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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그러지 마…! 엄마…무서워…!" 

한 아이가 절규하며 흐느낀다. 아이의 아빠와 엄마는 심하게 다투고 있다. 목소리를 높여 옆방에 있는 큰 아이에게 작은 아이를 데려가라고 소리친다. 자는 척하던 큰 아이가 들어와 작은 아이를 데리고 옆방으로 건너간다. 자기도 어린 아이일 뿐이지만 본인보다 어린 동생이 있으니 동생을 달래 재워야 한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아빠와 엄마, 그들의 네 아이가 한 식구다. 이 가족은 16년간 숱한 밤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냈다. 자신들에겐 그저 잘해주는 아빠와 엄마가 왜 싸우는지 아이들로선 영문을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아빠와 엄마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끔 엄마의 얼굴엔 생채기가 났다.

어느 날 엄마는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큰딸에게 이를 알렸다. 평소 큰딸은 엄마를 싫어했다. 자신에게 영웅 그 자체인 아빠가 늘 엄마의 험담을 했고, 자신도 아빠처럼 엄마를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엄마의 생각을 알렸다.

아빠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혼 소송을 준비하다가 잠시 집에 들어온 엄마와 싸우더니 엄마가 데려온 친구에게도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총을 꺼내 들어 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뛰쳐나와 울부짖었다. 이웃에게 소리 지르며 달려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엄마의 친구는 죽었고 엄마는 배와 등, 팔에 총상을 입었다.

절대 폭력의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영화 '옆집 아이'의 스틸 컷. 2006년 미국 테네시 주에 있었던 살인 사건의 생존자 페니와 그의 딸. 페니는 이혼 소송 중 친구와 함께 남편과 살던 집을 찾았다가 남편에게 3발의 총상을 입었다. 함께 간 친구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영화 '옆집 아이'의 스틸 컷. 2006년 미국 테네시 주에 있었던 살인 사건의 생존자 페니와 그의 딸. 페니는 이혼 소송 중 친구와 함께 남편과 살던 집을 찾았다가 남편에게 3발의 총상을 입었다. 함께 간 친구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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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올해 미국 덕 블록(Doug Block) 감독을 통해 영화 <옆집 아이>(The Children Next Door)로 만들어졌다. 미국 테네시 주에 살던 브래드와 페니, 그의 네 자녀가 2006년, 끔찍한 사고 이후 어떻게 사건을 받아들이고, 이겨나가는지를 시간의 단계별로 조명했다.

브래드와 페니가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다. 두 사람은 어릴 적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환경에서 자라며 자신들은 절대 폭력의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페니는 브래드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건져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네 아이에게도 같은 악몽이 반복됐다.

큰딸은 사건 이후에도 감옥에 있는 아빠를 계속 그리워했다. 자신에겐 책 읽어주며 잠을 재워주고, 멋진 곳에 데려가 주는 자상한 아빠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건 어른들의 일일 뿐이었고, 외면하고 싶은 주홍글씨였다. 사건의 생존자로 엄마가 TV에 소개되고, 토크쇼에 출연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큰딸을 비롯해 아빠와 엄마를 잘 이해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부모를, 그리고 사건의 본질을 직면하기 시작했다. 

페니는 상담가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는 브래드를 생각하면 '쫓아가서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16년간 폭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은 부모가 됐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친구가 죽임을 당했고, 본인은 총상뿐 아니라 새끼손가락이 잘리는 상해를 입었다. 네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경제 상황은 파산으로 치달으니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치유할 여유도 없었다.

상담치료를 받으면서야 페니는 마음속 깊이 묻어둔 고통과 분노를 직면할 수 있었다. '이런 가족을 만들려던 게 아닌데' 하며 아이들에게, 자신에게 가졌던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아이들 역시 페니와 함께 지난 세월 동안 엉켜있던 상처와 혼돈을 벗어 던졌다. 

브래드와 페니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세계 곳곳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또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케이스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정폭력 발생률은 54%. 지난해 주요 언론에 소개된 가정폭력 사건만 120건을 웃돈다. 심각한 사건이 주로 언론에 비춰지는 것을 감안했을 때 크고 작은 가정폭력이 한 해 몇 건이나 일어나는지는 도무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정도다.

아이들은 가정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다

8일 오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상영작 중 하나인 '옆집 아이'와 관련한 토크쇼가 열렸다. 고미경 전국가정폭력쉼터협의회 상임대표(좌측)와 김영자 여성주의상담실천연구소 연구위원(우측)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8일 오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상영작 중 하나인 '옆집 아이'와 관련한 토크쇼가 열렸다. 고미경 전국가정폭력쉼터협의회 상임대표(좌측)와 김영자 여성주의상담실천연구소 연구위원(우측)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 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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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7살 쌍둥이를 키우는 김영희(가명)씨가 남편에 의해 목 졸려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남편에게 폭력 당하기를 수년, 쉼터에서 몸을 돌보며 경제적 자립을 위해 자격증을 따고 실습을 다니던 중이었다. '어린이날 하루만 아이들과 함께 집에 와주면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겠다'는 남편의 간곡한 청에 집을 찾았고, 그날 잠든 쌍둥이 옆에서 주검이 됐다. 이 사건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가해자는 우발적인 살인이었다며 형량을 낮춰달라고 항소 중이다. 

8일 오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옆집 아이> 관련 토크쇼에서 고미경 전국가정폭력쉼터협의회 상임대표는 "가정 폭력을 참고 견디다 쉼터로 오는 이들의 평균 시간이 11년 2개월이다"라며 "'왜 대체 지금까지 맞고 살았냐'고 물으면 '보복이 두려워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너무 빌어서 한 번만 더 믿어보려다가' 같은 한결같은 대답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들 안에 숨은 분노, 세상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자책은 오랫동안 해소되지 못한 채 머물러 이들이 이혼을 하고 세상에 나오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방해한다"며 가정폭력에 장기간 노출된 여성이 사회에 발을 내딛기 힘든 이유를 설명했다.

가정폭력 사건의 당사자는 아내이자 엄마인 여성이지만 이들 밑에서 자라고 있는 아동은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다수 인권단체 조사에 의하면 가정폭력을 겪은 아이가 커서 가정폭력 가해자가 될 확률은 일반인의 3배. 브래드와 페니가 그랬듯 '나는 결코 아빠 엄마처럼 내 아이들을 키우지 않을 거야'라고 굳게 다짐했던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아빠의, 또 엄마의 행동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훨씬 큰 것이다. 

페니의 네 아이는 과연 자신의 부모 같은 부모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김영희 씨의 쌍둥이는 자라서 가정폭력 없는 가정을 만들 수 있을까. 페니는 오랫동안 켜켜이 쌓였던 분노와 두려움의 그늘을 걷어 내고 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의지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들은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고 대표는 그것이 '직면'이라고 말했다. 도망가지 않고, 피하지 않고 고통을, 두려움을 돌파하는 것이다. 고 대표는 "직면한다는 건 용기를 낸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이 겪은 일을 주변에 설명해야 한다"면서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바로 잡을 기회를 줘야 한다, 안 그러면 타인과의 소통에서 자기주장만 내세우거나 비난부터 하고 보는 성격이 굳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에게 부모의 잘잘못을 사실 그대로 직면하고 인정할 수 있게 하고,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영자 여성주의상담실천연구소 연구위원은 "상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 치료하지 않으면 가정폭력의 세대 전이를 막을 수 없다"면서 "참고 견디고 순응하라는 사회의 통념 때문에 여성은 가정폭력을 겪을 때 그저 참게 되는데, 그러면 끝없는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만 참으면', 내지는 '나 때문에'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세상에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울함과 무기력함,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고 조언했다.

한편 오는 10일까지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는 '직면의 힘'을 주제로 한국여성의전화가 여는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가 진행된다. 가정폭력, 여성폭력에 관한 다양한 영화가 상영된다. 관람객들은 그와 관련한 영화 해설, 감독과의 대화, 토크쇼 등의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태그:#여성인권영화제, #가정폭력, #직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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