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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좌파'란 무엇인가?

목수정 작가.
 목수정 작가.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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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로 산다는 것, 아니 좌파란 대체 뭘까? 이 질문이 내 속으로 파고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8년 서울을 떠나 파리로 돌아올 무렵이다. 국회와 당사를 오가며 4년간 서울 생활을 한 직후이기도 했다. 그 4년 동안, 소위 좌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드넓은 스펙트럼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요동치는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소위 한국 좌파들의 공통점은 '매우 격렬하게' 좌파 노릇을 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좌파로서의 일상이 격렬한 만큼, 어느 한 순간 좌파 되기를 내려놓고, 다른 길로 홀연히 떠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굵은 것은 짧기 마련인 것인지. 그것은 마치, 한때 열렬히 연애라는 열병에 빠졌다가 슬그머니 연애가 긁어놓은 생채기를 털어내고 밋밋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거나, 목숨 걸고 종교에 심신을 바치다가 미련 없이 절연한 삶으로 접어드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20대에 좌파였던 이들을 40대에 만났을 때, 여전히 좌파인 채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은 20%도 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끈을 놓는 순간 그들은 걷잡을 수 없이 다른 논리와 가치 속에 휩쓸려 가버렸다. 마치 제 인생에서 감당해야 할 할당량의 좌파 노릇이라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2008년 프랑스로 돌아와 나의 좌파에 대한 의문을 그대로 이 사회에 투사했을 때, 이들에게선 조금 다른 그림이 나왔다. 모든 시대의 유행이 한 시기에 공존하는 듯한 이 사회의 특성처럼, 여기엔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흘러가는 스펙트럼 대신 수십, 수백 가지 저마다의 오색찬란한 색깔의 좌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마오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레닌주의자·아나키스트 그룹·반신주의자…. 예전에 없어진 줄 알았던 구닥다리 이념정당에서부터 최신 버전의 전위적인 좌파들이 제멋대로, 그러나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했다. 어지간하면 이들의 지향은 큰 이변 없이 완만하게 삶의 굴곡을 함께 동반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도 포착되었다(물론, 나이가 들어가면, 이쪽이나 저쪽 모두 강도가 느슨해진다는 공통점은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마땅히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할 행동들이, 버젓이 전위적인 좌파의 행동양식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질문은 폭발하고 만다. 대체 좌파가 뭐란 말인가? 그것은 리영희 선생의 말처럼 과연 사회를 지탱하는 한쪽의 날개인가? 아니면, 각자의 인간이 취하는 하나의 선택 가능한 삶의 가치인가? 야만의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선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어주어야만 하는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태도인가?

그래서 난 묻기로 했다. 한 명의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수십 명의 내 주변에 존재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좌파들에게. 대체 좌파란, 당신들에게 좌파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더불어 10년째 발 딛고 있는 이 파리라는 공간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가진 필터를 빌려, 이들이 전망하는 미래와 이들이 들이마시는 오늘, 아파하거나 그리워하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호흡하고 싶은 소심한 야심도 있음을 숨기지 않겠다.

지난 9월의 토요일 낮, 파리 19구 스탈린그라드 역을 나섰다. 소련이 러시아가 되면서, 스탈린그라드는 옛 이름인 페테르부르그를 되찾았지만,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이 동네의 지하철명은 여전히 소련 시절의 명칭을 숙명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마르크스, 레닌 등이 지명으로 자주 등장하면 그 동네는 좌파 동네, 마을 한가운데 드골 광장이 있다면 그 동네는 전통적인 우파 동네다. 심지어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이름은 루이16세를 단두대로 보낸 주역, 로베스피에르. 이 동네 사람들은 그 이름을 쟁취하기 위해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집회와 시위를 불사하기도 했다).

이 동네에 '파리의 생활좌파'의 첫 인터뷰이가 산다. '파리의 생활좌파 인터뷰'라는 프로젝트를 처음 떠오르게 했던 주인공, 루이즈 포르. 그녀의 단호한 삶의 역정. 예민함과 포근함, 모순되는 듯한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지니고 있는 단단하고 작은 몸. 그 속에 스며 있는 지혜와 열정. 정치적 신념을 향해 맹렬히 끓어오르나, 결코 흥분으로 허우적대는 법 없던 태도를 만들어준 그녀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처음 루이즈를 알았을 때, 그녀는 페미니스트운동 그룹에 속해 있던 시네아스트(cinéaste)였다. 한동안 소식을 못 듣고 지내다가 3년 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난데없이 한의사가 돼 있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물었다. 처음 만난 사이처럼.

"몇 년생이죠?"
"52년 용띠."

순간 한국에서 연극연출가로 일하던 당시 만났던 무지하게 드센 두 명의 1952년생 용띠 남자 작가들이 떠올랐다. 그후 자신을 '52년 용띠'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다. 전쟁 한복판에 태어났던 두 사내들과 달리 이 프랑스 여성의 삶은 아프리카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시작되었다.

마다가스카르의 태양 아래서 보낸 유년

루이즈 포르는 한의사, 다큐영화감독이자 에콜로지스트, 페미니스트다.
 루이즈 포르는 한의사, 다큐영화감독이자 에콜로지스트, 페미니스트다.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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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르. 1896년부터 프랑스령이었던 그곳에서 군인이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루이즈는 태어났다. 그 넉넉한 태양 아래, 1년 내내 풍성하게 익어가던 향긋한 과일들, 그 어떤 인종적 편견이나 갈등도 모른 채 함께 재잘거리던 친구들, 너그럽던 이웃들 사이에서 나른하고 평화롭게 8년간의 황금빛 유년기가 흘러갔다.

아버지가 군인이었지만, 딱히 전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갈등이 군인의 삶을 긴장시킬 일도 없던 터라 평화의 시간들이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한 건, 1960년 알제리-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은 모두의 발목을 잡고 수렁으로 직진한다.

아버지는 전장에 배치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된다. 아버지가 알제리로 떠나시고 어머니와 아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보르도였다.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악명 높은 무역항. 포도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전형적인 부르주와 도시에서, 루이즈는 처음으로 균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날씨는 훨씬 차가웠고, 사람들은 더욱 더 차가웠다. 어머니도 아이들도, 심지어는 전장에 나가있던 아버지도 갑자기 불행에 사로잡혔다. 군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이 폭력적인 전쟁을 참을 수도, 알제리인들을 짐승 취급하는 프랑스군의 오만을 견딜 수도 없어, 전쟁 중에 퇴역을 신청한다. 다행히 그 청이 받아들여져 전쟁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턴 생활고라는 또 다른 복병이 가족을 엄습했다.

중학생이 된 루이즈는 공립 여자기숙학교에 보내졌다. 학교는 그녀가 일찍이 알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다뤘다. 손목시계를 차는 것도, 선생님 앞에서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멀쩡히 눈 뜨고 선생님을 도전적으로 쳐다보는 것도 금지였다(과연 이 시기의 프랑스는 피 끓는 젊은이들의 혁명을 부르는 사회였다). 그 숨 막히는 학교의 억압은 루이즈로 하여금 제어할 수 없는 저항심을 즉각 불러일으킨다. 학업성적은 우수하지만, 너무도 반항적인 당신들의 딸을 더 이상 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며, 학교는 그녀를 1년 만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곤 늘 같은 이유로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질풍노도와 68혁명이 만났을 때

이미 문제아의 전선에 전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던 그녀가 68혁명의 불꽃에 감전되었을 때 그녀는 15세였다. 오빠와 함께 남매는 가두에 나서서 매일 열정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이 분노하던 이 부르주아 도시. 자신의 친구들이던 흑인들을 데려다 노예로 팔아먹고, 그들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걷어차며, 욕을 하던 이 오만한 프랑스, 시민지를 개척하고, 원주민들의 피를 빨며, 전쟁이나 할 줄 아는 제국주의 프랑스를 맘껏 저주하고, 깨부쉈다. 슈퍼마켓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카트에 담으시오. 그리고 돈 내지 말고 이곳을 떠나시오'라는 피켓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선동하며 흥청대는 자본주의에 저항했다.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았고, 책상과 걸상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교실에서는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들은 마오를 공부하고, 헤겔·마르크스 같은 유물론 철학자들과 빌헬름 라이히 같은 성정치학자, 기 드보르·보리스 비앙 등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토론했다. 학교가 허락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해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소비지상주의의 세상. 권위와 자본으로 마비되기 시작한 프랑스를 젊은 세대들은 마구 난타했다.

그러나 68의 흥분 속에, 그토록 열렬하고 신실하던 정치적 동기만이 존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간만에 벌어진 이 축제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데만 열중하던 이들도 많았다. 그 뜨거운 시간들이 지나자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 그 수많은 68세대들의 허무에 대해 말하는 동안 그녀의 눈빛은 잠시 매서워졌다.

역사의 바퀴가 굴러갈 때, 진정으로 진심으로 그 바퀴에 몸을 부딪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68은 단지 68년에만 일어나고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었다. 68년 5월에 점화되었으나, 70년대 중후반까지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지치지 않고 그 불길을 이어가며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던 10년여에 걸친 긴 투쟁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루이즈는 학생대표가 되었고, 그녀는 당시의 정치적 정황 속에서 동맹 휴업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49대 51로 휴업이 부결된다. 부결? 하지만 동맹휴업을 강행했다. 역사선생님이 루이즈와 그 동지들을 나무랐다. "너희들의 결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아. 왜 투표결과를 무시하는 거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맹점에 처음으로 부딪히고 만다. "민주주의가 이토록 어리석은 거라면, 우린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아. 우린 혁명을 하겠어!" 루이즈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거리에서 대치하던 신·구세대 간의 갈등이 가정 안에선 없었겠는가. 루이즈는 가정 내에서 벌어졌던 68의 격렬한 전쟁을 토로한다. 오빠와 루이즈는 세상에 대한 모든 증오를 그대로 부모들에게 쏟아냈다. 왜 하필 아버지는 군인 따위의 직업을 가졌던 거며, 어머니는 왜 그토록 무력하게 아버지 밑에 종속되어 사는 건지를. 왜! 왜! 왜!

담배를 피우고, 학교 파업을 주도하고, 옷은 히피처럼 입고 다니며, 가슴은 분노로 가득 찬 딸을 감당하지 못하던 아버지는 급기야 폭력을 행사했고, 그것으로 둘 사이는 영영 멀어지게 된다. 딸의 경멸과 자신이 휘두른 폭력의 충격으로 아버지는 병을 얻었고, 죽는 날까지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해도 타협도 할 줄 모르고 오로지 이글거리며 타오르기만 했던 분노의 불길을 다스리기에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너무도 연약했다.

촉발되기 시작한 가정 내에서의 분노, 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 가슴 속 모두에 파고들어가 그들의 가슴을 난타했다. 루이즈의 한 친구는 자신이 시작했지만, 가족을 멍들이기 시작한 폭력적인 분위기에 스스로 질식되어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에 대한 남매의 공격이 반드시 정당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그녀는 토로한다. 그들은 단지 가정 내에서 기성세대를 대표한다는 그 피할 수 없는 죄목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헤테로의 지루한 삶을 거부하기 위해 호모로 살 것을 선언

그 즈음 루이즈는 자신은 결코 이 고루한 세상에 젖어드는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없다고 결심하면서, 헤테로(hetero)이기를 거부하고 동성애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 어떤 동성애자로서의 경험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정치적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동성애자로 살아왔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처음 찾아간 정치 그룹은 동성애자들의 그룹이었다. 거기엔 온통 남자들뿐이었다. 그곳을 떠날 것을 결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찾아갔던 그룹은 여성해방운동 모임(MLF: 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이었다. 비로소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분노들이 함께 나누는 지성과 지혜라는 출구를 타고 해방되는 세상을 거기서 발견했다. 각자 자신들이 경험했던 사례들을 토로하고, 그것들을 이론화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통로들을 마련해나가기 위한 모의들을 해나갔다. 그리고 여성해방운동 모임은 앙투아네트 푸크(Antoinette Fouque)라는 정신분석학자의 주도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출판사 설립으로 이어진다. 루이즈는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출판사의 활동에 참여한다. 대학원에 진학해 교사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는 파리로 올라오고,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둘 다를 놓아버렸다. 중·고 시절 겪었던 학교의 악몽이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했고, 출판사에서 주간지를 발간하게 되면서 빚어진 갈등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이후 루이즈는 그 흔한 방황과 혼돈의 20대로 몸을 휘감는다. 비서·안내데스크·교환원 등의 일자리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삶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다가 "너의 재능을 소모하지 마"라며 손을 내밀어 준 한 연극배우 덕에 한 극장의 홍보담당자가 되고, 이후 연극과 영화계에 진입한다.

2010년 몬트리올국제예술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루이즈 포르의 영화 <니키드 생팔과 장 팅글리> 포스터.
 2010년 몬트리올국제예술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루이즈 포르의 영화 <니키드 생팔과 장 팅글리> 포스터.
ⓒ 루이즈 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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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뤼미에르 영화학교에 입학한 만학도

바로 그 시기, 영화와 카메라의 매혹을 맛보았다. 한 파티장에서 처음 카메라를 잡고, 그날의 파티를 카메라에 담았던 것이 시작이다. 지인들은 앞 다투어 그녀에게 압도적인 재능이 있음을 일깨워주었고, 서른의 나이에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 영화학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루이 뤼미에르는 세계 영화학도의 꿈이라 불리는 영화분야에서의 그랑제꼴이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수학이라곤 나누기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완전히 담쌓고 살아왔다. 그때까진 탁월한 인문학적 재능으로 바칼로레아를 비롯한 관문들을 넘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라고 하는, 손에 잡힐 듯한 신세계의 입구에 수학은 엄청난 장애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이를 악물고 준비했고, 서른이란 나이에 합격을 거머쥔다. 그녀가 쓴 탁월한 시나리오가 놀라운 힘을 발휘했던 것. 3년간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거쳤고, 영상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졸업 직후 이탈리아의 비디오 아티스트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비디오 작업에서, 그리고 텔레비전과 기업 영화 등의 분야에서 카메라감독으로 탄탄한 길을 닦았다.

틈틈이 자신의 이름을 건 다큐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시네아스트로서 그녀의 이름을 처음을 알려준 영화는 <비밀스런 감염>(원제: Une contamination secrète)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것처럼 선전되어왔지만, 여성이 가장 직접적인 희생자였던, 에이즈의 폐해를 다룬 영화로 프랑스 전역에서 널리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에이즈로부터 여성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미 상용화되어 있는 여성 전용 콘돔이 제시되고, 그 구체적인 사용방법들까지 자세히 다룬다. 이렇게 정력적인 페미니스트 활동가, 다큐영화감독이자 잘나가는 촬영감독으로 살아오던 그녀의 인생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충격들이 몰아닥쳤다.

체첸반군 모스크바 인질사건, 인생을 바꿔놓다

그것은 2002년, 모스크바의 한 공연장을 점령한 체첸반군 인질사건이었다. 인질극 4일 만에 독가스를 극장 내부로 살포하여, 체첸독립군은 물론 안에 있던 인질들까지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이 소름끼치는 사건을 우린 기억한다.

루이즈는 이제 비로소 전 세계가 체첸의 절규를 들어주리라 기대했다. 모스크바 극장에 침입한 체첸 독립군의 상당수는 러시아 침략으로 남편을 잃은 체첸의 전쟁 과부들이었다. 8년간에 걸친 러시아의 침략으로 15만 명이 죽어갔던 체첸. 체첸독립군은 절망감에 가득 차, 죽기를 각오하고 적국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협상을 벌이기 위해 극장의 관객들을 인질로 잡았던 것이다. 테러를 정당화할 순 없지만, 적어도 왜 이들이 이토록 극한 모험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론이 말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흘 뒤 극장에는 독가스가 살포되고, 체첸반군은 인질들과 함께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루이즈는 절망에 몸을 떨었다. 언론은 체첸반군의 잔혹한 인질극을 토로할 뿐이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우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세상의 끝을 그녀는 그 사건에서 보았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살이었다. 지병이 악화를 거듭하여,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오빠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주었다. 아버지의 병을 촉발시켰던 것은 남매가 아버지에게 준 상처였다는 사실을 오빠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책이 오빠에게 암을 촉발시켰고, 오빠도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체첸반군의 인질극에서 오빠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이 일련의 사건은 루이즈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을 주문했다. 목숨을 건 그 어떤 투쟁도 단 하나의 진실된 목소리를 전하지 못하는 이 꽉 막힌 세상. 서로를 아프게 상처 내며 치열하게 싸웠던 끝에 성급한 죽음을 서로에게 선사하고 만 세월에 대한 후회가 가슴을 찔렀다.

모든 형태의 폭력을 깡그리 몰아내는 제의를 치러야만 했다. 너무 멀리 있을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오늘을 괴롭게 다그치기보다,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손으로 지금 직접 만질 수 있으며,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일, 그 어떤 위대한 실천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는 무엇을 행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더 살 수 없었다.

스톡홀름에서 영화 촬영 중인 루이즈 포르.
 스톡홀름에서 영화 촬영 중인 루이즈 포르.
ⓒ 루이즈 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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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개의 약초 앞에서 눈물을 떨구고

그녀가 찾아낸 것은 의학이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행위는 없다고 믿었다. 아빠와 오빠를 통해 서양의학이 얼마나 무지한 논리로 사람의 몸을 구획에 가두어 치료하며, 치료라는 명목으로 아픈 사람을 더 큰 고통으로 밀어넣는지를 보았던 탓에 루이즈는 한의학을 배우기로 했다.

파리에 있는 한의학 학교에 등록하여 자신이 앞으로 배워야 할 600가지 약초의 이름들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몇 년간 그녀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그 순간 직시했기 때문이다. 루이 뤼미에르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때 이후 잡지 않았던 수학을 다시 잡았던 그때처럼, 그녀는 의사가 되기 위해 완전히 낯선 세계에 불쑥 들어섰다. 일단 한의학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고 나선, 한의학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대하는 태도. 그것이 펼쳐 보이는 세계관에 압도당한다. 그리고 다섯 살 때, 처음으로 꾸었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단 사실을 기억해낸다.

한의학에서, 인간의 정신과 환경과 육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몸 안에서 음과 양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은 해가 뜨고 달이 지며, 별이 움직이고, 구름이 떠가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그 원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람의 맥을 짚으며 그 사람을 진단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쉰이었다. 8년 뒤에야 비로소 한의사 자격을 얻었지만, 56세 때부터 주변의 지인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5년째 그녀는 한의사로, 그리고 여전히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살고 있다. 2010년에는 몬트리올국제예술영화제에서 <니키드 생팔과 장 팅글리>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퐁피두센터 옆 스트라빈스키 광장에  설치돼 있는 니키드 생팔과 장 팅글리의 공동작품 <스트라빈스키 퐁텐>.
 퐁피두센터 옆 스트라빈스키 광장에 설치돼 있는 니키드 생팔과 장 팅글리의 공동작품 <스트라빈스키 퐁텐>.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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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난 숲에 한 방울의 물을 떨구는 작은 새, 콜리브리

루이즈는 지난 2012년 대선에서, 1차투표에선 녹색당의 에바 졸리를, 사르코지와 올랑드 사이에서 한 사람을 골라야 했던 2차투표에선 어쩔 수 없이 올랑드를 뽑았다. 그러나 더 이상 2차 투표에서 덜 나쁜 강도에게 표를 던지는 일은 이제 없을 거란다. 그녀가 지난번 투표했던 녹색당 후보 에바 졸리(노르웨이 출신의 프랑스 전직 판사. 그녀가 갖고 있는 대중적 호감을 토대로 녹색당은 딱히 그들과 인연이 없던 그녀를 대선후보로 영입했다)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프랑스 녹색당(EELV)은 수치스러운 정당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생태주의라고 하는 정치적 과제를 완전히 망각하고, 정당체제를 통해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권력의 맛을 누리는 데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당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좌파정당이 아니다. 그들이 더 이상 좌파일 수 없는 건,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유토피아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어떻게 하면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몰입할 뿐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는 과제로부턴 동떨어져 있다.

그녀가 현재 가입해 활동하는 유일한 단체는 콜리브리(Colibris)다. 콜리브리는 우리말로 벌새라는 뜻으로 콜리브리가 등장하는 한 전설로부터 단체의 이름은 유래한다. 옛날 어느 숲에 큰 불이 났다. 동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허둥지둥 달아나고, 멀리 떨어져서 망연자실한 채 불이 숲 전체를 삼키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작은 벌새 한 마리가 나뭇잎에 물을 떠다가 숲에 난 불을 끄고 있었다. 하늘에서 이걸 보고 있던 신이, 작은 새의 수선스러움을 보고, "너,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알아?" 하고 소리쳤다. 벌새는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하자. 이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면,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콜리브리의 철학이다. 콜리브리는 알제리 출신의 저명한 생태운동가 피에르 라비(Pierre Rabhi)가 중심이 되어 2007년 만들어졌다. 지역화폐운동을 비롯한 경제 자치와 주거와 유기농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 마을공동텃밭 일구기, 공동 육아, 생태적 놀이방 등 삶의 모든 방식에 있어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힘을 모우고 나누는 전국적 단위의 생태적·휴머니스트적 협동조합이다.

2012년 대선 때는 '모두가 후보' 운동을 전개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것은 대선 기간에 몇몇 정치인들의 원맨쇼를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후보가 되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걸고 내가 만들고 싶은 '보다 생태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세상에 대한 약속을 내놓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생각들을 교환하는 일종의 선거축제였다. 콜리브리의 '모두가 후보(tous candidats)' 캠페인에 실제로 2만6656명이 대선 후보로 등록하고, 자신의 공약을 내걸며, 다양한 토론에 참석하여, 모두가 행복한 공존을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활발히 나누었다. 

좌파란, 나 홀로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표지.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표지.
ⓒ 보리스 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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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좌파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다른 먼지들이 진정한 자유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나'라는 먼지만 홀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다시 말하면, 옆 사람이 불행한데, 나 홀로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작은 벌새에서 한 차원 더 내려와 이제 그녀는 우리의 존재를 먼지에 비유한다. 각자의 개별성보다, 하나하나가 모여서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동양적 사고가 깊이 배어 있는 표현이다. 연대(Solidarité)에 대한 사고가 동양철학과 만나면서,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루이즈의 정치철학을 구성하고 있구나 생각할 무렵,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의 이야기를 꺼내든다.

루이즈가 생각하는 가장 투철한 좌파의 정신을 구현한 예술가는 니키 드 생팔이란다. 스스로가 부여한 예술가의 사명. 자신이 포착한 삶의 빛나는 조각들을 가능한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그 소명에서 그녀만큼 충실했던 예술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루이즈가 집요하게 니키 드 생팔과 그의 동반자였던 팅글리의 삶을 영상에 담으려 했던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었다. 내게 니키 드 생팔은 치명적 매력을 지닌, 그래서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부담스런 '여자'였다. 순간, 그녀가 휘감고 있는 요염한 깃털에 눈이 부셔, 난 그녀의 작품과 삶에 대해 한 번도 객관적인 시선을 던져본 적이 없었단 사실을 깨닫는다. 퐁피두센터 옆, 스트라빈스키 광장에 있는 그녀와 팅글리의 공동작품, <스트라빈스키 퐁텐>은 바라볼 때마다 싱싱한 오렌지를 베어 무는 신선함을 아낌없이 전해주던 경이로운 예술작품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좌파란 또한 "세상 모든 일에 즉각적,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 무엇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이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간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루이즈에게 좌파는 철학적 성찰과 휴머니스트의 인격을 갖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좌파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좌파들은 그것을 억울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즈의 말을 따르자면, 그것은 좌파의, 즐겁고도 괴로운 숙명이다. 눈치 보며, 대세만 쫓는 이들, 성급한 단견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이들에게 우린 좌파라는 영광(?)스러운 라벨을 붙여주지 않으니, 적어도 좌파로 자임하려면, 기꺼이 깊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그 말, 어딘지 낯설지만, 충분히 와닿는다. 

루이즈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 벌어질 때, 친구들과 때로는 혼자서라도, 집회에 나간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향해 반인도적인 짓을 행할 때, 지상 최대의 핵국가 프랑스에서 반핵 집회가 열릴 때, 동참한다. 그 행동이 당장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불을 끄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콜리브리'처럼. 그리고 콜리브리들은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생성시키고 있다. 몬산토가 황폐화시켜놓은 지구를 맨드라미가 엄청난 속도로 깨끗이 청소하고, 그들이 유전자조작 씨앗을 세상에 유포하는 동안, 코코펠리(Kokopelli: 유기농 씨앗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생태운동협회)는 또 다른 한 편에서 생명력 넘치는 씨앗으로 지구를 다시 살려내고 있는 중이다.

루이즈에게 가장 진한 흔적을 남긴 작가를 물으니,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보리스 비앙(Boris Vian)"이란 답이 돌아왔다. 68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비앙의 저서들 가운데, 특히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첫 손에 꼽는다.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보르도로 건너 왔을 때, 가축 다루듯 흑인들을 대하는 부르주아 백인들이 태도가 가슴에 화인처럼 남아 있었기에 인종주의를 다루는 비앙의 이 뜨거운 소설은 그녀에게 각별한 인상을 새긴다. 그러나 곁에서 자신에게 살아 있는 삶의 본보기가 되어주었던 이는 고교시절 철학선생님이었다. 유대인이었기에, 나치의 수용소에 수감되셨다가 탈출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서 무한한 인간애와 관용의 태도. 그리고 거기에 빛나는 지성이 깃들여질 때 발휘되는 힘과 감동이 무엇인지 배웠다. 단 한 순간도, 나치에 대한 증오는 표출한 적이 없었다.

나는 루이즈가 묘사하는 그 철학교사는 어쩌면 지금의 루이즈를 그대로 닮아 있다고 느꼈다. 웅숭한 지혜와 관용의 샘을 품고 있는 60대 초반의 영화감독, 한의사, 페미니스트, 생태주의자. 단호하지만 칼날의 날카로움이 없고, 명료하고 지혜롭지만 한 오라기의 교만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는 어떠할까 궁금해졌다. 낙관적인가 비관적인가. 그녀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해 답한다. "나의 의지는 낙관적이지만, 나의 지성은 비관적"이라고. 그러면서 미소 지으며 덧붙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찡그리기보다 웃기를 원한다. 낙망하여 칙칙해진 얼굴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세상은 결국 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누구보다 격렬하게 투쟁으로 젊음을 돌파해낸 루이즈 포르가 깊은 우물을 품은 예순한 살에 이르러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태그:#목수정, #파리의 생활좌파, #콜리브리, #루이즈 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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