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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응답하라1994> 포스터. 시즌1의 영광을 충분히 이어갈 듯하다.

tvN <응답하라1994> 포스터. 시즌1의 영광을 충분히 이어갈 듯하다. ⓒ tvN

세 아이를 키우며 드라마는커녕 뉴스도 챙겨보기 힘든 일상 중에 핸드폰에 알람설정까지 해놓고 첫 방송을 기다린 드라마가 생겼다. 바로 tvN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

시즌1에 해당하는 <응답하라 1997>(이하 <응칠>)은 방송이 끝나고 1년이 지난 후에야 뒤늦게 소문을 듣고 아이들이 잠든 밤 남편과 함께 어떤가 보기나 하자며 VOD로 첫 회를 보곤 며칠 동안 새벽 3시까지 벼락치기로 전회를 다 봤었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응칠>을 보며 각자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서로를 놀리기도 하고 아직은 서로에게 비밀인 옛일을 몰래 추억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조금 아쉬웠던 건 <응칠>의 배경인 1997년에 남편과 나는 스무 살, 대학 1학년이었다는 거다. 열일곱으로 살았던 1994년과 스무 살로 살았던 1997년의 간극은 당당하게 호프집에 들어가 '생맥' 500ml을 시키느냐, 아니면 몰래 동네 슈퍼에서 캔 맥주를 사 친구들과 숨죽이며 맛을 보느냐의 차이쯤이라고나 할까? 첫사랑의 떨림을 다시 느낄 수 있었지만 H.O.T. 등의 아이돌을 향한 열정에선 거리가 있었던 때라 아주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던 <응칠>.

내가 열일곱이던 1994년의 이야기, 공감할 수 있을까?

시즌 2인 <응사> 소식을 듣고 반가웠지만 1994년 스무 살들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에 다시 아쉬움이 찾아왔다. 1994년 나는 열일곱이었다. 더구나 <응사>의 큰 이야기 줄기인 대학 농구와 서태지 열풍에서도 나는 빗겨 있었다. 당시 청소년 사이에서도 대학농구와 서태지는 열풍이었지만 난 큰 감흥이 없었다. 우지원·이상민·서태지보다 그들을 좋아했던 내 친구들 이름이 더 기억난다.

그러나 작품 소개에 해당하는 0회를 본 후 <응칠>보다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추억에 젖어 첫 방송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응사>는 전작보다 조금 더 성숙하게 첫사랑을 다루면서 대학농구와 서태지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스무 살의 열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줄 듯했다. 여기에 <응칠>의 매력이었던 '사투리'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서울 등 각기 다른 지방어들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잘 비벼 맛깔난 비빔밥 한 그릇으로 만들어 매회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나를 사로잡은 게 있었으니, 바로 하숙집에 모여든 전국 각지의 청년들이 보여줄 '촌놈들의 서울 상경기!' 1994년 나도 시골에서 지방의 중소도시로 고등학교 유학을 갔고, 스무 살엔 서울로 대학을 가며 문화충격을 겪어 봤다. <응사>의 청년들은 어떻게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적응하며 웃고 울까?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그들도 겪게 될까? 나와 같고도 다른, 팔도에서 상경한 청년들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스무 살 서울 입성을 추억할 수 있게 된 <응사>에 대한 기대는 첫 회를 보고 더 부풀어 올랐다.

그래, 나도 어리바리한 촌놈이었지

지리산 자락 작은 마을 산청, 그 중에서도 아홉 집이 전부인 산속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한 학년이 10반까지인 인근 도시 진주로 고등학교를 갔을 때 받았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3개 학년 통틀어도 아홉 반이 전부인 산청의 여중에서 전교 서른 개 반에 학생 수 1500명이 넘는 진주의 여고로 진학한 첫날 받았던 충격과 '그래도 기죽지 말고 이곳에서 살아남아야겠다' 굳게 결심했던 열일곱의 각오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도 한 반의 30% 정도가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의 인근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라 큰 거부감 없이 섞일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하숙을 했지만 입시 전쟁터인 학교는 아침 7시 반까지 등교해 밤 10시가 되어야 하교할 수 있어 하숙집에선 그야말로 잠만 잤다. 그래서 하숙집과 도시에 대한 기억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다 스무 살에 서울로 대학을 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촌놈의 서울 상경기'. 시간 차이는 있지만 <응사>의 등장인물들이 겪었던 그대로 나도 스무 살 처음 서울에 입성해 큰 규모에 놀랐고, 늘 바삐 어딘가로 걸어가는 서울 사람들에 휩쓸려 정신없었고, 교양 있어 보이는 나긋나긋한 서울말에 주눅 들었었고, 뭘 해도 촌놈 티가 나는 세련된 서울에서 우리 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아는 고향동네가 그리워졌었고, 공중전화만 보면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났었고, 그러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거의 일 년 넘도록 시험 보는 기분으로 지하철노선도를 보며 긴장을 신발 끈과 함께 묶고 다녔었다.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미로 같았던 지하철 노선도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미로 같았던 지하철 노선도 ⓒ tvN


미로와도 같았던 지하철 노선도

세 아이를 모두 재워놓고 추억에 젖으며 <응사> 첫 방송을 보고 싶었건만 아이들이 모두 잠들기엔 조금 이른 시각 오후 8시 50분. 할 수 없이 아이들을 조금 늦게 재우기로 하고 막내에게 젖을 물리며 다섯 살, 세 살 두 아이를 양 옆에 앉히고 남편과 함께 TV를 틀었다. <응칠>에서 세심하게 재현했던 1997년처럼 <응사>의 시간인 1994년도 오밀조밀 배경으로 되살아나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배경은 서울이었지만 언제 들어도 정겨운 경상도 고향말. 16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급하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고향말을 신나게 듣고 웃으며 '신기하게도' 서울이 고향인 남편에게 중간 중간 통역을 바쁘게 하며 새롭고 낯익은 등장인물들을 만났다. 고향말에 반가운 나와는 달리 신촌에서 대학을 나온 남편은 잠시 잊고 있었던 신촌 일대 지명과 학교를 보며 추억에 젖어 들었다.

등장인물 소개와 대학농구, 서태지, 하숙집 풍경, 조금은 얄미운 서울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로 이뤄졌던 1회 중에서 나를 가장 웃고 울게 한 건 '삼천포'(김성균 분)가 서울역에 내려 '신촌하숙'까지 장장 10시간에 걸쳐 찾아오는 과정이었다. 단 한 번도 긴장 속에 지하철을 탄 적 없다는 서울사람인 남편은 '드라마라 과장된 거 아니냐'고 했지만, 나도 삼천포처럼 미로와도 같았던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고 지금도 지하철을 탈 때면 살짝 긴장을 한다.

서울역 지하철 승강장에 앉아 한 시간을 기다려도 의정부 북부행, 청량리행 열차만 오고 신촌행 열차는 오지 않고, 겨우 시청에서 환승해야한다는 걸 알고 올라탄 열차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시커먼 어둠 뿐. '기차 타고 서울까지 왔는데 지하철 타고 신촌을 못 가겠냐' 큰소리 쳤건만 2분밖에 걸리지 않는 서울역-시청 한 구간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건 어둠뿐이니 얼마나 두려웠을까, 장국영을 닮은 우리의 삼천포는.

16년 전 내가 땅 속을 달리는 지하철을 처음 탔던 그 때처럼 긴장과 두려움, 비장함까지 교차하는 얼굴의 삼천포를 시청역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 창문 속에 담아낸 장면은 내가 뽑은 1회의 명장면이다. 비록 남편은 다시보기까지 해줘도 기억 못하는 장면이지만.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기차 타고 서울 왔는데 지하철 정도는...어렵기만 했던 지하철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기차 타고 서울 왔는데 지하철 정도는...어렵기만 했던 지하철 ⓒ tvN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던 서울 야경

삼천포가 겨우겨우 신촌역에 도착해 그레이스 백화점을 찾아 두더지 게임하듯 여기저기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는 장면도 백미였다. 분명 안내도를 보고 또 보고 계단을 올라가보지만 목적지는 길 건너, 건너고 또 건너에 있었던 다리 아프고 머리 어지러운 기억들 역시 남편은 모른다. '지도도 못보냐'는 핀잔만 돌아올 뿐. 나의 스무 살 시절 안국역에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출구 두더지 게임을 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안국역에 가면 긴장을 한다는 걸 서울 사람인 남편은 알까?

결국 삼천포는 그레이스 백화점 찾기를 포기하고 기본요금이면 된다는 독수리다방 근처 신촌하숙집까지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준다. 그러나 택시 기사는 묘한 웃음을 흘린 후 삼천포에게 제대로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 한강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고, 63빌딩, 남산타워도 보여주고 출발지였던 서울역도 거쳐 미터기에 이만 원을 찍고서야 신촌하숙 앞도 아닌 독수리다방 앞에 세워준다. 요금 계산을 하는 중 올라간 100원까지 야박하게 다 받으며.

나도 몇 번이나 일부러 돌아가는 택시에서 바가지요금을 당해본 적 있지만 이 장면에선 서울에서 첫눈에 반했던, 크리스마스 트리 같았던 서울 야경이 더 눈에 들어왔다. 탈북자들이 서울에 와 가장 놀라는 것이 야경이라 하던데, 지리산 촌놈인 나도 서울에 입성해 반짝이는 야경에 넋을 잃었었다. 지금도 밤에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달릴 때면 길게 뻗은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과 총총히 박힌 가로등, 그리고 스무 살엔 바다처럼 보였던 한강에 비친 도시의 불빛에 마음이 동하곤 한다. 발가락 끝까지 들어갔던 서울의 긴장이 조금은 내려지는 순간, 서울의 밤이다.

눈물 젖은 공중전화 박스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낯설고 그리운 마음에 쉬 잠들지 못했던 서울의 첫날밤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낯설고 그리운 마음에 쉬 잠들지 못했던 서울의 첫날밤 ⓒ tvN


20100원을 치르고 내린 독수리다방 앞에 내린 삼천포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삼천포에 계신 어무이에게 전화를 건다. 천신만고 끝에 신촌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숨기고 친구를 만나느라 늦었노라, 서울은 춥지 않냐는 남쪽 고향에 계신 어무이의 물음에 '한 개도' 안 춥다는 대답을 하는 삼천포. 20년 간 키운 생떼 같은 자식을 처음으로 객지, 그도 눈 뜨고 코도 베어간다는 추운 서울로 떠나보낸 어무이의 울음은 많은 이들을 울렸을 것이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열일곱에 객지로 나를 떠나보냈던 엄마, 아빠의 마음이 뒤늦게 헤아려진다. 10년이 넘게 몇 달에 한 번 씩 시골 버스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고 떠나는 딸아이를 향해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시던 돌아가신 친정 아빠…. 10년이면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늘 버스 터미널에서 이별하던 순간엔 아빠도 나도 눈물을 참기 어려웠고, 서울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걸 때면 아빠도 나도 말을 이어가기 서툴렀었다.

겨우 하숙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서니 고향의 어무이가 보내신 임금님도 부럽지도 않을 두꺼운 비단 솜이불이 깔려 있다. 안 춥다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엄마 마음은 행여 내 자식 객지에서 배고프고 추울까 그 걱정뿐이다. 엄마가 정성으로 마련해주신 새 이불을 덮고 도시에서 자던 첫날밤, 쉬 잠들지 못하고 꽤 오래 훌쩍였던 기억의 꼬리를 물고 그 날 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도 오래 잠을 청하지 못하셨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내 스무 살을 호명하며 내 아이의 스무 살을 그려본다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서울 와 처음 먹어봤던 저 비스켓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서울 와 처음 먹어봤던 저 비스켓 ⓒ tvN


2회까지 선을 보인 <응사>는 마지막 회까지 서울에 얽힌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첫사랑의 열병을 그려가며 잊고 살았던 추억을 불러내줄 것이다. 저마다의 추억과 따로 똑같이 만나며 깊어가는 가을 밤 잠시 쉬어가는 주말을 선물해 줄 <응사>. 첫 회 나정(고아라 분)의 대사처럼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서울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서울사람은 아닌 촌놈인 나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촌놈 정서로 살아갈 이방인들의 도시 서울에서 여전히 '신기한 서울이 고향'인 남편과 그러고 보니 서울이 고향인 내 아이들을 키워가겠지.

아직도 낯설고 긴장을 주머니에 넣고 살아가는 서울이지만, 살다보니 서울에도 어느새 추억이 쌓이고 있다. 고향집 같은 진한 그리움의 향기는 없지만 일상에 지치는 날이면 잠시 돌아볼 내 스무 살이 살았던 '서울 이곳'. 2회의 비스켓 40개 에피소드에 한참을 웃다 다음날 비스켓을 사먹으러 갔더니 800원에서 1600원으로 오르고 크기도 작아지고 버터는 주지 않고 딸기 쨈도 조금만 주더라며 추억은 추억일 때 좋은 거라며 친구는 씁쓸해 했지만, 그런 추억들이 쌓여 지금까지 왔고 지금도 언젠가는 그리운 추억이 되겠지. 내가 부모가 되고 어린 내 아이가 언젠가는 스무 살이 될 것처럼.

회를 거듭하면서 나정의 신랑 찾기에 더 집중하겠지만, '산촌하숙'에 모인 촌놈들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서울에 입성하기를, 서울에 익숙해져도 고향집 산과 들의 정서를 잃지 않기를 바라며 <응사>와 함께 아줌마는 '불금'을 보낸다. 이번 주부터는 10분 일찍 시작한다하니 다시 알람을 설정한다. 지난주엔 금요일만 하는 줄 알고 토요일 방송은 며칠 지나서야 VOD로 봤다. 나 같은 아줌마들을 위해 다시 한 번 공지. <응사>는 금, 토 오후 8시 40분에 시작입니다. 낼 모레 불혹이라며 남편과 서로 놀리기도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신촌을 누비던 스무 살이다. 금토 밤 잠시 동안은 아이들을 재워놓고, 응답하라 우리들의 스무 살이여!

추신. 나이에 맞지 않게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로이킴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는 <서울의 달> OST '서울, 이곳은'. 스무 살엔 미처 몰랐던 노랫말에 울컥울컥 한다. 그런데 노래를 듣다보니 노래를 부른 로이킴은 딱 봐도 서울사람이라 그가 '촌놈들의 서울 입성기'를 얼마나 이해하며 이 노래를 불렀을까 싶은데, 일찍 미국 유학을 갔으니 다르지만 같은 마음을 알겠구나 싶다.

응답하라 1994 김성균 고아라 응사 응답하라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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