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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내가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날은 7월 14일. 바로 프랑스 대혁명 223주년 기념일이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성대한 기념식을 마친 직후였고, 차량 통행 제한을 막 해제해 행사장 의자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개선문에서 펄럭이는 삼색기 하며, 행사장의 기분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저녁은 에펠탑을 배경으로 불꽃놀이를 성대히 하고, 그것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이 쎄느강변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모든 파리 시민이 다 쏟아져 나온 듯 보였고, 진정한 의미의 축제를 즐기는 그들이 정말 보기 좋았다.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살던 것을 시민들의 힘으로 왕정을 없애고 우여곡절 끝에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다시 세운 나라 프랑스. 그리고 세계대전 후 반민족 행위자들을 모두 사회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다시 확립한 나라. 그로 인해 시민간의 연대가 뿌리내리며 사회정의가 지배하는 새 사회를 설계했고, 대숙청을 통해 민주 프랑스의 초석을 놓은 나라.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부역은 분명히 단죄가 된다는 것을 역사의 표본으로 자자손손 가르치는 나라.

이것만으로도 프랑스는 패션이나 명품 브랜드, 심지어 파리가 없이도 충분히 대단한 나라다. 난 솔직히 그들이 부러웠다.

박물관 내부 독립지사들의 사진
 박물관 내부 독립지사들의 사진
ⓒ 박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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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동안 일제에 협력해서 같은 민족을 사지에 몰아넣은 이땅의 민족반역자와 친일부역자중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한 나라. 같은 민족을 팔아 안락한 삶을 누리던 이들이 해방 후 여전히 기득권으로 남아 큰소리치고 행세하는 나라.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매국 행위를 한 자손은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며 사회지도층으로 군림하는 나라. 나는 이런 내 조국이 새삼스레 부끄러웠다.
        
지난 10월 초, 군산에 있는 근대사박물관에 갔었다. 경술국치 103주년 추념 기획전을 하고 있었다.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제호 아래, 소책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가 36년간 자행해온 강압적 식민통치의 실상과 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주인 행세를 했던 당시 일본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는 현세를 살아가나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이정표이자 스승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의 자녀들이 과거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물관 내부 매국노들의 사진
 박물관 내부 매국노들의 사진
ⓒ 박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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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시장 입구의 사진 좌우에 나와 있는 독립열사와 매국노들의 사진이 또 다른 의미로 내게는 읽히는 것이 가슴 아팠다. 좌우에 열거된 인물들 자손의 현재 사는 모습이 어떨지 자꾸만 상상됐기 때문이다.

호의호식하며 외국 유학하고 승승장구해서 지도층 행세를 하는 쪽과 제대로 된 교육도 사회적 대접도, 제대로 된 평가도 못 받고 사는 독립유공자들의 후손. '이런 역사와 현실에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해묵은 의문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아는 후배 하나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임병찬 장군'의 친손주였다. 난 당연히 살신성인 하신 훌륭한 할아버지를 뒀으니 그의 자손인 그는 국가에서 그 후손으로서 예우와 사회적 대접을 받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그를 통해서 들은 광복회(독립운동가와 그 유족의 모임)에 나오는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쉽게 예를 들어 말하자면, 유관순 열사가 만약 어린 아이를 둔 엄마였다면 그 아이는  그저 엄마 잃은 아이가 될 뿐, 국가에서 그 어떤 도움도 못 받고 방치 됐다고 생각하면 맞을 듯하다. 생계 대책은 물론 전무하고 교육의 기회조차 못 갖는다는 의미다. 내 가족과 일신의 영달보다 나라를 위해 몸바친 부모 때문에 이 사회에서 무학자나 고아로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일 뿐.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망한다, 절대로 정의 같은 것 따지지 말고 나라를 팔아먹더라도 힘 있는 편에 붙어 네 식솔을 지켜라'고 가르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군산 근대사 박물관 전경
 군산 근대사 박물관 전경
ⓒ 박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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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열린 초록 시민강좌는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됐다. 요즘의 우울한 상황을 반영하듯 '역사 없는 시대의 위기'라는 강의의 분위기는 진지하다 못해 우울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삼웅 선생의 말씀 중 이 말이 가장 아프게 들렸다.

"근대에 들어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잘못된 일은 반민특위가 이승만의 세력에 의해 짓밟힌 일입니다. 민족정기를 세우고 역사 청산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된 일이지요."

한 수강생이 "요즘에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갑갑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구체적으로 더 갑갑합니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역사에서 봐 왔듯이 '민중의 힘과 하늘의 이치'를 믿는다"며 희망을 강조하시는 선생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울한 마음이 가시거나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여전히 내겐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내 아이들에게 "사람이 잘못을 하면 요즘은 당대에 받는다, 절대로 그릇된 쪽은 바라보지도 말아라, 늘 정의롭게 살고 시류에 편승해서 양심을 파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마라, 불의를 보면 그냥 넘기지 마라, 우리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더냐?"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을 때가 내 생애 오긴 올 것인가.

"역사란 과거를 배워서 현재를 바르게 비춰보고 미래의 좌표로 삼기 위해서다."

중학교 2학년 역사수업 첫 시간에 배운 내용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비춰보고 우리의 좌표로 삼을 것인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쌀쌀한 밤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참 무거웠다.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체포당한 안중근 의사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체포당한 안중근 의사
ⓒ 박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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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초록시민강좌, #김삼웅, #역사교육, #친일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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