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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오르차의 풍경
 오르차의 풍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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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차는 카주라호에서 터덜거리는 전동차를 5시간 정도 타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15시간 넘게 걸리는 밤 기차를 수차례 탄 마당에 5시간 기차에서 보내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제는 기차가 오후에 단 한 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낮 시간에 기차를 타기란 고역이다. 카메라를 꺼내 그동안 찍어놓은 사진을 감상할 수도 없고,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만 챙겨온지라 긴 여정의 지루함을 책으로 달랠 수도 없다. 호기심 가득 시퍼렇게 뜬 눈이 사방에 앉아 있는 햇살 가득한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차창 밖 풍경 한 번, 차 안 풍경 한 번 번갈아가며 구경하는 일뿐이다.

마음에 의심과 욕심을 가득 담은 나는 책이 있어도 읽지 못하고, 카메라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한 채, 인도의 시골 풍경을 스쳐 지나는 차창을 바라보며 5시간을 흘려보냈다.    

잔뜩 긴장해 어깨가 꼿꼿이 선 여행자의 모습, 어딘가 낯이 익다

한적한 오르차 마을과 오르차 성의 모습
 한적한 오르차 마을과 오르차 성의 모습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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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차 시내로 가세요? 저희랑 릭샤 같이 타실래요?"

전차가 오르차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다. 전차에서 내리자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던 서양 여자 세 명이 다급히 말을 걸어온다. 스페인에서 온 여행자였다. 두 명은 자매, 한 명은 친구. 해가 진 낯선 도시에서 여자 셋이 호텔을 찾기가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함께 역사 밖으로 나갔다. 전차가 도착하는 시간을 꿰고 있는 릭샤꾼들이 역사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스리 마한트 게스트하우스까지 가주세요. 얼마죠?"

호텔을 알아보지 않고 왔다는 세 여행자를 대신해, 미리 알아 놓은 숙소의 이름을 릭샤꾼에게 말했다. 릭샤꾼은 가이드북에서 제시한 금액의 세 배는 더 되는 돈을 요구했다. 가이드북에 적힌 금액 같은 거야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오래인 우리는 별 저항 없이 릭샤에 올랐다. 그런데 아차, 동행이 있었지.

"노노노!! 가이드북에서 말하는 가격이랑 차이가 나잖아요!"

세 친구 중 한 명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러더니 오르차 교통 안내가 나온 가이드북 페이지를 펼쳐 릭샤꾼의 얼굴 앞으로 다짜고짜 내밀었다. 릭샤꾼은 콧방귀나 뀔 뿐이다.

잔뜩 긴장해 어깨가 꼿꼿이 선 세 친구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그렇지. 여행 첫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뚝 떨어져 겁을 잔뜩 먹은 더스틴과 나의 모습이 딱 저랬지.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가 총 다섯 명이잖아요. 게다가 짐도 많고, 날이 저물기도 했고. 나누면 인당 50루피인데 그냥 타죠."

릭샤꾼과 대치해 날카로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세 친구는 같은 여행자인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할 수 없다는 듯 릭샤 위로 올라탔다.

스러진 오르차의 유적 위에 자라난 나무
 스러진 오르차의 유적 위에 자라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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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방학이라 인도를 한 달 동안 여행하고 있어요. 그런데 너무 정신이 없는 거 있죠. 여기저기 이동해 다니느라 엄청 힘드네요."
"그러시구나. 어디 어디 가셨어요?"
"처음 도착한 곳은 델리예요. 델리에서 아그라로 갔다가 오늘 오르차에 온 거고요. 내일은 카주라호로 떠날 거예요."
"여러 군데 많이 가셨네요. 여행 막바지이신가 보죠? 인도에는 언제 도착하셨어요?"
"삼일 전이요."

'…삼일!' 델리, 아그라를 거쳐 오늘 오르차에 도착했는데 삼일이 됐다면 하루에 한 도시를 찍었단 말인가! 길을 잃지도,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한 곳에 발이 묶인 적도 없단 말인가! 한 달 뿐인 시간 동안 인도의 많은 모습을 보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그녀들이 대단해 보일 뿐이다. 나와 더스틴같이 용의주도하지 못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도시 세 곳을 가려면 2주 정도는 어슬렁거려야 하는 게으른 무계획주의자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숙소를 정하지 않고 왔다는 세 친구는 우리가 묵기로 한 숙소로 따라왔다. 몇 푼 아끼자고 흥정 같은 거 해 봤자 숙소 주인장에게 쌀쌀히 거절만 당하고 진만 뺄 거 같아서 주인이 요구하는 300루피를 순순히 건네주었다. 같이 온 세 친구 역시 흔하지 않은 트리플 룸(침대 세 개가 있는 방)이 있다는 대답을 듣고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 방을 확인하러 올라갔다.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밤의 얼굴

제항기르 마할 입구
 제항기르 마할 입구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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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있는 우리 방 옆에는 오르차의 거리와 람라자 사원(Ram Raja Temple, 힌두교의 신 비슈누의 일곱 번째 화신인 라마를 모시는 사원)을 내려다보는 야외 테라스가 있었다. 오르차의 밤 공기는 축제 기운으로 가득했다. 결혼식이 있는지 화려한 사리를 걸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더니 경쾌하고 시끌벅적한 음악이 온 동네로 흘러넘쳤다.

막 도착한 여행지의 밤 얼굴을 먼저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밤이야말로 여행지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일 지도 모른다. 모두가 욕망을 감추고, 조금은 긴장한 자세로 노동을 하는, 모든 게 환하게 드러난 대낮의 모습보다는, 일터에서 벗어나 소박한 자유를 머금고, 길을 걷고 수다를 떨고 음식을 먹고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을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우리와 같이 온 세 친구들이 배낭을 그대로 멘 채 로비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친구들은 우리를 발견하자 고자질을 들어줄 담임 선생님이라도 만난 양 반가워했다.

"트리플룸이 있긴 한데, 400루피나 달라더라고요. 너무 비싸다고 그냥 가겠다고 했죠. 근처에 또 호텔이 있을까요?"

이 친구들, 더스틴과 내가 한때 앓던 여행자 짠돌이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 하룻밤 400루피(한화 9천 원)만 셋이 나눠 내면, 인도 여행자 숙소치고는 훌륭한 깨끗하고 편안한 침대에서, 그것도 흔치 않은 트리플 침대에서 각자의 큰 침대를 영위하며 잘 수 있는데. 2달러를 아끼기 위해 그것을 마다하고 이 밤에 또 다른 숙소를 찾아 떠나겠다는 이 집념. 스페인을 떠난 지 삼일 밖에 안 됐다면서 스페인에서는 콜라 한 병 사 먹으면 없어질 돈을 가지고 벌벌 떠는 이유는 분명, 이놈의 가이드북 때문일 것이다.

오르차 성 뒷편의 밭길
 오르차 성 뒷편의 밭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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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여행자들에겐 모든 게 낯설다. 그 도시의 문화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특히 물가를 모른다. 가이드북만 보물처럼 손에 꼭 쥔 채, 무엇을 할지, 먹을지, 살지, 그리고 어디에서 잘지,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믿어도 될지에 대한 모든 결정을 가이드북 어딘가에 적혀있을 몇 가지 문장을 보고 판단한다.

힘들게 떠나온 여행을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이드북을 지나치게 신봉하다 보면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 가이드북에 나온 미션을 수행하러 다니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지는 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나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에이. 셋이서 400루피면 괜찮죠. 저희는 둘인데 300루피 냈어요. 내일 또 카주라호로 가신다면서 예상한 것보다 조금 더 내더라도 빨리 짐 풀고 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세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우물쭈물 망설이는 눈치였다. 더스틴과 나는 가이드북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듣는 착한 어린아이 단계에서 벗어나, 보라는 거 안 보고 괜히 딴 길로 새거나 먹으라는 거 안 먹고 혀가 이끄는 대로 먹어버리는 은근한 반항을 시작한 청소년기에 접어든 터였다.

나는 가이드북이 하는 말 따위 집어치우고 그냥 여기에 짐을 풀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녀들을 살살 꾀었다. 야밤에 갈 곳도 없던 세 친구는 가격을 350루피로 합의 보고 우리가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 여행자마다 여행하는 방식도 다르다. 빨리 가고 많이 보는 것이 무조건 더 좋은 여행이 아니듯,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만이 정답도 아닐 것이다.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여행 방식을 찾는 것이, 삶의 방식을 공부하기 위해 길을 나선 여행자의 오랜 숙제일 거다.

세 친구는 다음 날이 되자 자취를 감췄다. 아마도 카주라호로 떠났겠지.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슬프고 성질나는 그녀들만의 여행을 계속했겠지.

오르차의 베트와 강(Betwa River)
 오르차의 베트와 강(Betwa River)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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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르차, #인도, #카주라호, #배낭여행, #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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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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