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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로동신문>을 받았다.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로동신문>을 받았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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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고려항공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어디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인사 소리를 듣고 갑자기 귀가 번뜩했다. "안녕하십네까"가 아니라 분명히 "안녕하십니까"로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번이나 북한을 여행했으면서도 평양사람들은 '~니까' 대신 '~네까' 그리고 '~니다' 대신 '~네다'고 발음한다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스튜어디스는 분명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이륙을 위해 앉아있는 고려항공 스튜어디스
 이륙을 위해 앉아있는 고려항공 스튜어디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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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 또 다른 스튜어디스에게 말을 걸었다.

"평양에 몇 시에 도착하지요?"
"4시에 도착 예정입니다."

틀림없이 '~입네다'가 아닌 '~입니다'였다. 나는 왜 지금껏 평양 사람들의 발음을 잘못 들은 걸까. 아마도 선입견 때문이었을 게다. 방송이나 출판물들을 보면 대부분 북한사람들의 말투를 그런 식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잘못 각인돼 있던 것이다. 이렇듯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들었을 텐데 그말이 "안녕하십네까"로 들렸으니 말이다.

아마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일 게다. 잘못된 선입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으니 사실을 봐도 사실로 보여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나 또한 북한을 여러 차례 여행했음에도 오늘날까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설경이를 만날 수 없다니요...

북한의 관광 비자
 북한의 관광 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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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제 북한의 영공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설경이, 그리고 현수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를 접촉했던 일이 뇌리에 스친다.

우리는 원래 북한의 '조선국제려행사'를 통해 19박 20일의 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미국 국적자에게는 9박 10일 이상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문제가 또 생겼다. 이번 북한여행의 주목적이 설경이와 현수를 만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인데, 관광 비자로 입국하는 사람들에게는 관광 외 다른 어떤 일정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북한여행을 했음에도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한 통신사 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설경이와 현수네 집을 방문할 것이라고 이야기까지 했으니 나도 참 무지하고 순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해야 수양딸과 수양조카의 집을 방문할 수 있겠냐'는 내 다그침에 조선국제려행사는 매우 난감해하며 "혹시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해외동포 이산가족을 담당하는 '해외동포위원회'에 접촉해 보라"고 전했다.

그러자 지난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를 읽고 "글을 잘 읽었다"며 내게 메일을 보내온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유엔에 파견 나와 있는 북한외교관이며 참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내 우리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전화로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자꾸 약속장소 바꾸는 북 외교관... 왜?

"신 녀사님의 사정은 익히 알겠습니다만 실제 이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은 좀 곤란합니다. 실제 이산가족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그렇지가 않으니…."
"참사님, 아무리 수양딸, 수양조카라고 해도 그렇지요. 관광비자로는 만날 수가 없다, 실제 이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동포 위원회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뇨….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요."

"녀사님의 심정은 충분히 리해합니다. 그러나 공화국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으니 리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도 안돼요. 세상에 이런 법은 없어요, 참사님!"

"녀사님, 조국은 전쟁이 끝난 이래 지금까지도 일종의 전시 상태에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 제재 속에 우리 인민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법도 생겨난 게니 리해해 주십시오."
"저, 있지요…. 직접 만나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찾아가도 괜찮으신지요?"

"뭐, 오신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는 있습니다만 이런 일로 먼 캘리포니아에서 여기까지 오신다니까 좀…."

우리 부부는 난감한 심정을 안고 그 참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데도 여러 번 전화 통화를 해야만 했다.

우리는 복잡한 뉴욕의 도심을 피해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그런데 장소를 제의하면 전화를 끊고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나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바로, 북한 외교관들은 맨해튼 콜럼버스 서클을 중심으로 반경 25마일(약 40킬로미터)를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장소를 제의하면 그곳이 활동 반경 내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외교관계가 없다고는 하나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에 파견된 일국의 외교관들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북한은 미국인들에게 관광마저도 허락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북한 외교관들의 활동 반경 내에 있는 뉴욕 한인타운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만났다. 남편과 동갑인 이분은 원래 평양외국어대학 교수였다고 한다. 겉보기에도 이분은 외교관이라기보다 학자라는 인상을 더 짙게 풍겼다. 술 몇 잔이 돌자 그분이 내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최선 다해보겠다"는 말, 희망을 품었다

북한의 일반 비자
 북한의 일반 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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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신 녀사님께서  <오마이뉴스>에 게재하신 연재 기행문을 빠짐없이 잘 읽었습니다. 정치적인 것을 떠나 객관적인 입장으로 민족을 생각하시는 녀사님의 글속에서 동포애를 많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이었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해요. 저는 남쪽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남쪽의 시각에서 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어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상당히 힘들 때가 있어요. 혹시 글에서 북을 불편하게 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충분히 리해합니다. 물론 글속에서, 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녀사님 말씀대로 남쪽의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인데 그야 어쩔 수가 없지요.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그런데 설경이하고 현수와 정이 참 많이 드신 모양입니다."
"그럼요, 여러날을 함께 다니며 마음이 통하다 보니 정이 듬뿍 들 수밖에요. 그런 설경이가 결혼을 하고 지금 아이를 가져 산달이 됐다고 하는데,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어 찾아가려고 합니다. 가는 길에 현수네 집도 들리면 좋겠고요."

"아, 그러셨군요. 우리 민족은 정이 많아 만나서 몇 마디만 하면 금방 통하는데 수십 일을 함께 다니셨으니 아마 정이 많이 드셨을 겁니다."
"네, 그러니 제발 부탁드려요, 참사님."

"아, 이거 참 곤란하네…. 그러면, 우선 관광 비자로 입국해 '조선국제려행사'와 관광을 하세요. 그리고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을 하기 위해 해외동포로서 일반 방문 비자를 따로 신청하도록 해보십시오. 사실 남쪽 출신의 해외동포가 관광객의 신분으로 북을 방문하고 북의 동포와 수양 가족 관계를 맺어 그 집을 방문한다는 일은 제가 알기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여간 충분히 리해했으니 제가 평양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그 외교관의 말에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일단 그분의 말대로 관광비자를 갖고 조선국제려행사와 열흘간의 관광을 먼저 한 다음, 서울에 가서 열흘을 지낸 뒤 또다시 일반 비자로 북한에 들어가 설경이와 현수네 집을 방문하기로 일정을 수정하고 수속을 밟았다.

미국에서 준비한 설경이와 현수의 선물만도 한 트렁크나 되는데 이 짐을 들고 북한을 들락날락해야 한다니…. 그 불편함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다시 간다고 해도 과연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을 허용해 줄 것인지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평양 순안공항은 변한 게 없구나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리고 있다.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리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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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했던 과정을 생각한지 얼마나 됐을까. 비행기에서 곧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공항에 내리면 누가 우리를 맞아줄까. 만일 설경이와 현수가 우리를 맞아준다면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리라.

2013년 8월 17일,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순안 공항은 여전히 시골의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임시 청사였다. 지금까지 내가 눈여겨본 북한의 건물들은 마술이라도 부린 듯 삽시간에 완성됐는데, 순안공항만은 예외다.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자 외국인에게 첫 인상을 심어주는 장소인데 2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대로니 대체 언제쯤 공사가 끝날는지…. 관광객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져 발 디딜 틈이 없다. 짐을 실을 카트가 모자라 '카트 확보 쟁탈전'이라도 벌어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한마디 한다.

"아니, 관광객 맞을 준비나 제대로 해놓고 사람들을 받든가 말든가 해야지.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관광객들이 돌아가서 알릴 거 아냐. 첫 도착부터 생존 경쟁을 해야 하니 원!"

또다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폭탄 아저씨'와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군복 같은 청색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한 아가씨가 어디에서 났는지 얼른 카트를 가져다줬다. 남편이 내뱉은 말이 온 공항청사에 메아리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순안공항 임시청사 모습.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순안공항 임시청사 모습.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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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기 사정이 좋아졌는지 짐을 실은 컨베이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겨우 카트 두 개를 확보해 짐을 싣고 세관 앞에 섰다. 올해부터는 휴대전화도 갖고 들어갈 수 있어 세관 통과가 훨씬 간편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지난 방북 때와 마찬가지로 세관신고서만 들여다볼 뿐 가방을 열어보지 않는다. 북한법은 남한 제품의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세관 통과가 간단할 줄 알았더라면 남한제품들을 사서 가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내가 평양에 갈 때마다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제품들을 전해주고 싶어했던 이유는, 최고 품질의 남한 제품을 북한 동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동포 노동자들의 손길이 묻어있는 물건을 전해주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북한여행을 통해 평양 순안공항의 세관이 전혀 까다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북한의 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번 안내원들과 북한의 동포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살 때면 혹시라도 '한국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나 노심초사하며 상표를 확인하곤 했다.

세관을 통과하자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반긴다. 북한 조선국제려행사 간부, '머리 빠지는 것이 제일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라던 40대 초반의 '대머리' 리정 선생이다.

"아이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이리 짐 주십시오."

그는 처음 보는 두 사람과 함께 우리의 짐을 받는다. 리정 선생과 함께 나온 두 사람은 앞으로 열흘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안내원이다. 무척 반갑고 친근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을 해버렸다.

"아니, 높으신 분이 어떻게 몸소 나오셨어요?"
"두 분께서 이리도 자주 우리 조선국제려행사를 리용해 주시니 제가 직접 영접해야지요.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둘째 수양딸 리설향

공항 주차장에서. 왼쪽부터 박영길, 리정, 나, 리설향.
 공항 주차장에서. 왼쪽부터 박영길, 리정, 나, 리설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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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선하고 곱게 생긴 아가씨가 리정 선생과 나의 대화를 차분하게 지켜보다 눈이 마주치자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리설향입니다."

이번 우리의 여행에 함께할 여성 안내원이다. 직감적으로 내 둘째 수양딸이 될 것임을 감지했다. 가까이서 보니 맑고 큰 눈망울이 어느 순정 만화의 여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갓 24세가 된 이 아이의 이름이 외양과 참 잘 어울린다. 첫째 수양딸의 이름은 '설경'. 묘하게도 두 아이의 이름이 '설'를 쓴다.

설향이의 아이디 카드
 설향이의 아이디 카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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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서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고 있던 아저씨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불평을 하며 악수를 청한다.

"아까부터 두 분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도 빗고, 헛기침도 하고, 안 바르던 향수도 바르고 왔는데…. 설향이 향기에 취하셔서리 저는 박대하시기나요?"

첫눈에 봐도 마음이 넉넉하고 넉살 좋은 이웃집 아저씨 스타일이다. 이름은 박영길. 원래는 일본어·중국어 안내원인데 "요즈음이 제일 바쁜 관광철이라 영어과 안내원이 모자란다"며 우리 부부에게는 영어가 필요 없으니 대신 나왔단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마디 한다.

"누나라 불러도 되디요?"
"아니,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나를 누나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아, 새 손님을 맞는데 그 정도는 알고 나와야디요. 저는 올해 쉰하나입니다. 제 바로 위의 누나가 년년생인데 신 녀사님과 동갑입니다."
"알았어요. 그럼 확실히 하세요."

그는 남편에게도 인사를 하며 '형님'이라 불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언젠가 봤던 영화 속의 '조폭'들이 공항에서 만나 인사하는 장면 같아 웃음이 터진다.

차에 다가가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긴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35세애기 아빠다. 이름은 리철남. 큰 눈이 웃을 때면 초승달처럼 모습을 감춘다. 이번 여행에서 두 놀부 형님들(남편과 박영길) 사이에서 흥부 같은 아우(운전기사)가 힘든 일을 다 하게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라도 잘해줘야지.

우리는 열흘간 우리와 함께할 '삼천리'표 자동차에 올랐다.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평양거리는 훨씬 활기 넘쳤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이라 온 거리가 싱그럽게 푸르다.

평양이 변하고 있다

잔디가 보이는 평양 거리. 예전에 비해 훨씬 환해졌다.
 잔디가 보이는 평양 거리. 예전에 비해 훨씬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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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부쩍 많아진 평양 시내
 차가 부쩍 많아진 평양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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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평양 시가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도로변을 따라 잔디를 심어놓아 눈에 띄게 환해졌다. '어두운 공산국가 거리' 이미지를 벗어던진 느낌이다. 게다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층 건물들도 많이 보인다. 자동차, 특히 승용차와 영업용 택시가 그새 부쩍 늘었다. 평양 공기가 좋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려나 보다.

평양에 왔음을 실감케 해주는 광경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거리의 여성 교통안전원이다. 그런데 교통량이 많아져 곳곳에 신호등이 설치됐으니 언젠가 이 여성 교통안전원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고려호텔 종업원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라 그 감동은 예전만 못하다. 되레 '이제 나도 북한사람이 다 된 것이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날 뿐이다. 나는 조선국제려행사 리정 선생에게 책 한 권을 꺼내줬다.

"제가 세 차례 이곳을 방문하고 난 뒤 서울에 있는 <오마이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 기행문을 연재했어요. 연재가 끝나고 책이 나왔는데, 바로 이 책이에요. 남한의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책 속에 조선국제려행사가 잘 소개돼 있으니 회사에 가져다 놓으세요."
"아, 바로 이 책이군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북경에 나가 있는 KITC 대표로 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KITC가 뭐예요?"
"우리 회사말입니다.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의 략자, KITC. 우리는 우리 회사 조선국제려행사를 부를 때 KITC라고 부릅니다."

서슴없이 영어를 쓰는 이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외국어 열풍을 감지한다. 리정 선생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녀사님께서 우리 조국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쓰셨다면서요? 우리 인민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에이, 그리고 '가난하다'가 뭡니까, 녀사님. 고저 '경제적으로 좀 부족하다' 이렇게 쓰셔야지."

남편이 "어쨋든 알갔어, 알갔어"라며 평양말을 흉내내며 끼어들었다.

"여보, 빨리 그 대머리약 좀 꺼내드려."
"선생님! '대머리약'이 뭡니까. '머리 빠지지 않는 약', 이렇게 좀…."
"아, 이 사람! '대머리약'이나 '머리 빠지지 않는 약'이나 그게 그거지, 원…. 그리고 젊은 사람이 머리가 그게 뭐야. 어서 가져가 발라봐. 더 이상 벗겨지지 않게."

설향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소하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수양딸 설경이가 생각이 나 물어봤다.

"설경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지금 해산달이 다 되어가 오늘내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두 분께서 설경이네 집에 가시고 싶어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으로 오셔서는 불가능합니다. 일반 방문비자로 다시 오실테니 그때 가보시도록 해보세요."
"알고 있어요."

커피숍에서 리정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는 나, 그리고 설향이(왼쪽)
 커피숍에서 리정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는 나, 그리고 설향이(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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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분위기라도 전환하려는지 얼른 접대원을 불러 대동강 맥주와 탈피(마른 명태)를 주문한다. '탈피' 소리를 들으니 이번엔 또, 별명이 '탈피'인 수양조카 현수가 떠오른다.

"현수는 지금 어디 있어요?"
"로력동원 나가서 한 달 정도 있어야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네? 동원을 나가 한 달이나 있어야 돌아온다고요?"
"9월에 다시 오셔도 아마 현수는 못 만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부인하고 애라도 꼭 만나고 가야 해요."
"그때 가서 보십시오."

평양 '가스 맥주'를 아십니까

평양의 한 가스 맥줏집
 평양의 한 가스 맥줏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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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력동원'을 나간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가능한 한 그곳에 찾아갈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래 듯 대동강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 대동강 맥주의 맛은 일품이다. 남편은 대동강 맥주 예찬에 여념이 없다. 옆에서 영길 아우가 한마디 거든다.

"형님, 여름에는 수요가 너무 많아 대동강 맥주가 아주 귀합니다. 공급이 채 따라오질 못하요. 지금 평양에는 가스 맥줏집도 많이 있습니다. 거기 맥주는 더 맛있습니다."
"가스 맥주가 뭐야?"
"맥줏집에서 맥주를 직접 자체 생산해 손님들한테 제공하는데 정말 시원합니다."
"뭐, 여기에 그런 데가 다 있다고? 말나온 김에 가서 한잔 할 수 없나?"
"가실라요?"
"응, 지금 당장."
"당장이요? 급하시기는…. 그럼 우선 려장을 풀고 내려오신 다음에 식사를 하시고 가자요."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가스 맥주'집을 향해 호텔을 나섰다. 평양의 밤도 예전보다 훨씬 환해졌다. 일부 건물은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휘황찬란하다.

차에서 내려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데 도저히 맥줏집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무지 간판이 없으니 이곳이 아파트인지 맥줏집인지 알 길이 없다. 북한의 유흥업소가 다 이런 식이다. 선전이나 광고가 별로 필요 없는지, 아니면 하지 않는 건지…. 대부분 업소에는 간판이 없거나 있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잘 꾸며져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들어서서 보니 고급 술집 같이 꾸며놨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성들끼리 앉아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었다. 고급스러운 귀걸이를 한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북한에 와서 여성들끼리 술집에 들어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다.

두 여성이 평양 가스 맥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두 여성이 평양 가스 맥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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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들짝 놀라 설향이에게 물었다.

"어머, 설향아, 이곳에서도 여자들끼리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네?"
"녀성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절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렇게들 마시고 있잖아?"
"그야, 뭐, 자기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니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지요. 하여간 저는 이런데 와서 제 동무들과 저렇게 앉아 술을 마시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 설향이에게 다시 물었다.

"설향아, 혹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도 있니?"
"담배를요? 오마(어머), 시집 다 가려고…. 어떻게 녀자가 담배를 피웁니까. 아직까지 조국에서 담배를 피는 녀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근데 남조선에서는 녀자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하나요?"
"응. 많이들 피워."
"오마니도 담배 피우시나요?"
"아니."
"야아, 다행입니다. 저는 녀자가 담배 피우는 것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여기도 남한처럼 될 지 몰라."
"아니요, 오마니. 여기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설향이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 이곳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 저 여성들은 과연 누구일까. 소위 고급 당 간부의 부인 또는 그 자녀들일까. 아니면, 이러한 광경은 평양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나는 영길 아우에게 앞으로 열흘 동안 가능하면 이런 곳에 자주 가자고 부탁했다.

도착한 첫날부터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일은 황해도 쪽으로 관광을 간다는 일정을 전해 들으며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태그:#북한, #민족, #통일,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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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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