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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는 윤고은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에 대한 결말과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또한 소설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책의 말미에 수록된 강유정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참고했습니다. - 기자말

'이곳'에 있는 이는 '그곳'을 동경한다. 지금 내가 거기 없기에 '그곳'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거리감만큼 욕구는 증폭되고, 성취감은 배가된다. 여기서 '그곳'은 꼭 공간적인 지향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물체가 될 수도 있고, 사상도 될 수 있으며, 사건 따위의 실현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듯 각자의 욕구는 그보다 더 다채롭게 분출된다.

이런 욕망을 확장시키면, '여행'은 이를 충족하는 무언가다. '그곳'을 표면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공간을 가리키니, '여행'은 이를 향하는 행위다.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갈증은 '거기'에서 채워질 것이란 기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기대는 동경이 된다.   

윤고은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 겉표지
 윤고은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 겉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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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상하는 것.
고기압, 벚꽃, 누군가의 부음.
남하하는 것.
황사, 파업, 쓰레기.

지난 한 주간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인 것은 부음 소식이었다. 발인이 지나면 효력을 잃어버릴, 유통기한이 짧기에 신속한 것. 소식이 시작된 곳은 경남 진해였다.(<밤의 여행자들> 첫 단락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정글'

윤고은 작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도 여행을 주제로 한다. 주인공 '요나'의 직장은 '정글'이다. 여행사의 이름이 그렇다. 의미도 통한다. 회사는 자본(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사냥 당한다. 구성원의 자리는 철저하게 쓰임에 따라 박탈당하거나 유지된다. 그런 회사 안에서 요나의 쓰임은 여행 기획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 '요나'의 인간관계를 전혀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 소설 속 그녀에게는 가족, 연인, 친구 어떠한 사적인 이어짐도 없다. 직장인 '정글'이 전부다. 당연히 속마음을 드러낼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독자만이 그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요나'를 직장 상사가 노골적으로 성추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정글'에서 그것은 곧 맹수의 손아귀에 들었음을 의미한다. 퇴출이 기다릴 뿐이다. 그가 성추행을 했다는 것은 사냥되는 직원이란 일종의 표식이다. 그에게 같은 일을 당한 직원들은 모두 회사에서 사라졌다. 미리 알려주니 이를 고마워해야 하나. 소설은 '정글'을 통해 정글을 묘사하고 있다.

숭고함을 상실한, '재난'

여행사 '정글'이 주로 파는 상품은 '재난 여행'이다. 여행과 재난이라니, 뭔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정글의 이용객들은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며, 거기서 일종의 스토리를 찾는다. 남의 불행마저 상품화되는 씁쓸한 장면이 펼쳐진다. 재난 여행을 떠난 관광객들은 고통 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싸구려 우월감을 얻는다.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밤의 여행자들> 61쪽)

성추행이란 '옐로카드'를 받은 요나는 '무이'란 지역으로 떠밀리게 된다. 회사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점검이라고 했다. 그렇게 요나는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 무이로 갔다. 거기서 자신이 기획하는 재난 여행의 이면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섭리인 재난마저 철저하게 기획되고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다 귀국하는 날, 요나는 일행에서 낙오하고 만다. 진짜 재난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존재를 느낀다.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형상화, '파울'

요나가 조우한 것은 무이를 지배하는 '파울'이었다. 사실 이미 직장을 떠나오기 전부터 '파울'은 등장했다. 회사 낙오자의 대열에 합류한 요나에게 동료들은 '파울'때문이라 쑥덕거렸고, 일행을 놓친 요나에게 사람들은 '파울'을 찾으라고 했다. 결국 요나의 정글도, 요나의 한국도, 요나의 무이도 모두 '파울'이 움직였다. 그러나 작가는 신기하리만치 그 정체에 대해서는 꼭꼭 숨겨뒀다. 볼 수 없는 절대자, 그게 '파울'이었다.

'파울'은 사람들에게 숫자를 부여했다. 여자11, 남자20. 이름은 없다. 각자의 생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철저히 분업화된 업무 속에서 인간은 그저 부품일 뿐이다. 톱니바퀴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동력이 전달되는 곳을 궁금해 하지 않듯. 이유나 결과에 대한 물음은 금기다.

실체는 숨기고 관념 속에서 형상화된 '파울'이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감수성이다. 역할과 자리만 존재하면 됐다. 불필요한 감수성은 '파울'의 기획을 그르치는 도구일 뿐이다. 질서에 저항하는 개인은 필요가 없다. 이를 어긴 요나는 순식간에 악어75가 됐다. 악어들은 기획된 재난의 희생양이었다. 단지 무이의 현지인에게 사랑을 느꼈단 이유로.

악어75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요나는 봉투 아래 적혀 있는 담당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요나의 담당자는 남자34였고, 통화는 빠르게 연결되었지만 그의 대답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저는 당신에게 역할을 전달하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에요. 그게 제 역할이거든요. 왜냐고요? 그것까지는 몰라요. 제 관할이 아니에요."(<밤의 여행자들> 193쪽)

저항의 대가는 컸다. 악어들은 침체된 무이의 관광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을 재물이 됐다. 재난의 상처를 극복한 장소는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다. 인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다시 재난이란 스토리가 필요했다. 소설에서 요나는 다른 악어들과 함께 사라진다. 감쪽같이.

북상하는 것.
저기압, 장마, 누군가의 부음.
남하하는 것.
파업, 쓰레기, 이야기.

지난 한 주간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인 것은 부음소식이었다. 발인이 지나면 효력을 잃어버릴, 유통기한이 짧기에 신속한 것. 소식이 시작된 곳은 무이였다.(<밤의 여행자들> 마지막 단락에서)

그렇게 소설은 결말을 맞는다. 소설의 시작과 같이 일상은 시작된다. 다만 이번 부음의 시작은 '무이'라는 점이 다를 뿐. 강유정 문화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관광으로도, 여행으로도, 카메라의 셔터로도 잡을 수 없는 완전한 실종'이다. 그 해석을 이어가 '완벽한 실종이 실현하는 완전한 세계, 작가가 말하는 숭고한 세계가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작가의 이상향이 묵시록으로 치환되고, 결국 무(無)의 세계가 숭고한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결말에 다다라 조금 다르게 느꼈다. 요나의 죽음(혹은 실종)이 일종의 경종이라고 말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재난마저 상품으로 만드는 '파울'의 비판적 해석이 가능하다. 거기에 단지 '감수성(사랑)'을 느끼는 현상이 질서에 대한 불응으로까지 받아드려지다니. 그렇다면 감정마저 통제받는 씁쓸한 세태의 단면이 극대화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이 오버랩되면서. 문학평론가의 '문학적' 해석에 도움 받다가 결말에 와서 '자의적'으로 돌변한 모습이 스스로도 조금 얍삽하지만, 뭐 어떡하나. 난 그랬는 걸.

덧붙이는 글 |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지음, 민음사 펴냄, 2013.10, 1만2천원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지음, 민음사(2013)


태그:#윤고은, #민음사, #밤의 여행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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