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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원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표.
 김학원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표.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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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판계 주요 뉴스 가운데 하나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아래 <조조록>)의 완간이다. 10년에 걸쳐 이 책을 펴낸 곳이 휴머니스트다. 2001년에 창립해 올해로 13년째를 맞은, 인문 분야에선 이름난 출판사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이 펴낸 <살아있는 교과서> 시리즈,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등 역사·예술 분야의 스테디셀러와 수익금 전액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에게 기부한 공지영의 <의자놀이> 등을 펴냈다.

휴머니스트는 초기부터 눈길을 끌었다. 창립 때부터 인문·역사·청소년·어린이·교양만화 등 분야별 책임편집자 제도를 도입했다. 전문 편집장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였다. 저자와 출판사 간 인세 논쟁이 종종 벌어지고 있을 때 휴머니스트는 책 판권에 발행부수를 '자발적으로' 공개했다. 10여 년 전부터 편집 실명제와 출판 ABC제도(부수공개)를 도입하는 등 출판계는 물론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이 가운데 발행부수는 책 종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실무적인 어려움 때문에 지금은 표기하지 않는다).

최근 휴머니스트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기존 출판물과 저자 네트워크를 씨줄날줄 엮어 새로운 가치의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홍대 부근 새 사옥에 마련된 문화공간 HU(Humanist University)에서 서중석 전 교수가 6강 규모의 '질문하는 한국 현대사' 강좌를 진행한다. 일회성 저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인문 교양강좌다. <조조록> 완간 이후에는 저자인 박시백 화백이 직접 출연하는 팟캐스트를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꾸미고 실행하는 이가 김학원(51)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표다. 그는 단순한 출판사 CEO가 아니다. 편집자이자 저자,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팟캐스트 기획·진행자 등 시기별로 복수의 역할을 수행하는 '멀티 플레이어'. 흔히 말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지난 9월 30일 오후, 휴머니스트 1층 카페에서 김학원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부담스럽지 않다"

먼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출판에 뛰어든 계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1990년대 초반 전국노동단체연합 기관지 <노동전선> 편집장을 하면서 쌓인 빚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넘어왔고, 수천만 원의 빚을 대신 갚아준 새길 출판사에 들어가서 출판기획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인문사회 분야 대중서를 기획하면서 만난 이들이 '미학'의 진중권, '철학'의 이진경, '역사'의 남경태였다. 이들은 지금도 휴머니스트의 주요 저자다. 비슷한 시기, 창비에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사계절에선 위기철의 <반갑다 논리야> 시리즈가 나왔다.

그는 새길 출판사 편집주간이 되면서 진지하게 출판을 고민했다. 외국의 출판 동향을 공부하면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처음으로 출판기획을 강의했다. 1994년 푸른숲 출판사로 옮긴 뒤 업계 최고 대우를 받으며 잘 나가던 차에, 2000년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모아놓았던 유학 자금을 몽땅 날렸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고민 끝에 그는 직접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2001년 3월 정신적 지주였던 유재현 대표가 운영하던 소나무 출판사 사무실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해 '창업 계획'에 돌입했다.

지난 9월 30일 오후, 휴머니스트 1층 카페에서 김학원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9월 30일 오후, 휴머니스트 1층 카페에서 김학원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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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출판사 이름으로는 낯선, '휴머니스트'를 선택한 까닭은?
"새길 출판사에서 일할 때 써놨던 '창업 계획서' 파일이 생각났어요. '내가 출판사를 차린다면…'이라는. 메모 수준이었는데, 거기에 출판사 이름이 가칭 휴머니스트로 돼 있더군요. 주변 사람들은 다들 무겁다고 했는데, 그대로 쓴 겁니다. 1년 동안은 책을 내는 것보다 출판기업이 가져야 할 상식과 원칙, 방향, 유통 정책 등에 대해 주로 고민했어요."

- 지금도 김 대표에겐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부담스럽지 않나요?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꼬리표가 붙든 안 붙든 간에, 그 시대를 경험하고 얻었던 가치는 평생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에 출판의 길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어요. 출판은 다른 분야와 달리 비주류 가치가 주목받습니다. 그런 가치가 비즈니스와 결합된 게 출판이죠. 시장의 논리에 반하는 이야기와 메시지가 스테디셀러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런 비주류의 가치는 정치가 아닌 문화의 영역이라서 이념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수용성이 강하죠."

- 휴머니스트만의 차별성 있는 출판 원칙과 철학이 있다면?
"우리의 슬로건은 '가치있는 삶의 동반자'입니다. 휴머니스트가 고민하는 출판 원칙과 철학은 첫째, 인문 중심의 지식 컨텐츠. 어린이 책이건 역사 책이건 간에 인문을 바탕으로 합니다. 둘째, 국내 저자 중심입니다. 셋째,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지식 생태계에 대해 고민합니다. 단순히 책을 내고 마는 게 아니라, 저자 그룹인 교사단체를 지원하거나 해당 주제의 강좌로 연결하는 사회적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출간 기준? "무엇보다 머리말이 훌륭해야 한다"

김 대표는 애초 10년 동안 1000종의 책을 펴내는 게 목표였다. 출판사를 차린 지 13년, 현재까지 출간된 책은 600여 종. 이 가운데 역사서가 1/3 가량. 2015년쯤 되면 1000종이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독자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휴머니스트가 지금까지 펴낸 책 가운데 300종 가량은 매년 한 쇄 이상 찍는 스테디셀러고, 절판된 책은 2% 정도에 불과하다.

<살아있는 교과서> 시리즈는 100만 부를 돌파했고, 내년이면 발간 20주년을 맞이하는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도 50만 부 이상 나갔다. 초창기에 펴낸 도정일-최재천의 <대담>도 10만 부를 넘어섰다. 휴머니스트의 인문서들이 안착하자, 최근에는 휴먼 아트와 휴먼 사이언스라는 브랜드를 통해 예술과 과학으로 출판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좋은 책이 되려면 무엇보다 머리말이 훌륭해야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왜 쓰는가', 편집자는 '이 책을 왜 내는가'라는. 탄생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책이 되려면 무엇보다 머리말이 훌륭해야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왜 쓰는가', 편집자는 '이 책을 왜 내는가'라는. 탄생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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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스트에서 김 대표가 직접 편집자로 참여했던 책은 무엇인가요?
"초기 책들인데요. 도정일-최재천의 <대담>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등은 제가 책임 편집을 맡았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전문연구원으로 유학하다 2009년에 돌아온 뒤로는 특별 프로젝트에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나 <의자놀이> 같은 사회적인 의제와 관련된 책입니다."

- 발행인으로서 '아깝다, 이 책'을 꼽는다면?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와 <살아있는 지리 교과서>가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교과서> 시리즈를 만들면서 생긴 노하우도 있고, 공도 많이 들인 차세대 교과서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책이거든요. 마케팅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내용에 비해 저평가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출판기획에 대한 '촉'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책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원고가 좋아야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머리말이 훌륭해야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왜 쓰는가', 편집자는 '이 책을 왜 내는가'라는. 탄생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미학오디세이>를 예로 들면, 미학자로서 미학으로 세상과 사물을 본다는 게 어떤 맛이고, 어떤 눈인가? 집필 동기가 분명해야 합니다.

(훌륭한 머리말은 원고를) 쉽고 재밌게 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휴머니스트는 저자에게 재밌게 써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책 내용이 어려워) 진도가 안 나간다고 해도 다시한번 들여다보고 곱씹으면 의미있는 책, 그래야 꾸준하게 독자들이 찾습니다. 문제의식이 담겨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라면 독자들과 교감이 생겨납니다. 오히려 시의성은 거둬내려고 합니다. 내년에도, 3년 후에도 (읽힐 수 있는) 가치있는 책인가가 중요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상상도 못했던 일"

휴머니스트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하게 된 것도, 되돌아보면 묘한 인연이 작용했다. 박시백 화백은 조선 정치사를 만화로 그리겠다고 결심하고 <한겨레>를 그만 뒀다. 그리고는 공부와 자료조사, 콘티 구성, 그림 작업에 매달리며 견본 작품을 만들었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백무현 화백이 중간다리를 놓아준 곳이 휴머니스트였다.

- 박시백 화백의 견본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경이로웠습니다. 이건 무조건 (출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독특했어요. 출판은 세월이 자산인데, (책이 완간되면) 어느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박 화백은 계약조건보다도 '책 내용은 자신한다, 끝까지 나왔으면 좋겠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강했던 거죠.

<한겨레> 만평의 정점에서 그만두고, 3년 동안 공부해서 만들어온 거였잖아요. 견본 작품이 <조조록> 1권 '개국'편이었는데, 역사를 대하는 눈과 힘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만든다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완성도 높은 견본 작품을 보면서 흥분됐습니다. '이건 7년 후, 10년 후 완간되면 휴머니스트의 전기를 마련해줄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나 서양 철학·미술사 등으로 확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나 서양 철학·미술사 등으로 확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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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록>이 언제부터 인기를 끌었나요?
"휴머니스트도 만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메이플스토리> <마법천자문> 같은 학습만화 코너에 깔았는데 반응이 적었어요. 5권이 나왔을 때부터는 역사 책 코너로 분야를 옮겼죠. 그때부터 반응이 올라왔고, 7·8권쯤 되자 탄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0권 발간 기자회견 때에는 언론 반응도 뜨거웠고, (한 달 안에 구매하는) 대기독자도 꾸준히 늘어 5000명 이상됐습니다. 완간되기 전까지 70만 부, 완간되고 나서 두달 여 동안 20만 부가 넘게 나갔습니다. 11월쯤이면 100만 부를 돌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년에는 영어·일어판 등 해외 출간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 최근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됐습니다. 거기에다 <조조록> 완간까지 맞물렸습니다. 역사 책 비중이 높은 휴머니스트는 호황이 아닌가요?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플러스 알파로 작용할 겁니다. '한국사 수능 필수'는 역사 교과서 이념 논쟁 등 정치적인 전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파행적인 충돌도 예상되지만, 휴머니스트에서는 그동안 '정치적인 전선'을 넘는 기획을 해왔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중·장기적으로 휴머니스트에 플러스 효과를 주겠죠."

또다른 꿈? "저자 도서관장이 되고 싶습니다"

- 아직까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국한되긴 했지만, 현재 팟캐스트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팟캐스트를 직접 운영하게 된 까닭은?
"<조조록> 완간 즈음에 프로젝트팀을 구성했습니다. 이런저런 논의를 하던 차에 위원석 편집주간이 팟캐스트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겁니다. 왕조별로 밀도있게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오디오 아카이브가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죠. 저자인 박시백 화백과 한국사 전공 교수, 남경태씨와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 <조조록> 팟캐스트는 몇 회까지 할 건지, 다른 주제의 팟캐스트도 계획하고 있는지?
"<조조록>은 전체 40~50회 정도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 조선시대 문화사와 같은 번외 편이 들어갈 겁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왕은 어떤 음식을 먹었나? 조선시대 주요 저작들은 무엇인가? 역사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주는 내용들이죠. 그런 번외 편까지 합치면 70~80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조록> 외에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나 서양 철학·미술사 등도 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래서 녹음 스튜디오도 만들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 대표에게 물었다. '김학원은 10년 후 어떤 모습일 것 같냐'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휴머니스트가 존속했으면 좋겠고, 나도 휴머니스트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됐으면 좋겠다"고. 대표다운 답변이다. '출판 말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고 다시금 물었다. 그러자,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저자 도서관'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책만 있고 사람이 없는 기존 도서관과는 다른, 저작의 탄생 과정이 보여지는 곳이죠. 거기에는 박시백·공지영·조정래 같은 작가의 방이 있습니다. 훌륭한 저자를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자산으로 만들려면 사후 문학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활발하게 독자들과 문화적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당대의 저자 100명이 모여 있는 곳, 거기서 저자가 직접 글도 쓰고 독자들과 만나는 곳, 독자도 자기가 좋아하는 저자의 자리에 앉아 글을 써볼 수 있는 곳. 그런 저자 도서관의 관장이 되고 싶습니다."

'출판 말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저자 도서관'이다.
 '출판 말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저자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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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학원, #휴머니스트, #조선왕조실록, #팟캐스트, #저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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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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