간을 견디면서 서로 엉켜온 이 거대한 빙하의 푸른 빛을 보고 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빙하가 신비로운 푸른빛을 띄는 이유는 눈과 얼음이 오랜 세월 쌓이고 눌리는 과정에서 빛의 푸른 파장만 표면에 남기 때문이란다. 너무나 투명해서 이토록 푸른 빛을 낼 수 있다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도 팽창 중이라는 모레노 빙하는 표면을 트레킹 하거나, 얼음 등반을 하거나, 경비행기를 타고 구름 바로 아래를 날아 볼 수 도 있지만 나는 그저 강 건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 신비로운 푸른 보석 위에 올라서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르니까.

행운이 따른다면 빙하가 무너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행운이 따른다면 빙하가 무너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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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에 온 공원 안을 뛰어다닌 중 우레와 같은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뒤늦게 카메라를 들이 댔을 때는 이미 60미터 높이의 빙하 한 줄기가 무너져 내린 뒤였다. 호수를 따라 매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푸른 거인'은 이따금씩 굉음과 함께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며 위태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바람과 비가 강해지면서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나는 기어코 그 모습을 담겠노라 카메라를 치켜든 채 푸른 거인과 한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거인의 주변을 찰랑거리는 물소리만이 들릴 뿐, 거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했다. 내리던 비바람이 더 심해지고 카메라와 손가락 사이에 맺힌 방울이 얼음이 되어 감각을 잃어버릴 때쯤, 나는 마침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푸른 거인이 그때까지 건재하다면, 마을 주민들조차 견디기 힘든 한겨울일지라도, 나는 엘 칼라파테의 그 텅 빈 거리를 기꺼이 채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겨우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간략여행정보


남미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딱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파타고니아를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놀라운 자연으로만 가득 채워진 파타고니아를 보지 않는다면 남미여행은 무의미하다고 해도 좋다. 파타고니아는 안데스 산맥을 기준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 두 국가에 걸쳐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르헨티나만 방문해도 그 모든 놀라움을 다 경험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에서 파타고니아의 관문도시인 엘 칼라파테 까지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2박 3일간 가야 하니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며, 엘 칼라파테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명소들을 다녀올 수 있다. 본문에 나온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엘 칼라파테에서 오전과 오후, 매일 1회씩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이용하면 되며(편도 90분), 입장료는 100페소다(약 3만원, 2012년 11월 기준). 다양한 코스와 시간으로 진행되는 빙하 트레킹은 별도의 비용이 든다.

엘 칼라파테에 대한 상세한 여행정보를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0512233




태그:#페리토모레노빙하, #엘칼라파테,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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