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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 태권도 상설공연장 옆에 대열해 있는 전의경들
▲ 광화문 광장 태권도 상설공연장 옆에 대열해 있는 전의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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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를 탔다. 전북 남원시 인월에서 오전 7시 45분 서울로 출발하는 함양 지리산 고속버스. 약속 하나 없이 무작정 나섰던 길.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도심을 배회한 하루는 아니었다. 그날 밤(9월 13일) 최종 목적지가 촛불이 밝혀진 서울광장이었으니.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버스를 타자마자 잠이 밀려왔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다. 네 시간 가까이 버스 안에 엉덩이가 배기게 앉아서 졸다 깨다가 했다. 12시쯤 동서울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번개까지 때리며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가을 장대비였다. 곧 그치겠지. 설마 저녁까지 퍼부을까.

터미널 지하상가의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었다. 국물이 뜨끈하고 얼큰했다. 수북이 얹힌 홍합을 말끔히 발라먹었다. 식당 유리 벽에 쭉 붙은 빨간색 '복(福)' 자를 눈으로 읽어가며. 한 자 걸러 한 자씩, 바로 붙인 福과 거꾸로 붙인 福을. 계산하고 나올 때 중국집 사장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붙였는지. 복이 위에서도 내려오고 밑에서도 올라오라는 기원의 뜻이란다.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그토록 기원이 절절하면 복이 들어올까, 비는 바가 이뤄질까. 살아오면서 절심함이 부족해 실패한 일들이 많다. 절실했지만, 방법이 서툴거나 순진해 이루지 못한 일들도.

광화문 광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길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상 아래 전의경들
▲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상 아래 전의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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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 광화문 광장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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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2호선과 1호선을 타고 광화문에서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비 끝의 날은 우중충했다.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섰다. 조선 시대 육조거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길, 과거 현재의 권력과 역사의 중심도로인 세종로 한복판으로.

세종대왕 동상을 등지고 섰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척의 경복궁과 북악산과 청와대를 바라보며. 깊은 산중에서 어쩌다 시끄러운 잿빛의 도심으로 내려온 초식동물처럼 멀뚱멀뚱.

이윽고 광장을 걸었다. 젖은 보도 위를 한 바퀴 빙. 비가 그친 금요일 오후라 사람들의 발길이 붐비지 않았다. 곳곳의 CCTV는 360도 회전하며 부산하겠지만. 한산한 광장을 순찰 중인 전·의경들의 모습이 이물처럼 눈에 튀었다.

걷다 보니 한쪽에 컨테이너 같은 구조물들이 서 있었다. 전시회 일정을 끝낸 구조물들. 거기엔 '기적을 캐내고 나라를 구하라'라는 문구와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흑백사진들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라는 문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각하' 사진도 박혀 있었다. (1964년 서독을 방문한 각하의 모습) 각하께서 유신독재의 시대로부터 21세기로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컨테이너 벽을 박차고 당당하게. 그 뒷심은 청와대에 입성한 각하의 딸일 터. 각하의 입김이 다시 불고 있다. 곳곳에서 스멀스멀... 친일, 독재의 행적은 감추고 '조국 근대화의 영웅'으로 각색, 부각되어.

유신시대 광화문 광장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 각하
▲ 유신시대 광화문 광장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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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사거리까지 왔다. 이순신 장군상 앞 쪽이다. 장군을 호위하듯 전·의경들이 거기에도 대열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긴 갑옷을 입고 1968년 그곳에 들어섰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포교할 막중한 의무를 부여받고. 오른손에 긴 칼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칼을 칼집에 넣어 오른손으로 드는 건, 적에게 항복한 장군이 적의가 없음을 뜻한다는데.) 하필 그런 모습으로 거기 불려나와 이순신 장군은 무엇을 지키고 (지켜보고) 있을까. 그가 진정 지키고 (지켜보고) 싶었던 것을 지키고 (지켜보고) 있을까.

그의 코앞에 쌓아졌던 '명박산성'이 떠올랐다. 2008년 6월 10일, 세계를 경악시킨 컨테이너 박스 장벽. 이명박 정권의 불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 그 장벽 앞에서 전진도 후퇴도 못한 채, 밤을 홀딱 샌 수십만 민주시민들의 함성. 도심의 어둠을 밝히며 강물처럼 흐르던, 꽃처럼 일렁이던 촛불.

시위는 그 해 5월 '광우병위험 미국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로 촉발됐다. 그러나 '대운하사업', '미친 등록금', '영어몰입교육', '부자감세', 남북한 냉전관계를 몰고 오는 '대북정책' 등등 나라를 말아먹을, 이명박 정권의 정책들이 '이명박 퇴진'을 외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 사과'를 '쇼'로 하질 않나, 사기 치듯 거짓말을 밥 먹듯 하질 않나 (하긴 범죄 전력이 14회나 되는 대통령이었으니)... 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시민들은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나는 6월 초부터 매주 토요일 혼자 나와 촛불에 합류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합창하고 거리를 행진했다. 밤을 새워 가며 목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국민으로서 당연한 나의 권리 행사였다. 그러나...

태평로 앞을 지나 서울광장으로

한국전쟁 서울파이낸스센터 앞 한국전쟁 사진전.
▲ 한국전쟁 서울파이낸스센터 앞 한국전쟁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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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져 왔다. 얼른 발길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너 천천히 태평로를 걷기 시작했다.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의 사진전시회가 눈길을 끌었다. 한국전쟁 사진들. 사진 푯말들 위로 꽂혀 있는 참전국들의 국기.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국기가 일제히 맞춤한 폭으로 펄럭였다. 비는 그쳤지만 물기 가득 밴 바람이었다. 곧 또 한바탕 소낙비를 쏟아낼 것 같은. 사진 아래쪽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북한 공산정권 도우미 종북세력! 그들이 충성하는 북한으로 몰아내라!' 쾅! 나는 마치 포화 속을 걷고 있는 것 마냥 심장이 떨렸다. 전쟁은 그렇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서울광장까지 내려왔다. 다리가 조금 아팠다. 오후 3시쯤이었다. 시청 지하철 입구 난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광장에선 '자활 한마당'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민주당 대표 노숙 천막도 건너다 보였다. 차도엔 경찰차들이 포진해 있었다. 방패를 든 전·의경들의 대열도.

2008년도 전·의경의 방패에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지던 시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무자비한 폭력 진압과 아우성과 비명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었다. 그러나 그 해 내내 민주시민들은 '폭력집회'와 '평화집회'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내 속에서도 그 두 개의 명제가 길항관계로 괴롭게 버텼다. 시간이 갈수록 불통의 권력과 맞붙어 싸우기에는 '촛불'의 힘은 미약했다. 아무리 수만, 수십만 명이 거리행진을 하며 켜든 촛불이라도.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불도저처럼 막무가내 밀어붙이는 무소불위 괴물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1980년대 운동처럼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고 나가 격렬히 저항해야 하나. 과연 지지와 성공이 보장될까.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그 와중에 나는 6월 25일, 추사로에서 '고시를 철회해라!' 구호를 외치다가 1차 연행을 당했다. 8월 15일, 남대문로 한국은행 앞 로터리에서 '대통령님 대화해요!'(얼마나 순진하고 눈물겨운 호소인가) 피켓을 들고 외치다가 파란색 색소 물대포를 홀딱 뒤집어썼다. 2차 연행됐다. 그리고 일반교통방해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로부터 공소장을 받았다. (12월 18일 1차 재판에서 재판연기 신청을 했고, 지금 재판은 기일이 추정된 상태로 보류되어 있다.)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한 후, '들불로 번진다-공안정국 속의 촛불 연행자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촛불에서 만난 J랑. 그도 촛불 연행자였다. 사실 둘 다 그 작업엔 완전 초짜였다. 어디서 제작비가 나와 하는 일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이서 진행했다. 나는 시나리오를 썼다. 뛰어다니며 연행자들을 인터뷰했다. J는 자료를 모으고 분석했다. 영상편집에 매달렸다. 내레이터도 내가 직접했다. 작업이 두 달 가까이 걸렸다.

들불로 번진다 촛불 다큐멘터리
▲ 들불로 번진다 촛불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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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로 번진다'는 촛불연행자들의 인터뷰 동영상과 함께 4대강 사업, 언론악법, 미국쇠고기수입정책, 평화집회와 경찰폭력, 정적 죽이기 정책을 신랄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며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이명박 인물 탐구'도 넣었다.

그 63분짜리 동영상을 만든 취지는 그랬다. '... 촛불은 다양한 시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촛불의 단결을 도모하고... 또한 공안정국에 대해 무관심한 시민들의 인식변화를 도모하며 촛불이 들불로 번져갈 수 있도록... ' 그러나...

나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앉아있다간 그때의 패배감과 무기력감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 진 싸움이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 소용없었다. 그런데 정말 절실하지 않아 실패했나. 하늘과 땅을 향해 비는 마음이 부족했나. 방법이 순진하고 서툴렀나. 그래도 그때는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선거는 곧 다시 돌아온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라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그나마 숨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광장을 떠나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건너갔다. 대한문 앞에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 중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쌍용자동차 국정조사해라', '집단단식 농성돌입'... 눈물겨운 투쟁사를 쓰고 있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농성
▲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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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로 들어섰다. '폴 고갱' 전시회 포스터가 보였다. 갑자기 남태평양 타이티 섬의 원시성과 문명세계의 소용돌이를 떠난 고갱의 정신을 뒤쫓아 가고 싶어졌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3시간 가까이 고갱의 그림 61점을 감상했다. 그의 3대 걸작이라는 <황색 그리스도>,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보았다. 잠시 착잡한 현실을 떠나 프랑스와 타이티로 피신한 것 같은 시간이었다. 고갱의 찬란한 원색을 따라. 그러나 내가 본 건 남태평양의 낙원이 아니었다. 한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일생이었다.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는 고통 속에서야 비로소 피어나나.

덕수궁 돌담길 서울시립미술관 고갱 전
▲ 덕수궁 돌담길 서울시립미술관 고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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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가 지나 미술관에서 나왔다. 그 동안 문자 몇 통이 와 있었다. (나는 아직도 폴더폰을 쓰고 있다. 4년 동안 쓴 기기다. 아직 멀쩡하다.) '채동욱 검찰총장사퇴. 황교안 감찰지시로. 청와대가 검찰 흔들기를 시작했다.' J가 보낸 문자였다. 헐! 걸리적거리는 인사들은 다 치워 버릴라나 보다. '유치찬란 치사빵꾸'한 술수들을 부려서라도. '대한민국은 거대한 불의와 부정 속에서 움직이는 나라다'라는 말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씨... 완전 개판이잖아! 그래, 유신 만만세다! 원색적인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눈에 띄는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앉았다. 식욕은 없는데 허기가 졌다. 지쳤다. 저녁으로 된장찌개 백반을 먹었다.

다시 서울광장으로 갔다. 범국민 촛불집회장. 그날의 최종 목적지였다. 광장엔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옅게 깔리고 있었다. 상복 차림의 한 젊은이가 눈에 띄어 사진을 찍었다. '축 국정원 장례식' 퍼포먼스. 그가 싱글벙글 웃길래, 국정원의 상주면 이 자리에서 죽은 듯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명박이나 박근혜 대신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맞아 죽어도 좋은 장례식이라 기분이 좋다"고, 내 농을 받아치며 그가 또 싱글벙글.

국정원 축 장례식
▲ 국정원 축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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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서는 '국정원 부정선거 규탄 특검도입 서명운동'을 하고 있었다. 서명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라는 나라에서 국가기관이 인터넷에 댓글달기를 하며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니. 국가기관이 저지른 정치공작 불법선거. 내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투표뿐인데. 나의 신성한 권리가 똥물을 뒤집어썼다. 이 오욕을 어떻게 씻지.

전국 곳곳에서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국정원 개혁', '국정원 해체'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국정원이 '때는 이때다' 주특기를 발휘했다. 수십 년 갈고 닦으며 휘둘러온 무기를 빼들었다. 보수언론과 손발 짝짝 맞춰가며. 통합진보당 당원들과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아하, 매카시즘! 대한민국에서 이것처럼 약발 먹히는 강타가 또 어디 있겠나. 이번에는 야당, 진보끼리도 치고박고 싸울 테니 일석이조.

맞불집회 보수단체 회원들
▲ 맞불집회 보수단체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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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삼삼오오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같은 시각 국가인권위원회 앞에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촛불집회 때면 나타나는 늙은 용사들. 그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맞불집회. '저 종북 세력들의 촛불을 꺼트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국정원 만세!'... 피를 토하는 듯한 연사의 목소리. 쩌렁쩌렁 울리는 군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뭐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 측은하다. 진심으로.

시국회의에서 주최한 범국민 촛불문화제 행사가 시작됐다. 연사들의 발언과 구호와 노래. '국정원 OUT!', '박근혜 하야', '촛불은 계속된다' 피켓을 흔들며. 10시쯤 끝났다.

촛불은 오후 10시쯤 끝나고... 새벽 4시에 실상사 앞에서

촛불 12차 범국민 촛불집회
▲ 촛불 12차 범국민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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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촛불 현장.
 13일 촛불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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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장 한가운데 뻘쭘하게 서 있었다. 얌전히 흩어져 가는 시민들을 바라보며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자라는 괴물(?)은 진화했다. 촛불은 온건해졌다, 마치 퇴화된 듯. 사안이 더 심각한데도'라는 생각을 하며.

휑해진 광장을 나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귀가 길에 올랐다. 돌아갈 길이 멀었다. 동서울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지리산 백무동 행 자정 버스를 탔다. 주말 등산객들로 버스가 꽉 찼다. 새벽 4시께 실상사 앞에서 내렸다. 맑은 공기부터 들이켰다. 답답했던 숨통이 조금 트였다. 마침내 산으로 돌아온 초식동물처럼 온몸에 다시 생기가 돋는 듯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꼈다. 사방 깜깜한 산골이었다. 적막했다. 휴대용 손전등이 있지만,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집까지 30여 분 도보 길. 어둠에 눈이 익자 걷기 시작했다. 람천 둑길로 들어섰다.

문득,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나오는 글귀가 떠올랐다. '모두가 자유를 말하지만 책임지지 않고 도피하기 때문에 억압이 상존한다.' 그래, '행동하는 양심'이다. 아, 김대중 대통령의 '이기는 길...'

나는 그 어두운 길을 혼자 걸으며 '이기는 길'을 무슨 주문처럼 읊었다. 소리 내어 읊고 읊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 안하면 된다. 그리고 상당수는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반드시 지는 길이 있다. 탄압을 해도 무섭다, 귀찮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행동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지고 망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악이 승리한다. 모두가 어떤 형태든 자기 위치에서 행동해서 악에 저항하면 이길 수 있고, 적당히 하면 진다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그런데 아, 씨...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멈춰 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별이 뜨문뜨문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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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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