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라이언 역의 산드라 블록과 맷 역의 조지 클루니

▲ <그래비티> 라이언 역의 산드라 블록과 맷 역의 조지 클루니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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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한 시작. 간단한 내레이션이 영화의 배경을 설명한다. 이를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무언가가 집중을 흩뜨린다. 폭발적인 굉음이 스크린에서부터 달려 나와 내 귀를 때려 박는다. 순간 정적, 그리고 우주로 강제 진입. 경이로운 우주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카메라의 눈은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은 채 20분간을 유영하듯 움직인다. 카메라 시선의 자유로운 이동은 내 시선이 가 닿는 것처럼 현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마치 내가 그 안에서 그들과 같이 우주복을 입고 주변을 떠도는 느낌이다. 나보다 앞서 우주 세계에 발을 디딘 이들은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 분)과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 분). 이들은 산소도, 소리도 없는 '고요의 숲'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적막을 낭만으로 포장하고 있다.

여러 목소리가 뒤죽박죽 뒤섞여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는 그 내용 파악보다 대화가 가진 본질, 그 힘을 주목하라고 일러주는 느낌이다. 무중력의 공간에서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는 그들 사이에서 '그래비티(중력)'로 치환된다. 지구에서의 중력이 사람을 지탱하는 힘이 되듯,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의 중력은 곧 사람 사이의 '인력'이다. 그래서 산소가 부족한 라이언에게 맷이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 역시 '인력 활용의 좋은 예'가 된다.

죽음과 맞닿은 곳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

 <그래비티>에서 라이언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

<그래비티>에서 라이언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20분간의 경이로운 롱테이크는 재난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끝이 난다. 롱테이크로 유려하게 표현된 우주가 영원, 고요, 낭만 등을 상징한다면 이후 재난이 시작되며 쪼개지는 컷은 평화로웠던 우주의 균열을 의미한다.

카메라는 재난에 맞설 주인공 라이언에게로 급히 시선을 옮긴다. 이때부터 위대한 우주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사투가 시작된다. 광활한 우주에서 티끌처럼 표류하는 라이언을 잡은 카메라는 다시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는 라이언을 받아주며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앵글의 크기를 바꾸다가, 라이언의 헬멧 안으로 들어가 시점 쇼트(등장인물의 시점으로 보이는 장면)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놀랍고도 존경스러운 카메라 워킹. 관객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라이언에 동화된다. 

라이언이 재난에 맞설 마지막 생존자가 된 데에는 과거의 도움(?)이 크다. 그녀는 맷과의 대화에서 딸아이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 과거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우울함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선을 바꿔 타며, 재난을 극복하려 했던 라이언이 결국에는 죽음까지 결심하게 되는 데에는 딸아이의 죽음 이후 겪었던 살아있음에 대한 무의미함, 즉 수동적으로 살아지는 삶에 대한 포기 심리가 다시금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살고는 싶지만, 이렇게 죽어도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는 마음.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메시지다. 주어진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만은 선택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살고자 발버둥 치는 인간을 두고 질문한다. 가장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간에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위기에 빠진 라이언에게 맷은 말한다. "가기로 했으면 계속 가야한다.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살아가는 거야." 참으로 긍정적이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 '그래비티'는 우주에서 필요한 에너지 혹은 돌아가고픈 지구를 소망하는 것처럼 읽힌다. 지구의 중력처럼 사람이 의지하고 살아갈 만한 무언가를 상징하듯 말이다.

완벽한 기술력으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세세한 감정

<그래비티>는 기술적인 완성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크린 속의 우주는 객석의 지구를 삼킨다. 90분 내내 무중력 상태를 유지하는 영화 속 우주의 기운은 압도적이며 매우 생생해 두렵기까지 하다. 앞서 말한 대로 나조차 그 세계 안에 속해 있는 기분이다.

전작에서도 화려한 롱테이크 기술을 선보였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대부분의 장면을 길게 찍어 냈다. 우주를 떠다니는 인물들과 같은 리듬을 만들기 위해선 흐름을 단절하는 짧은 컷의 나열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덕분에 관객은 90분을 우주에서 떠다니게 됐다. 신기하면서 어지럽고 무섭기까지 한 우주 체험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나을 수도 있다. 신기하다고 다 재밌는 것은 아니니까.

음향 기술도 놀랍다. 이 영화 속의 우주가 가장 진짜 같아 보일 때는 소리로 무중력을 표현해 낼 때다. 가히 파괴적인 음량의 점층이 순간의 정적을 만들 때, 그 정적이 주는 공포는 진짜 우주를 간접 체험케 한다. 갖가지 기술을 영화에 어떻게 활용할 때 빛나는지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비티>는 누군가에게는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도 충분한 만족을 주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가 발전된 기술을 소개하는 박람회가 아니듯, 기술의 향연만으로 이 영화를 '위대한 예술'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 이유는 영화 안에는 형식만큼 중요한 '내용'의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는 훌륭하다. 깊은 울림도 있고 진한 여운도 남는다. 하지만 이를 전달하는 과정은 세련되지 못하다. 영화는 우주 체험과 이야기에 대한 공감은 각자 다른 경로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예를 들면, 라이언과 함께 우주를 붕 떠다니는 중에 라이언의 곪은 감정까지 받아들이기는 버거운 것이다. 또, 간결한 이야기 자체에 어떤 극적 구성도 취하지 않아 단조로운 진행과 결말을 만든다.

라이언이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이 생각보다 간단해보여 상황의 위급함까지는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해, <그래비티>가 누군가에게는 '오락적 재미'를 선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모든 걸작이 오락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비티>에도 그런 한계는 존재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 JK SOUL's 필름매거진(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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