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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가 가까운 시간, 두 줄의 빨간색 출입 금지 통제선이 설치된 불 꺼진 건물 밖. 여남은 명의 중국 동포들이 통제선이 쳐진 이유를 모르는 듯 밖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수군수군하던 그 중 한 명은 바닥에 깨진 유리와 함께 화재 잔해로 그을음 냄새가 여전한 건물 안을 잠시 기웃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금세 밖으로 다시 나왔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곧 옆 건물에 있는 중국동포교회와 지역아동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제선이 설리된 건물 외벽에 화재로 인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 지구촌사랑나눔, 중국동포교회 통제선이 설리된 건물 외벽에 화재로 인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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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전소된 무료급식소
▲ 화재 현장 화재로 전소된 무료급식소
ⓒ 김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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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밤, 사단법인 지구촌 사랑나눔이 있는 건물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1층 무료 급식소가 전소되고, 같은 건물에 있는 쉼터와 이주민 의료센터가 폐쇄됐다.

구로구 가리봉동에 소재한 중국동포와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지구촌 사랑나눔(대표 김해성 목사) 건물에 불이 난 것은 지난 8일 오후 11시 17분경. CCTV 판독 결과, 쉼터 이용자 중 평소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중국 동포가 방화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가 있던 날 밤, 처음 화재를 목격하고 건물 4층에 있는 쉼터 이용자들을 대피시켰던 유정희 전도사는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면서 시커먼 연기가 건물을 뒤덮고, 화재에 놀란 동포들이 건물 옥상으로 대피하고, 어떤 사람은 옥상으로 뛰고, 어떤 사람은 옆 건물로 뛰어넘고… 불길이 쉼터까지 번지기 전에 대피하느라 정신없었다"면서 화재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평소 백여 명이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쉼터 이용자들은 고령인 경우가 많아, 대피 과정에서 십여 명이 골절과 화상 등 부상을 당했다. 이들은 현재 인근 6개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화재가 난 당일 밤,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뜬 눈으로 화재 사건을 수습 중인 김해성 목사는 평소 긍정적인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탄을 하며 도움을 호소했다.

"당장 오갈 데가 없는 쉼터 이용자들을 급하게 지역아동센터와 중국동포교회, 외국인력지원센터 등에 분산시켰지만, 사태를 수습하려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병원에서는 환자들 치료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벌써부터 물어오고 있고, 화재 복구비로 2억 원 정도가 들 것으로 예상하는데, 막막합니다. 하늘만 바라보며 기도할 수밖에요."

이번 화재로 무료로 운영되던 쉼터, 병원이 폐쇄되고, 하루 500여 명이 이용하던 무료 급식소 역시 운영이 중단되어 의지할 곳 없는 중국 동포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화재가 난 무료 급식소는 화재보험에 가입되지 않았고, 입원 중인 중국 동포들 역시 의료보험에 들지 않았다.

매주 '김해성 희망 편지'로 희망과 긍정의 소식을 전하던 김 목사는 '방화, 그리고 잿더미'라는 제목으로 지인들에게 급하게 화재 소식을 전했다. 그의 편지는 화재로 다친 사람들과 갈 곳 없어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자책과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주 노동자와 중국 동포의 문제를 모른다고 해선 안 될 일이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이주민 지원활동은 누군가 나서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고,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

"한국 정부는 이주 노동자들이 굶주리고, 버려지고, 병들고, 죽어도 손대지 않습니다. 이들을 돌보는 법과 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에 사람이 산다면 오갈 데 없는 이주민들을, 병들고, 죽어간 이주민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 된 목사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법과 제도가 없으니 나도 모른다고 할 순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모두 모른다고 했으면 이주민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김해성 희망편지 -급보: 방화, 그리고 잿더미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났어요. 불이야…."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면서 시커먼 연기가
건물을 뒤덮고, 화재에 놀란 동포들이 건물
옥상으로 대피하고, 어떤 사람은 뛰어내리고….

어제(8일) 밤 11시17분경
저희, 지구촌사랑나눔 건물 1층 입구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면서 10명이
구로고대병원 등 관내 6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 중이며 추락한 1명은 위독한 상태입니다.

1층 무료급식소는 전소된 상태입니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입구는 시커먼 그을음과
깨진 유리조각이 깔렸고, 4층 쉼터는 화재로 인한
매캐한 연기가 자욱합니다. 무료급식소를 복구하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걸릴 것 같습니다. 쉼터와 병원 운영이
당분간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매우 걱정입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쉼터에 머물던 100여명의
중국동포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입니다.
우선 급한 대로 빵과 우유를 구해다가
끼니 대신 드렸지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1층에 설치된 CCTV를 분석한 결과
방화 추정 인물은 3일 전에 쉼터에 입소한
중국동포 김씨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방화 추정 인물은 가리봉 인근에 있는 중국동포 관련
단체에서 보낸 사람으로, 문제 행동의 소지가 있었음에도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내쫓지 말라는 저의 운영방침 때문에
쉼터 관리자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가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이번 화재는 자칫, 참사(慘事)로 번질 수 있었습니다.
이날 화재 발생 10분 전에 중국동포교회의 여전도사가
술 냄새를 풍기는 방화범을 만났는데, 그가 급식소에 들렸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쉼터로 올라간 직후에 화재가 발행했고,
이를 목격한 여전도사가 곧 바로 119에 신고한 직후에 4층 쉼터
동포들에게 대피하도록 하면서 인명피해가 이 정도에 그쳤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시간은 쉼터 사람들이 취침하고 있을 때여서 만일,
화재 발생 사실을 몰랐다면 6층 건물은 화마에 휩싸였을 것이고,
불길과 연기에 휩싸인 쉼터의 동포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 시간에 저는 스리랑카에서 오신 손님들을
숙소에 모셔다드리고 귀가하던 중이었습니다.
운전 중에 연락을 받은 저는, 급히 차를 돌려 가리봉으로
달려가려다가 중앙분리대 턱을 올라타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차가 전복되려는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이날, 저와 저희 기관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화재 소식을 접한 주변 사람들은
인명피해와 보험가입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화재보험에 가입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기관은 지난 10년 동안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무료급식소와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과 쉼터를 운영해야만 했습니다.
저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먹이고, 재우고, 치료해드리는 것보다
먹이고, 재우고, 치료해드릴 수 있는 비용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하루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재보험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이 굶주리고,
버려지고, 병들고, 죽어도 손대지 않습니다.
이들을 돌보는 법과 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에 사람이 산다면 오갈 데 없는
이주민들을, 병들고, 죽어간 이주민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 된 목사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법과 제도가 없으니 나도 모른다고 할 순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모두 모른다고 했으면 이주민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주방의 냉장고와 냉동고,
식탁과 의자 등이 모두 타버린
무료급식소 현장을 돌아보는데 참담했습니다.
시커멓게 타서 녹아버린 천정을 보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산산이 부서지고 뒹구는 집기들을 보는데 가슴이 아팠습니다.
화재 피해 환자들의 치료비와 급식소 복구비용이 2억 원 정도 든다는데
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동포들을 어떻게 먹이고, 재우고, 치료해야 하나?

잿더미에서 편지를 씁니다.
운영을 잘못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를 위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문의> 지구촌사랑나눔 02-849-9988



태그:#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화재, #중국동포, #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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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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