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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루의 안내 표지판
 남극루의 안내 표지판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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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시티로 지정된 담양 삼지내 마을의 남극루에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의 안내 표지판에는 "… 현재 남극루에는 현판은 물론 문기, 중수기 등 아무런 현판도 걸려있지 않으나 걸려있던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특히 2층 난간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아름답다…"라고 적혀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그 문양을 발견하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의미심장한 모종의 메시지가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다는 웹 공간에서 그에 대한 한 토막의 글이나 단서를 찾으려 해봤지만 단 한 줄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떤 역사적 근거나 흔적을 토대로 삼지 못하고 혼자만의 이야기를 꾸며보게 됐습니다. 아직도 손때 묻지 않고 처음 그대로처럼 살아있는 그 조각의 훼손을 심히 우려하는 마음과 함께 당시 목수님들의 숭고한 뜻을 전해 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 기자말

뒤로 보이는 마을이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삼지내 마을이다.
▲ 정면에서 본 남극루 뒤로 보이는 마을이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삼지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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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루는 1830년대에 현재 창평면사무소, 즉 옛 창평 동헌 자리에 지어졌다. 현재의 자리로 이설된 것은 1919년이라고 하는데 이 해는 항일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때다. 이 건물을 자세히 보면 다른 것들과는 달리 아래, 위층의 비율이 어색하고 화반이 둥근 모양으로 돼 있다. 또한 화반의 주위에는 하얀 회칠을 하여 이 화반을 일부러 돋보이게 하려는 듯한 분위기도 엿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누각이 처음 지어질 때와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이설될 때의 모습은 과연 같은 것일까? 왜 아무런 편액이나 현판도 걸려있지 않은 것일까?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이 생겨난다.

보통의 누정 건축물과는 달리 아랫 부분이 더 길다.
▲ 좌측면에서 본 남극루 보통의 누정 건축물과는 달리 아랫 부분이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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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원 안이 문제의 호랑이 문양을 한 화반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 자리에 현판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 호랑이 문양의 화반 위치 붉은 원 안이 문제의 호랑이 문양을 한 화반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 자리에 현판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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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을 멀리서 보면 마치 여러 장의 일장기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하얀 바탕의 둥근 화반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문제의 화반이 1919년에 이설될 때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단서는 상하 기둥의 현격한 길이 차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누각이나 정자는 상부의 기둥, 누상주가 길고 하부의 기둥, 즉 누하주의 길이가 짧다. 한옥이 가분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데서 비롯된 말이다. 처마 끝 선에서 기둥 끝의 각도가 보통 30도 내외를 이뤄 상부인 지붕이 하부에 비해 훨씬 큰 것이 우리 한옥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누상주의 길이가 1950mm, 누하주의 길이가 2700mm다. 일반의 경우와 반대로 돼 있을 뿐 아니라 길이도 훨씬 차이가 난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끼어 넣는 화반은 보통 옆으로 누운 타원형으로 그 높이가 짧다. 이 경우는 정원(正圓)이어야 하므로 그 사이의 거리가 높을 수밖에 없어 대신 누상주를 그만큼 잘라낸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악귀를 쫓는다고 알려진 호문 또는 귀문의 화반, 10개의 화반 중 유일한 호문화반이다.
▲ 호문 또는 귀문 화반 악귀를 쫓는다고 알려진 호문 또는 귀문의 화반, 10개의 화반 중 유일한 호문화반이다.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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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가면 전등사가 있다. 그 건물의 네 귀에는 추녀라는 부재가 있고 이 추녀 아래에는 발가벗은 여자가 힘겹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한 유명한 나녀상이 있다. 추녀는 대들보와 함께 한옥에서 가장 무겁고 큰 부재다. 전등사 안내표지판에 소개된 것처럼 도망간 여인을 향한 도편수의 억하심정이 이 추녀 밑의 나녀상을 조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여기 남극루에도 어쩌면 비슷한 심정을 표현한 듯 한 하나의 조각품이 있다.  

호문(虎紋) 또는 귀문(鬼紋) 모양을 한 화반이 그것인데 정면과 후면에 세 개씩, 측면에 두 개씩, 모두 열 개의 화반이 있다. 사면을 빙 둘러 모든 화반에 이 문양을 조각하지 않고 오직 남쪽 중앙에 위치한 화반만 이 문양으로 돼 있다. 지금껏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고 나뭇결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무늬를 더해 엊그제 조각해 놓은 양 아직도 선명하다. 100년 전에 소중한 마음으로 제작된 조각품이 이 글로 인해 훼손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전등사에서처럼 모든 면에 문양을 새겨넣지 않고 왜 남쪽 중앙에만 딱 하나를 조각해 넣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남극루의 현판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건물의 명칭을 새긴 현판은 통상 건물 바깥쪽의 중앙에 자리하게 된다. 이 경우는 호문 화반 바로 앞에 현판이 위치하게 되는데 버젓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현판으로 인해 뒤로 숨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나뭇결과 더불어 조각이 살아있는 듯하다.
▲ 확대한 호문 나뭇결과 더불어 조각이 살아있는 듯하다.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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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의 나녀상과 남극루의 호문은 당연히 도목수의 의지가 다 같이 반영된 조각품이지만 하나는 버젓이 공개된 장소에서 자유롭게 놓여져 있고 또 하나는 현판 뒤에 숨겨져 있다. 이 것은 도목수 또는 그 팀들의 의지를 바깥세상 몰래 표출할 수밖에 없던 저간의 숨은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귀하게 새긴 조각품을 현판 뒤에 숨길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이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일제에 대한 항변의 심리였을 것이다.  

1830년대에 처음 지을 때 남극루에는 여느 건물처럼 현판이 있었고 그 위치는 바로 이 호문 앞이며 1919년 항일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 던 때 건물을 이설하면서 당시 일본인들이 직접 지시했거나 아니면 친일 인사들의 아부심의 발로로 없던 둥근 화반을 넣게됐을 것이라 생각된다. 힘없는 목수들은 울며겨자먹기로 일장기를 상징하는 원형 화반을 새로 제작하는 대신 그 중 하나를 택해 나머지 아홉 개 화반을 물리치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솜씨있는 목수를 시켜 호랑이 문양을 몰래 조각해 넣었을 것이다. 마침내 해방이 되자 일본을 물리치게 된 그들만의 호문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한 걸음에 달려가 일제를 뜯어내듯이 남극루 현판을 그렇게 뜯어냈을 것이다.


태그:#남극루, #화반, #호문, #삼지내,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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