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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선거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 논란에서 촉발된 현재의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적어도 그 선거의 최대 수혜자인 현재의 집권자가 한마디의 사과나 인정도 하지 않으려는 결연한 자세를 유지하는 한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박근혜 정권의 고비마다 반드시 희생양이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모욕적인 언사와 방법이 동원되었다. 예컨대 'NLL을 포기한 반역의 대통령', '내란음모를 꾸민 종북 빨갱이', '혼외자식을 둔 부도덕한 총장' 등. 권력의 핵심부인 청와대와 국정원 그리고 보수언론이 합심해 이 희생양들을 주조했다. 전형적인 '희생양의 정치'다.

희생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겉보기엔 이들이 희생양인 것 같지만, 정치실종 상황에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미래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며 장래의 삶이 불투명한 약자들, 즉 '푸어'층과 청장년층들이다. 18대 대선 과정에서 공론화되었던 경제민주화, 양극화 해소, 복지 등의 사회적 과제를 모조리 밀어낸 현재의 정치실종 상황은 필연적으로 기득권의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각종 복지 공약의 후퇴와 기초연금법 제정 논란은 이를 보여준다.

여전이 맹위를 떨치는 신자유주의의 바람 앞에 향후 양극화의 확대는 명약관화한데, 이런 속에서 생존의 벼랑에 선 사람들에게 국가가 장기적 생활대책을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사실상 국가가 이들을 '방치', '희생'시키겠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60년 동안 한국 보수정치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인민을 '민주(民主)'로 인식한 적이 없었다.

학살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 보수정치의 이와 같은 '희생양의 정치', '극단의 정치' 원리 그리고 국가권력의 민에 대한 태도 등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일찍이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전쟁과 사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시기 국가권력의 주도 하에 대규모로 진행된 군경(軍警)의 전국적 민간인 집단학살과 그것의 '은폐', '망각'이야말로 이후 한국정치를 규정짓는 원천이자 기본 원리로 작동했음을 강조한 바 있다.

'학살의 정치'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정치원리가 21세기 이 땅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한국 보수정치의 원초적, 태생적 속성을 분리해 사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전쟁과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은 독자의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표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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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저자는 후속작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를 펴냈다.

저자 자신이 한국전쟁 전후시기 민간인 학살에 마주하게 된 경위에서 시작해 이후 직접 실천의 현장에 뛰어들어 학살 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일선에서 투쟁하던 현장, 그리고 과거사기본법 통과 이후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경험했던 일들과 생각들을 쓰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기억 투쟁'의 일선에서 활동한 기록인 셈이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한마디로 그동안 대한민국은 '학살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였다. 가해자 처벌은커녕, 유족들은 사회적 차별과 천대 속에 학살당한 억울함을 가슴 속에 파묻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더 나아가 '국가의 의도된 폭력'은 "법을 우롱하고 정치를 굴절시키고 사회를 도덕적으로 오염시키고 정의를 실종시키며 … 모든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한 의식과 사회 참여 의지를 마비시키고 위축시"켜 버렸다.(7쪽) 그리고 여기에서 한국정치·사회가 안고 있는 숱한 질병과 야만성이 기원했다.

"(학살의 과거는) 우리 사회에서 '죄와 책임'의 문제, 사법정의와 도덕 질서를 완전히 뒤헝클어 놓았고, 전쟁의 논리가 일상의 사회적 유대를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 한국사회는 여전히 '단 한명의 빨갱이가 없어도 빨갱이를 창조해낼 사회'다. 한국전쟁은 확실히 60년도 더 지난 옛일이 되었으나 여전히 휴전 상태에 있고, 우리는 지금 다른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은 생존의 전쟁을, 화이트칼라나 기업의 임원은 조직에서 살아남기의 전쟁을, 그리고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전쟁을 매일매일 치르고 있다. 노동자에게 삶은 전쟁이 아닌 적이 없었고, 일터는 '계엄 상황'이 아닌 적이 없었다. 기업의 사용자나 임원은 군대의 상관보다 더 엄한 명령자이고 그곳에 표현과 사상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민간인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던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죽음의 행렬은 계속되는데 단지 그 방식과 강도만 달라졌을 뿐이다."(443쪽)

인간이 인간을 '파리 목숨'(피학살자)으로 여기거나 '산송장'(피학살자의 유족)으로 만들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상과 사회의 야만성은, 궁극적으로 파괴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정치판에선 '매카시즘'과 '공작정치'로 나타나고, 사회에선 '벼랑 끝으로 몰리는 삶'으로 구현된다. 당장 우리사회의 높은 자살률이 상기되지 않는가?

"기막힌 나라의 기막힌 현실"

그런 점에서 이 기록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우리시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즉 국가권력, 정치세력,  언론, 지식사회, 시민사회, 종교계, 사회일반 등의 저변에 깔려있던 문제들과 맨얼굴이 저자의 활동 기록 속에서 총체적으로 시사되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87년 체제와 사람들의 한계'일 수도 있다. 이 책을 단순히 피해자 유족의 해원(解寃)과 기억 헤게모니를 둘러싼 기억투쟁의 기록으로서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저자가 그간 활동과정에서 겪었던 "기막힌 나라의 기막힌 현실"(319쪽)들이야말로 현재 지속되고 있는 문제이자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을 때 한국 정부와 국방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기 바빴고, 한국 주류언론들은 미국 언론의 취재를 따라가기만 했다. 여기서 자국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주권 없는 국가'와 '주체성 없는 언론'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또 일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무지하거나 외면했고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다. 국가가 자국민에 철저하지 못하듯 민들도 이웃의 문제에 연대하지 못했다. 아울러 김대중 정부가 통과시킨 거창사건명예회복특별법은 기존의 증언과 기록에 결정적 자료들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도 유족회, 시민회, 정부, 거창군청, 관과 민 당사자 모두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그냥 통과된 '정치적 타협의 산물'에 불과했다.

여기서 "기록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국가", "공식 기억을 삭제한 국가", 모든 것을 정치력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더욱이 60년 전 국가에 의해 한 차례 당한 유족들이 오히려 국가에 의지하려는(혹은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적인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런 모습들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과거사청산 과정에서 그대로 되풀이 되었다. 책의 7장과 8장은 이 점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과 시민사회는 '가해자 처벌을 거론할 수 없는 현실'을 뒤집을 만한 역량, 준비, 전술, 인식 모두 허약했다. 한나라당은 금기를 깨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과거 청산의 정신을 좌우대립의 정치적 문제로 쟁점화하면서 과거청산의 사회화를 막았다. 그런 현실을 거역하지 못한 채 통과된 법안은 과거청산이 지닌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사회적·미래지향적 목적을 담아내지 못했다. 이는 위원회의 위상이 애매하게 규정되고 조사권한이 축소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질 법한 종교계는 거의 대부분 외면했다.

한마디로 과거사위원회가 활동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경험, 예산, 축적된 연구 역량 및 자료 등이 너무나 척박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관성에 젖은 국정원과 경찰은 자료 협조를 거부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 국가는 자체의 자료를 정리, 보존할 의지조차 없었다. 정부와 학계는, 한국사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 시기의 사망자·부상자·이산가족·고아의 수에 대한 기초적 통계 하나 마련해두고 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미군의 학살사건을 조사하고자 할 때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국편은 미국에서 수집한 노근리 사건 관련 자료를 비공개로 방치만 해두고 있었고, 한국 외교부는 미국의 눈치만 볼 뿐, 정부차원의 국외 기밀 자료 수집은 부재한 상태였다.

한편, 언론은 진실화해위의 진상 규명에 관심이 없었고,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국민들에게 진상규명 활동이 알려질 통로가 없었다. 보수 언론은 늘 그렇듯 모욕적 언사와 예산 낭비라는 식상한 문제제기로 위원회 때리기를 지속했다. 그러다 긴급조치 판결문이 공개되자 펄쩍 뛰었다. 위원회의 바깥에서 그 활동을 지지하거나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는 시민사회의 활동가 주력이 위원회에 진입하는 순간 미약해졌다. 국방부는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을 부정하며 한국전쟁 당시 토벌군의 입장을 고수했다.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진실을 말해도, 또 좌익이라고 해서 무조건 학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해도 그들은 '만들어낸 허상'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이상의 기록들에서 우리는 '기본에 충실하지 않는 나라', '진실을 유포할 수 없는 나라',  '주권이 없는 나라', '책임언론이 부재한 나라'의 모습을 목도할 수 있다. 정부 수립 이후 6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이리저리 표류하며 떠밀려 흘러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자의 기록이 보여주듯 아직 제대로 된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번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을 때 일부 누리꾼들은 "이게 나라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 흔히 수구세력과의 대결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과제가 주어져있다. 즉 자국민을 아끼고 보호하며, 국제관계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기본에 충실하며, 진실의 용기를 북돋우고,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진실로 사죄하는 정의롭고 당당한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창피한 맨얼굴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어 이러한 희망으로 향하게 하는 보고(寶庫)이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 한국전쟁과 학살, 그 진실을 찾아서

김동춘 지음, 사계절(2013)


태그:#학살의 정치, #기억투쟁, #학살, #과거사청산, #정의로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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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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