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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다. 1991년 3월 어느 날, 대학의 점거 농성장으로 찾아온 아버지를 설득하겠다며 밖으로 나온 나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학내 분규 과정에서 대학 본관을 점거하던 나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내 아버지를 속인 것이다. 경찰이 전화하여 "오늘중으로 농성장을 벗어나면 형사 처벌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단다.

그렇게 체포된 다음날, 결국 나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그날 나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수갑과 호승줄에 묶여 호송버스를 타고 강원도 고성 경찰서의 지하 감방으로 분리 수용되었다. 최북단의 3월은 여전히 추웠다. 나도 모르게 나무 마루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때로 꾸덕꾸덕해진 군용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채 첫날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누군가가 첫 면회를 왔다는 호출이 들려왔다. 밖으로 나온 나는 계단을 밟고 지하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다. 일제 시대에 지었다는 고성 경찰서의 대용 감옥은 외부의 햇빛이 일체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방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냉기와 습기로 가득했다.

면회실로 나오며 나는 당연히 첫 면회를 부모님이 오셨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예상은 틀렸다. 후배였다. 그것도 나를 면회 올 사람으로 예상도 해보지 못한 1년 여자 후배였다.

월급통장과 도장주며 재야단체 활동비로 쓰라는 그녀

아내와 함께한 신혼여행은 행복했다. 어쩌면 결혼은 신혼여행을 가기위해 하는 것은 아닐까.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행복한 추억이다.
▲ 신혼여행에서 아내와 함께한 신혼여행은 행복했다. 어쩌면 결혼은 신혼여행을 가기위해 하는 것은 아닐까.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행복한 추억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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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 후배의 면회에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지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22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잊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면회를 끝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 후배의 말이 들렸다. 책을 한 권 가져왔다는 말이었다. 나는 고맙다며 잘 가라고 말한 후 다시 계단을 통해 지하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교도관은 그 후배가 차입한 책을 가져왔다. 반갑게 받아 그 책을 펼치는데 책 중간에 뭔가가 보였다. 책갈피 사이에 낀 편지 한 장이었다.

궁금해서 펼쳐 읽어본 편지는 황당했다. 말 그대로 '오늘의 날씨'였다. 오늘 온도는 몇 도이며 꽃은 얼마나 폈고, 또 바람은 얼마나 불며 하늘은 무슨 색깔인지…. 무슨 편지가 이런가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날씨를 담은 편지는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후배는 나를 면회 왔고 늘 그 편지를 넣어주고 돌아갔다. 내가 1심 재판 결과 집행유예를 받아 나오는 날까지 '오늘의 날씨'는 그렇게 매일 나에게 왔다. 그리고 그 후배와 나는 21년째 함께 살고 있다. 지금의 내 아내다.

아내 장경희는 그야말로 '천생 여자'다. 조용하고 착하다. 그렇지 않다면 나처럼 다혈질에 굴곡 많은 남자를 만나 늘 내 편으로 남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장경희가 얼마나 착한 여자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92년 2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로서는 그저 학생 운동 후배였던 장경희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날 장경희는 재야 단체보다는 사회 봉사가 자신의 적성에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서울 근교에 있는 모 장애인 시설의 지도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은 모두 8명의 정신지체 장애아동이 지도 교사 한명과 생활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3일간 중증 장애 아동과 함께 생활하고 하루 휴무하는 근무였다. 10대 중반의 걷지도 못하는 중증 장애아동을 일일이 씻기고 밥 먹이며 잠까지 재우는 지도 교사의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장경희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 행복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 행복한 때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1달여가 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장경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월급 통장과 도장을 주는 것이 아닌가. 장애인 시설의 지도 교사라지만 사실 92년 당시에도 채 40만 원이 되지 않는 박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통장을 통째로 나에게 주며 재야단체에서 일하는 활동비로 쓰라며 주는 것이었다. 다만 자신도 생활비가 필요하니 한달에 5만 원만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통장은 받지 않았지만 나는 그러한 장경희와 함께 인생을 같이 걸어가고 싶은 생각을 갖게 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내는 원래 시를 쓰는 '문학 소녀'였다. 결혼하고서도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주부 백일장'에 구청 대표로 선발되어 나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내는 장려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받은 돈으로 나에게 처음 삐삐를 사주기도 했다. 1995년의 일이었다. 그런 문학 소녀가 민주 투사가 되었다.
▲ 농성장에서 아내는 원래 시를 쓰는 '문학 소녀'였다. 결혼하고서도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주부 백일장'에 구청 대표로 선발되어 나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내는 장려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받은 돈으로 나에게 처음 삐삐를 사주기도 했다. 1995년의 일이었다. 그런 문학 소녀가 민주 투사가 되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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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갇혀 있던 감옥 안에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인권운동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나는 불의한 권력의 잘못에 대해 항거했지만 결국 힘이 없어 내가 잡혀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처럼 누군가도 더 이상 억울하게 끌려가지 않는 그들의 벗으로 살고 싶었다. 감옥을 나온 후 기본적인 생활비도 받지 못하는 재야단체에서 일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 길을 가고 싶었던 나로서는 행복했지만 93년 결혼한 남편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더구나 따로 분가를 하지 못하고 시댁에 얹혀 살던 아내 장경희로서는 이중으로 힘든 길이었다. 특히 큰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최루탄 냄새를 잔뜩 묻히고 집에 돌아오는 재야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아들이 내 부모 마음에 들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성격 괄괄한 아들에게는 차마 싫은 소리를 못하던 부모님은 대신 며느리에게 어떻게 좀 해 보라며 눈치를 줬다고 한다. 이 말도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고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내 욕심만으로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아이 분유라도 살 수 있는 돈을 주는 직장을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잡은 직장이 모 운수회사의 영업직 사원이었다. 일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우연히 벌어진 어떤 일을 잘 처리했다는 이유로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학생운동을 함께 하다가 1990년 죽어간 선배와 이에 격분하여 1991년 분신 자살을 기도했던 동지를 두고 나만 혼자 살겠다며 직장을 다니는 것이 마음의 번민으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그때였다. 우연히 한 후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마디 말 속에 그 후배는 나에게 비수같은 말을 던지고 총총히 사라졌다.

"선배.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만큼은 죽을 때까지 운동만 하며 살 줄 알았어요. 실망이에요."

그 후배가 남긴 말이었다. 그날 나는 몹시 괴로워 했고 한편으로 분했다. 퇴근 후 혼자 포장마차를 찾아가 소주를 마시며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후배를 향해 욕을 하며 폭음을 했다.

"니까짓게 뭘 안다고 나에게 실망했다고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소주를 미친 듯이 퍼마시던 그때였다. 환영처럼 내 눈 앞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에서 학우들 앞에서 외쳤던 수많은 약속의 말이었다.

"저는 결코 젊은 날의 한 때 치기로 운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젊어서는 양심을 외치고, 나이 먹어서는 표리부동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그렇지 않다며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는 정의이며 양심입니다. 함께 합시다. 학우 여러분."

부끄러웠다. 후배는 그때의 나를 기억했고 나는 그 약속을 잊었던 것이다. 만취한 상태로 나는 하염없이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아내 장경희를 끌어 안고 울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다시 인권단체에서 일하면 안 될까. 정말 미안한데 나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될까."

아내는 나를 조용히 끌어 안아 주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취한 채 나는 더 많은 말을 주정처럼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밤이 지났다. 다음날, 아내는 조용히 말을 했다.

"그래. 선배.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해. 사실 나도 선배가 매일 아침 '민들레처럼'(꽃다지 노래)노래 들으며 우울한 표정으로 하늘 바라보고 출근하는 것 보면서 마음 아팠어. 난 괜찮아."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참 '철없는' 남편과 '대책 없는' 여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94년 12월, 내가 다시 내 길을 걷도록 해준 내 아내 장경희의 일화였다.

장준하 선생 죽음의 진실, 아내가 있었기에 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늘 내 편이다. 그런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 아내에게도 그런 남편이 있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 남편이 되려 한다.
▲ 춘천 중도에서 아내는 늘 내 편이다. 그런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 아내에게도 그런 남편이 있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 남편이 되려 한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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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허락을 받은 후 나는 바로 회사에 사표를 냈다. 94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표적인 재야단체였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이라는 곳에서 나는 인권위원회 부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98년에는 천주교 인권위원회로, 다시 인권연대와 반부패 국민연대 국장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2002년에는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조사관으로, 이후 2006년에는 친일파의 재산을 국가로 귀속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관으로 4년간 일하기도 했다.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살면서 단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그저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영광도 가지면서 동시에 참 좋은 일을 하신다는 격려와 칭찬도 많이 받았다.

만약 그날 밤, 그러니까 94년 12월의 그때, 아내 장경희가 이 철없는 남편의 말을 편들어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렇다. 그날 아내가 울며 아파하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야멸차게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말을 잘랐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도 그 운수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98년 IMF 사태 때 이미 잘렸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늘 말한다. 만약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내, 장경희 덕분이라고.

“괜찮아. 선배답게 살아.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하면 되지. 뭐. 언젠가 죽으면서 후회할 일은 하면 안 돼잖아.” 장준하 선생 사건의 진실을 말하고자 공무원 사표를 써야할지 고민할 때 아내는 간결하게 정리해줬다. 그런 아내 덕에 나는 내 양심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출판기념회 “괜찮아. 선배답게 살아.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하면 되지. 뭐. 언젠가 죽으면서 후회할 일은 하면 안 돼잖아.” 장준하 선생 사건의 진실을 말하고자 공무원 사표를 써야할지 고민할 때 아내는 간결하게 정리해줬다. 그런 아내 덕에 나는 내 양심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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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모두 3번의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참석한 손님에게 꼭 해온 말이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조계사에서 개최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책 출판기념회에서도 역시 그랬다. 나는 아내를 소개하는 마지막 순서에서 "내 인생 최고의 여자, 제 아내 장경희를 소개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 역시 만약 아내 장경희가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렇다. 2012년 8월 어느 날, 당시 서울특별시 교육청의 감사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내 앞에 또다시 고뇌의 순간이 찾아왔다. 묘지 이장을 위해 재야 인사 장준하 선생의 묘를 연 사람들을 경악케하는 사실이 밝혀졌다. 장 선생의 두개골에서 외부 가격에 의한 상흔이 발견된 것이다. 명백한 타살 의혹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사회적 의혹으로 증폭되면서 과거 의문사 위원회의 이 사건 조사관이었던 나에게 여러 기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선을 앞둔 그 시점에서  공무원 신분인 내가 이러 저러한 말을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말을 한다고 상황이 다 정리된다는 보장이라도 분명하다면 어쩌면 결정은 보다 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동안 내가 쓴 모든 기록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했으니 거기에서 자료를 보시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 면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후 MBC의 한 기자를 통해 듣게된 사실은 놀라웠다. 장준하 선생 관련 기록을 향후 70년간 비공개한다는 기록원 결정이었다.

그 순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공무원으로 일할 수 없다는 것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어렵게 아내에게 입을 열었다. 내가 부딪힌 현실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묻고 싶었다. 대학을 다니는 아들과 중학생 딸을 둔 40대 가장으로서 직업을 내려 놔야 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소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늘 나보다 간결했다.

"괜찮아.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양심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되지 뭐. 죽을때 후회할 일은 하면 안 돼잖아."

내 아내, 장경희. 그가 내 가족이 되어 고맙다.

덧붙이는 글 | <가족이야기> 공모글.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가족 이야기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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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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