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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육군사관학교(아래 육사) 시대였다. 1979년의 10·26 사태 이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과 노태우가 육사 출신이었다. 그 전두환이 체육관에서 이뤄진 간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6·29 선언으로 치러진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육사는 1980년대를 확실하게 장악했던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죽하면 '육법당(陸法黨)'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육법당은 1980년대 즈음 우리나라 권력판의 전근대적인 행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군인 출신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 '육'사 출신 정치인들과 서울대 '법'대를 나온 법률가들이 결합해 부도덕한 정권을 지탱해주던 체제를 가리킨 말이기 때문이다.

육사의 막강한 위상은 당시 고등학교 3학년생들의 입시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육사 합격은 서울대 합격과 거의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물론 수치로 표시되는 입시 성적만 놓고 보면 육사는 서울대보다 커트라인이 한참 낮았다. 하지만 육사가 당대의 권력판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 덕분에 입시에서의 지위는 서울대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대학 입시에서의 육사 열풍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생겨났다. 하지만 그 이유는 조금 달랐다. 당대의 권력 지도를 익히 꿰차고 있던 도시 중산층 출신 입시생들은 육사가 보증해 주는 권력과 출세의 길에 눈독을 들였다. 가난하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잘하는 지방의 고학생들에게는 학비 면제와 안정된 직업 군인의 삶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경제적인 이유가 컸던 것이다.

당시 육사 합격은 한 집안의 경사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 이름이 동네 사거리에 내걸린 펼침막에 자랑스럽게 박히곤 하는 것처럼, 당시 육사 합격은 해당 학생이 살던 마을과 고장의 위상이 '업그레이드'되는 놀라운 뉴스 거리로 취급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스스로 지레 위축된 채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이른바 '촌것'들이 육사에 더욱 집착했던 것 같다.

'육법당' 시대, 내 마음에 육사가 자리잡았다

육사 출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육사 출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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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런 수많은 '촌것' 중의 하나였다. 고3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철학도나 역사학도를 꿈꾸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 학교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부터는 국어국문학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런 묵직한 질문이 뒤따랐다. 무슨 돈으로 대학 가지? 가난한 집안 형편은 나를 역사학도나 철학도, 또는 국어국문학도의 길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했다.

육사가 내 대학 입시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게 그 무렵이었다. 수업 시간 중에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과 친구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큰 영향을 주었다. 합격만 해서 들어가게 되면 평생 자랑스러운 전문 직업 군인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일도 결코 생기지 않을 터였다. 솔깃해하는 내게 선생님과 친구들은 국비 유학이니 대학원 진학 지원이니 하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모두가 꿈같은 일들이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육사가 자리잡았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수위권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보통' 학교가 아니었다. 순천시와 여수시를 비롯해 전남 동부의 여섯 개 군에서 공부깨나 하는 '수재'들이 일부러 찾아드는 전통의 '명문고'였다. 중학교 때 기억만 믿고 자만해 있던 내게 700여명이 훨씬 넘는 '수재' 동기들은 현실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다. 입학 직후 70여명 가까운 반에서 10위권에 있던 내 성적은 2학년 말 20위~30위권에서 오르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쉽지 않았다. 모두들 무섭게 공부했다. 반 친구들 대다수에게 오후 10시까지 하는 야간자율학습은 기본이었다. 오후 11시를 넘어 자정까지 문제집을 파고드는 친구들도 부지기수였다. 공부는 결코 나만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성적 변화도 거의 없었다. 5월엔가는 모의고사 점수가 오히려 40위권으로 추락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야말로 최악의 '멘붕'이었다.

그 잔인한 5월을 지나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취약 과목이던 수학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학 과목은 육사 시험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기출 문제를 봐도 고난도 문항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 해 처음으로 나온 '블랙 ○○'이라는 이름의 얇은 수학 유형 문제집을 통째로 외워버리기로 했다. 검정과 노랑으로 단순하게 디자인된 그 책의 표지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무식한 수학 공부 덕분이었을까. 모의고사에서 수학 점수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자극을 받아 다른 과목들도 더욱 열심히 파고들었다. 공부에 흥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모의고사 점수가 상승세를 탔다. 시원찮은 내신이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육사 본고사 점수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9월 초, 드디어 원서를 접수했다. 학교 전체에서 15명 정도가 지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조금 더 알아보니 다들 나름대로 쟁쟁한 실력자들이었다. 우리 반에서는 전체 66명 중 꾸준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친구 하나가 나와 함께 지원했다. 다들 성적으로 다퉈야 하는 경쟁자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나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5월 이후 죽자사자 매달려 나름대로 성과를 본 경험과 그로 인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야말로 '고고씽'이었다.

시험은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치렀다. 광주에는 시험 치르기 전날 도착했다. 고등학교 근처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학교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얇고 까칠까칠한 누비 이불을 덮고 잔 기억도 머릿속에 또렷이 살아남아 있다.

그런데 시험을 치르던 당일의 풍경과 끝나고 나서 순천으로 이동하기까지의 과정이 내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무엇 때문일까. 나는 한동안 그 이유를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뜻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띄엄띄엄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은 당시에 겪은 어떤 정신적 상처로 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학력고사 3개월 전, 머리를 빡빡 밀다

육군사관학교 학교본부 모습
 육군사관학교 학교본부 모습
ⓒ 육사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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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그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우리 학교에서 지원한 친구들도 대다수가 붙지 못했다. 들은 바로는 우리 반에서 수위권에 있던 그 친구만 합격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해마다 서너 명씩은 육사에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평년의 결과와 비교해 보아도 그 해 육사 입시 결과는 정말 형편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음모론' 같은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육사가 호남 지역 고교 출신자들을 차별하기 위해 일종의 쿼터제처럼 극히 제한적인 할당 인원만 주고 합격생을 뽑는다는 식의 말이었다. 설마 그러랴 싶으면서도 끝내 의혹을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영남과 육사 출신 대통령이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1학년 때부터 몰래 돌려보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처참한 사진들도 그런 심증을 더욱 굳게 했다.

육사 1차 시험 불합격의 후폭풍은 거셌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나는 성적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과도한 자신감만으로 지나치게 합격을 확신했다. 그랬으니 심리적인 박탈감이나 패배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 보기도 낯 부끄러웠다. 나 스스로 '난 할 수 있어' 식의 교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추석 직전에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구겨지고 쓰러진 내 자존심은 그 어디서도 제 모습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아직 나 살아 있다'는 메시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추석 명절을 하루 앞둔 날 오후, 자취방을 나와 근처 이발소로 향했다. 이발 의자에 앉으면서 삭발을 해달라고 했다. 주인 아저씨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게 군대 가냐고 물으셨다. 아니라고, 머리 깎고 정신 차려 공부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그런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내 자신에게 나름의 결연한 의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뒤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온 반응들은 시원찮았다.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자취집에서 고향집으로 온 나를 아버지께서는 '너 미친 게냐' 하는 듯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바라보셨다. 동네 당숙과 사촌 형님 등 집안 식구들도 안쓰럽다는 표정만 지으셨다.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분들의 눈길은 내 얼굴을 홧홧거리게 했다. 스스로 잘 될 거라며 거들먹거렸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추석을 쇤 후 학교에서는 더욱 곤혹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복도를 오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선생님들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반항하냐'는 식으로 타박을 하셨기 때문이다. 지레 주눅이 들 때도 많았다. 그렇게 머리를 박박 밀었는데도 스스로 공부하는 게 시원찮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나는 남은 3개월 정도를 크게 절망하지 않고 잘 버텨냈다.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몇몇 친한 친구들의 다독임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해 대학 입학 시험인 학력고사는 12월 중순엔가 치러졌다. 당시는 '선지원 후시험' 체제였다. 나는 서울 지역 모 사립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1지망으로 국어국문학과를 쓰고, 2지망과 3지망으로 역사학과와 철학과를 썼다. 결국 1, 2학년 때,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내가 꿈꾸었던 길로 돌아간 것이다. 대학 합격 통지를 받던 날, 고3 시절 몇 달간 나를 뜨겁게 달구었던 '육사'가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때 시험에서 떨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용은 되지 말자, 우리

'수면 폭풍'에 휘말린 고3 교실의 어느 오후 쉬는 시간 풍경(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수면 폭풍'에 휘말린 고3 교실의 어느 오후 쉬는 시간 풍경(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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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육사에 푹 빠져 있었던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때 나는 '개천의 용'을 떠올리고 있었던 듯하다. 순진하게도 나는 '육사'라는 권력의 또 다른 이름표를 가슴에 다는 것만으로도 개천을 벗어난 용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개천을 벗어나 용이 된 동기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인구로 20만도 채 되지 않은 지방 소도시의 한 인문계 고교에서 졸업생 60여명이 서울대를 합격했으니 두 말 해 무엇하랴.

서울대 합격생들의 출신 고교가 외국어고나 과학고 같은 특수목적고 중심으로 재편된 지 꽤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나라의 핵심 주류에는 지방의 고학생 출신이 제법 있다. 법조계나 관료계의 중견 그룹에도 '개천의 용' 출신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학력고사 세대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주류로 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을까.

평안도는 조선 시대에 '천형(天刑)'의 땅이었다. 정치·사회적인 차별이 극심했다. 그런데 18~19세기에 이르면 상황이 바뀐다. 이 시기의 정규 시험에서는 평안도 출신 문과 합격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승정원, 의정부 등의 요직에 진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성균관 전적(典籍) 정도가 잘 나가는 직책이었고, 시골 현감이나 군수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천형과 차별의 땅'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 대다수는 홍패(문과 시험 급제자에게 주었던 일종의 합격 증서)를 끌어안고 벼슬을 기다리다 죽었다. 그들의 선배 합격자가 '쪽집게 강사' 노릇을 해준 덕분에 평안도에서는 더 많은 홍패가 나왔다고도 한다. 개천에서 수 마리의 용이 연달아 나온 것으로 봐도 되겠다.

하지만 백승종 선생은 최근작 <역설>(2013, 산처럼)에서 이들이 한낱 이무기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자신들을 차별한 조선 사회의 부조리에 가장 적극적으로 항거했어야 할 유능한 인사들이 '용'이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체제 순응의 길만 가고 있었기에 말이다. 실제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도 자신들이 살았던 '개천'을 잊어버리는 싹수 없는 '용'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애초에 '용'이 될 자질과 능력이 없었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등용문'을 뛰어넘어 '용'의 세계에 들어간 내 친구들은 진짜 제대로 된 '용' 노릇을 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가. 지방의 가난한 고학생 출신으로 '개천'을 위해 헌신하는 진짜 '용'이 우리에게는 과연 얼마나 많은가.

수능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며칠 후면 등용문을 오르기를 꿈꾸는 60여만 명의 '이무기'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의 생애 중 가장 뜨거운 하루를 보낼 것이다. 모두들 바라는 바대로 좋은 결과를 얻기를 빈다. 덧붙이는 한 가지. 그 등용문에 오르려는 게 다만 그저 '용'이 되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해서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용'만 잘 사는 세상이 과연 행복할지 찬찬히 떠올려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입시가 뭐길래' 응모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육군사관학교, #육법당, #개천의 용과 이무기,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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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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