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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12월 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2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아래 피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피사는 학생들의 수학·읽기·과학 성적 수준과 추이를 국제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2000년부터 3년 주기로 시행하는 국제 평가입니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여느 때와 다르게 올해는 언론들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OECD 34개국 중 수학에서 1위, 읽기 1에서 2위, 과학 1에서 4위 등 최상위권의 성과를 낸 대접치고는 소홀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피사가 아니더라도 한국 아이들의 우수한 성적은 이제 어김없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그런 '당연한 상식'으로 위안을 삼고 넘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피사는 매번 한 영역을 주영역으로 정해 심층 분석을 합니다. 이번에는 수학이 주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1위'라는 양적 성과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질'이 심각합니다.

수학 공부의 즐거움이나 흥미를 나타내는 '내적 동기' 점수 순위와, 수학을 왜 공부하는지를 평가하는 '도구적 동기' 점수 순위가 각각 조사대상 65개국 가운데 58위, 62위 등 최하위 수준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즐거움과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공부, 왜 해야 하는지를 모른 채 하는 공부를,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하루 12시간 동안 죽자 사자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녕 이대로 가야 하는 것인가요. 정녕 시험을 잘 치러 좋은 점수를 얻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요.

어떤 저명한 사람이 자신의 영향력으로 아들을 정부 부처의 고위직에 앉혔습니다. 월급을 두둑하게 받게 된 아들은 곧 나쁜 습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친구이기도 한 장관에게 갔습니다. 아들을 더 아래 자리에 배치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장관이 이렇게 충고합니다.

"여보게, 자네 아들이 하위직에 배치되려면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네!"

어니스트 겔너의 <쟁기 칼 책>(2013, 삼천리)에 나오는, 어느 저개발 국가에서 회자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겔너는 이 이야기를 지위에 맞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선택하는 효율성의 토대와 실력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소개합니다. 최고위층이나 기본적인 정책의 선택에서는 그러한 실력주의나 효율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소재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치르는 '시험'이 과연 공정하고 효율적인가. 얼마 전, 수능 성적 결과를 받아들고는 부쩍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시험 한 방으로 인생 출발선에 선 아이들의 많은 것이 결정돼버리는 이 가공할 현실 때문입니다. 점수 1, 2점으로 아이의 미래가 크게 좌우되는 이 유례 없는 시스템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수 년 전 일입니다. 3학년 담임을 맡은 해였습니다. 새로 취임한 교장 선생님의 '특명'으로 교사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의욕적으로 새 출발을 하자는 의도에서였을까요. 간담회 주제는 선생님들 모두 민감해하는 '성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에는 '공들인' 성적 분석 자료가 띄워졌습니다. 인근 몇몇 학교와 우리 학교 아이들의 성적을 비교한 자료였습니다. 간담회 결론을 간단명료했습니다.

아이들 성적 높여 이웃 학교 앞지르자!

그 '뜨거운' 결과와는 달리 간담회 분위기는 내내 싸늘했습니다. 무엇보다 취지가 불순했습니다. 저는 모욕감까지 느꼈습니다. 성적으로 교사들을 압박하겠다는 신임 교장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노력하고 헌신하면 학생 성적이 오른다? 맞습니다. 그러려면 노력과 헌신의 동기와 여건을 만들어 줘야지요. 그런 것에 대한 어떤 '비전'도 주지 않고, '천리마운동' 식으로 '하자'고만 해서 될 일은 아니지요.

그후로 수능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과목·반별로 전국평균·학교평균·반평균 점수와 함께 각 등급별 인원수를 정리한 엑셀파일 출력지가 각 반 담임에게 주어졌습니다. 출력지 한 면에는 학년 전체를 인근 학교 같은 학년과 비교한 성적 분석 결과표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학교와 인근 학교들의 등급별 인원 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자료들은 언뜻 '공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참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각 등급별 인원 수를 학교별로 나란히 벌여 놓아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해 놓은 정도의 자료였습니다. 학교별 반 수, 전체 인원 수 등을 고려한 '비율'을 적용해서 최소한의 '보정 작업'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근 학교에 비해 반 수와 학생 수가 적은 우리 학교는 등급별 절대 인원 수가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술한 자료였는데도 효과는 상당했습니다. 성적 결과 분석 자료가 돌고 나면 각 반 담임들과 교과 교사들 사이에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반은 수학이 전국 평균을 3점이나 넘겼네. 모 교과는 수업 시간이 그렇게 많은데 왜 점수가 전국 평균에도 못 미치지.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는 말인 듯이 주고받는 그런 말들은 모든 교사를 지레 주눅들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제법 많은 교사가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지요.

수업 많이 하면 성적이 올라가는 법이다. 교사가 하면 학생이 따라 온다. 교사가 헌신하고 희생할수록 학생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은 향상된다.

비단 우리 학교만의 경우가 아니리라 봅니다. 이런 생각들에 일견 타당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같은 과목을 각각 주당 4시간과 2시간씩 하게 되면 그 결과가 다르게 나올 개연성이 높겠지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선생님이 성적 향상에 열성을 보이면 아이들도 부지런히 따라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게 항상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아이들에게 '성적 압박'을 거의 가하지 않는 편입니다. 오히려 점수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물색 없는 말을 더 자주 하는 편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아이들이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인'의 모습을 보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든 못 하는 아이든 시험을 치를 때만 되면 모두 잔뜩 긴장합니다. 채점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진지하기만 합니다.

저처럼 점수에 무심한(?) 교사와 지내면서도 아이들은 얼마든지 점수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죽자사자 공부에 몰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교사가 아닌 어떤 다른 요인이 아이들의 점수와 성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이들 성적이 시원찮으면 우선 대놓고 교사부터 탓합니다.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탓하는 거 당연합니다. 교사가 아이들 가르쳐서 시험에서 좋은 성적 거두게 하는 게 분명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내신 성적 얻고 수능 점수에서 '대박'나게 해 주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그렇게 점수 따기에 도움을 주고, 좋은 성적을 거둬 좋은 진학 결과를 얻도록 하는 게 교사 책무의 전부일까요.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있는 대다수의 교사와 학부모·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지금까지 적어도 말만으로라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교사든 학부모든)를 별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교사의 책무는 아이들 성적 올려주는 게 아니다. 교사는 각자의 교과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길러주고, 민주 시민성을 길러주며, 공동체성을 가지고 타인·세계인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교사의 책무다.

온통 현실감이 떨어지는 말들 투성이지요. 하지만 이것들은 내가 주장하는 책무가 아니라 학교교육과정의 총론 맨 앞자리에서 규정해 놓은 교육 목적입니다. 현실감은 어떨지 몰라도 이 야만적인 시대를 구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메시지'를 알고 실천하는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되도록 키워 주십사고 간절히 원하는 학부모는 또 얼마나 될까요. 가늠해보기가 두렵습니다.

공부에는 자발성이 중요하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은 그런 게 형편 없습니다. 학업성취도와 같은 눈에 보이는 점수 지표는 좋습니다. 하지만 학업흥미도나 자기주도학습능력 등 보이지 않는 '진짜' 학업 능력은 바닥권입니다. 점수는 좋지만 공부를 억지로 하고 있는 셈이지요.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을 가진 교사라도 아이들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교사가 본 수업과 보충수업, 야간 특별수업까지 하면서 헌신하고 희생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게 아이들 공부입니다.

교사가 아이들 성적 못 올리면 그게 교사냐?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소리 들을 만하죠. 분명 학업성취도 관리는 교사 요인이 가장 직접적이고 클 것이겠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신중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게으르고 무능한 교사들 분명히 있습니다. 한 달, 아니 일 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 무식한 교사들도 쌔고 쌨습니다. 그런 교사와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의 학업이 짐작되시나요. 형편없을 것 같지요.

그런데 가만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교사가 교양을 키우고 전공 지식을 넓히는 책 한 권 읽지 않더라도 그가 가르치는 교과 성적이 평균 이상은 나오는 경우를 얼마든지 봅니다. 교사가 하루종일 인터넷 보고 컴퓨터와 바둑 시합을 해도 그 밑에서 배우는 아이들의 모의고사 점수는 좋습니다. 수업 진도를 일찍 끝낸 후 자습으로 시간을 때우는 교사의 교과목이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묘한 일들입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학업 성적에 미치는 변인이 교사만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당연히도 성적은 학생·학부모·학교·학습방법·지역 및 가정환경 등등 크고 작은 수많은 변수의 자장권 안에 있습니다. 많은 변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얘깁니다.

지난 2007년, 백병부 경희중 교사(현 숭실대학교 교수)가 고려대학교 교육학과에 석사학위 논문('학업성취와 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의 구조적 관계 분석')을 제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가정의 경제자본(월평균 가구소득과 생활비)이나 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수능 성적에 직접적인 효과를 끼칩니다. 소득이 높고 사교육비를 많이 들이면, 수능 성적을 올리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백 교사의 논문은 이들 변인이 각 교과 영역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도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령 수능에서 외국어·수리 영역의 성적은 가정 소득이나 생활비에 따라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언어 영역에선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국어와 달리 영어나 수학 성적이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집이 잘 살아서 영어·수학에 사교육비를 많이 쓰면 수능 성적이 올라간다는 것이겠지요.

일개 석사학위논문의 주장을 어떻게 믿느냐고요. 그렇다면 위에서도 잠깐 언급한 피사의 또 다른 결과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번 2012 피사에는 기존의 뻔한 순위 결과와는 무관한 흥미로운 분석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이 낮을수록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가령 2003년과 2012년 결과를 견줘보면, 프랑스와 뉴질랜드의 학업성취도는 낮아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두 나라는 사회평등도도 낮아졌습니다. 오이시디는 이를 2003년에서 2012년으로 올수록 경제력이 낮은 부모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르게 종합하면 사회 불평등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아이들의 교육 기회가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지요.

먼 길을 돌았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글을 맺어야겠습니다. '시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물론 그것은 '국대급' 시험 수능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수능의 불공정성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적 때문에 울고 웃는 교사들 이야기를 잠시 꺼냈습니다. 그들의 희비가 실은 얼마간 번지수를 잘못 짚은 데서 생긴 것이라는 점을, 부모의 경제력과 수능 성적 간의 밀접한 상관 관계를 통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때마침 나온 2012 피사 결과도 그런 맥락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오해를 살까 보아 그러는데, 이 글에 교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뜻이나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그 누구 뭐라 해도 학교교육의 상당한 책임은 분명 학교와 교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학벌·학력주의가 고착화한 우리나라는 이미 계층상승의 통로가 막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특목고·자사고·자공고·일반고 순으로 카르텔화한 전국 고교의 위계서열 구조는 대학의 도저한 서열 시스템과 연동되면서 학력과 부의 대물림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른바 '출세'를 위한 최소한의 사다리였던 학교(교육)마저 그 혜택이 사회·경제적 상층부에 집중됨으로써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수능이나 입시 결과로 학교와 교사를 평가하는 이 무지막지한 현실이 새삼 낯설기만 합니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우리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학생들"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세상에서 가장 경쟁적이고 고통스러운 교육"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우리는 정녕 이대로 가야 하는 것인가요.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국제학업성취도평가(피사), #학업흥미도, #학력과 부의 대물림, #경쟁교육, #부모의 경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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