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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 유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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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출신인 할머니께서는 간혹 내게 월남하시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지 않는 일 중에 하나는 총에 맞아 생긴 허벅지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릴 적 기억으로만 대충 알고 있던 할머니의 월남기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아버지께 물었는데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셨다.

2011년 가을 즈음, 아마도 추석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가족들이 다 모인 틈에 할머니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번 공모를 통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풀어내 본다.

- 안녕하세요. 오늘 할머니의 인생에 관해서 인터뷰를 좀 해보겠어요. 먼저 정확한 고향은 어디인가요? 생년월일도 말씀해주세요.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자봉리지. 할머니는 1932년 2월 17일 출생이고..."

- 할머니, 처녀 시절에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세요.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지. 나는 장녀였고, 내 밑으로 남동생 세 명과 여동생 두 명이 있었어. 나는 말하자면 3남3녀 중 장녀였지."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가족 중에 가장 좋아하셨던 분이 있나요?
"어머니를 가장 좋아했지. 부모님이 아주 좋은 분들이셨어. 굉장히 착하시고 나한테 잘해주셨지. 사실 다른 장녀들은 동생들도 돌봐야 하고 일도 많이 했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나한테 그런 걸 시키신 적이 없으셨어. 항상 당신들께서 다 하셨지. 날 굉장히 곱게 키워주셨어."

- 그럼 학교는 어디까지 다니셨어요? 그리고 할머니께선 어떤 학생이셨나요?
"초등학교까지 다녔지. 그때는 여자면 대부분 초등학교까지 다니곤 했어. 나는 호남초등학교에 다녔었는데 그 당시 나는 수줍은 학생이었지. 초등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운동회를 했던 게 생각이 많이 나. 달리기도 하고 단체로 몸뻬에 반팔 티를 입고 무용도 했었지."

- 아! 정말요? 굉장히 활발하셨을 것 같은데...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부모님들 중매로 만났지.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어. 그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 그렇게 결혼하곤 했지."

- 그럼 첫인상은 어떠셨어요?
"어머니를 뵈러 왔을 때 슬쩍 봤는데... 어려 보2였지. 할아버지가 나보다 한 살 어리셨으니까... (호호호)"

집안끼리 결혼 약속... 19살에 시집 가

- 그럼 결혼은 몇 살 때 하신 거예요?
"19살에 했지. 그때 당시에도 굉장히 빨리하는 거였어. 그게 왜 그렇게 갑자기 빨리하게 됐냐면... 우리 할아버지랑 너희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조선 시대 향교라고 들어봤지? 거기에서 만나셔서 서로 아는 사이셨거든.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끼리 결혼 약속을 했었어. 근데 이제 내 시할아버지, 그러니까 너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천식이 있으셔서 당신이 언제까지 사실지 모르시니까 손주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으시다고 재촉을 하셨지. 그래서 너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투셨다고 하더라고. 그때 할아버지 나이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2였으니까 우리 시아버지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뭐."

- 그러면 결혼하신 이후에 시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떠셨어요?
"사랑을 많이 받았지. 갈등 같은 건 없었어. 만날 "새아가야 새아가야"하시면서 예뻐해 주셨지.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도 굉장히 예뻐해 주셨는데 시할아버지는 결혼 1년 후에 돌아가셨어."

- 그럼 이제부터 월남하신 이야기를 여쭤볼게요. 가족과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월남을 생각하신 계기가 뭐였나요?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이북의 정치가 싫어서였어. 내가 2월 14일에 결혼했으니까 결혼 4개월 후에 전쟁이 났는데... 그해 12월에 너희 할아버지가 학도병으로 지원하셔서 제주도로 가서 훈련을 받으셨거든. 그래서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월남해야겠다고 생각했지."

- 그럼 월남하셨던 정확한 시기와 그때의 정황을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1951년도 8월 중순쯤이었어. 매우 더웠을 때였으니까. 우리 고향이 서해바다랑 가까운 곳이었는데 시아버지와 동네 사람들 10명 정도해서 바다로 나가면 남쪽에서 배가 오기로 되어 있었어.

인민군한테 들키지 않고 가야 하니까 밤에 나갔지. 그때는 밤에 다니는 게 금지되어 있었거든. 밤이 돼서 이제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 같이 바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숨어서 지키고 있었다는 걸 몰랐지. 그래서 인민군들이 우리가 바다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눈치를 채고서는 "거기서!"라고 소리치면서 총을 쐈어. 다들 총소리에 놀라서 도망갔는데... 나는 도망가려고 돌아보는 순간 허벅지에 총을 맞은 거야.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했어. 그래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지. 시아버지는 내가 쓰러지니까 달려와서 옆에 계시다가 인민군들에게 붙잡혀가고 거기 있던 인민군 대장이 부하한테 가서 총을 한 발 더 쏴서 확인사살을 하라고 한 거야. 그 인민군이 총을 메고 다가왔는데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 그러더니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냥 가더라고. 그때 내가 19살이었잖아. 한창 피었을 땐데... (호호호) 그 인민군도 젊었거든. 그때는 인민군도 다 강제로 징집했었으니까.

그 사람이 나중에 말하기를 같은 젊은 사람을 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 대장한테 총을 배에 맞아서 그냥 놔둬도 죽을 것 같아서 총을 안 쏘고 왔다고 전했다고 하더라고. 뭐 어쨌든 그래서 인민군들이 그 자리를 떠나고 혹시 나를 그냥 두면 같은 일행들이 와서 데려갈까 봐 시아버지를 잡아서 앉혀놓고 멀리서 몰래 지켜보고 있었지.

나는 그때 쓰러져서 피가 막 콸콸 쏟아지는데도 잡히면 죽을까 봐 포복으로 한 50미터 정도를 기어간 것 같아. 논두렁 사이의 골 같은 곳에서 잠이 들었어. 나중에 들으니까 시아버지는 멀리서 내가 신음 소리 내는 걸 밤새 들으셨다 하더라고. 아침이 돼서 눈을 떠보니까 해가 높이 떴는데 인민군들이 내가 총 맞은 자리에 없으니까 날 찾으러 다녔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날 찾아가지고는 마을 사람들보고 들것과 가마니를 가져오라고 시켜서 날 부대에 데리고 갔어. 그때 당시에 인민군들이 큰 가정집에 주둔하고 있었거든.

어쨌든 그 주둔지에서 대충 날 치료해주더니 주인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죽을 쒀 왔어. 내가 좀 괜찮아진 것을 보고 날 심문하기 시작하더라고. 높은 사람들이 양쪽으로 권총을 메고서는 왜 남으로 가려고 했느냐, 어디에 사느냐, 가족은 몇이냐 이러면서 신상 조사를 했지. 그때는 무조건 비행기 폭격이 무서워서 나갔다고 대답해야 했어. 그 당시에 국군이 인민군을 공격하려고 폭격했거든. 어쨌든 거기서 뭐 북의 정치가 싫다, 이렇게 말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임을 당하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

시어머니의 지혜 "그 망할 것, 비행기 무섭다고 시부모 버리고 나가"

심문이 끝나고서는 낮에는 폭격 때문에 위험하니까 밤에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어. 밤이 돼서 들것에 다시 실려서 동네 사람들과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다른 마을사람들이 지나가는 거야. 인민군들이 그 사람들을 심문하는데 그 사이에 시아버님이 어디에 가면 베니신(페니실린)이 있으니까 가서 맞으라고 귀띔을 해주셨어. 그 전까진 몰랐는데 시아버지도 그 주둔지에 계속 같이 계셨던 거지. 그 뒤에 시아버지는 평양으로 끌려가시고 인민군들은 나를 집 대문 앞에 놓고서는 우리 집 대문을 총으로 들이치고는 당신네들 며느리 여기 갖다놨으니 나와 보라고 하더라고. 우리 시어머니가 나오시니까 인민군들이 이제 당신 며느리를 총 한 발 쏴서 죽일 테니... 마지막 소원의 한마디를 하라고 그랬지. 그때 우리 시어머니가 정말 지혜로우셨지.

시어머니가 "그 망할 것! 비행기 무섭다고 시부모님도 다 버리고 나갔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라고 이렇게 말하신 거지. 인민군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폭격 무서워서 간 것이 맞나 확인해 보려고 한 것이었는데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들것을 마루 앞에 놓으면서 시어머니한테 간호 잘하라고 하고 가더라고. 열흘 뒤에 시아버지가 석방돼서 돌아오시고 시어머니는 나를 간호해주셨지. 그때 시어머니가 내 대소변 다 받아내시면서 간호해 주셨어. 동네에서 애호박 삶은 것을 총 맞은 양쪽에 붙이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붙였더니 화약독이 막 줄줄 흘러나오고 그랬어."

- 그럼 두 번째 시도는 어떻게 하셨나요?
"그 다음해 4월 중순경에 초등학교 동창들이 찾아와서 같이 남으로 가자고 했더랬지. 해상면이라는 해변가 동네에 아는 집으로 갔어. 가보니까 처녀만 9명이 있더라고. 주인아줌마가 처녀가 너무 많아서 의심받다가 걸리면 안 되니까 나보고는 다른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주인아줌마 애를 빌려서 업고 마치 마실 나가듯이 옆 마을로 가서 다른 집으로 옮겨갔어. 나중에 그 주인아줌마는 다시 애 데리러 왔고. 이제 그 집에서 지낸 지 3일째 되는 날 밤에 남에서 길 안내하는 사람이 와서 배가 왔다고 나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랑 노 젓는 배를 타고서 조용히 남쪽으로 갔지. 한 반쯤 가니까 해가 떴는데 그제야 돛을 달더라고. 좀 더 배를 타고 가서 강화도 위쪽에 있는 교동에 도착했지."

- 한번 총을 맞으셔서 두려우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다시 나가겠다고 결심을 하셨나요?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다른 분들은 반대를 안 하셨는데 작은아버지가 너는 그 총을 맞고도 나가고 싶으냐고 기절할 듯이 말씀하셨어. 나도 두려웠지만, 한번 결심했기 때문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

- 그럼 교동에 도착하신 이후에 할아버지는 어떻게 다시 만나셨나요?
"교동에서 새로 증명서를 만들고 한 달 반 동안 교동에 있다가 인천에 아는 친척 동서네서 지냈지. 너희 할아버지가 그 당시에 군인이었는데도 10일 만에 그 집으로 오셨어. 그 전에도 할아버지는 그 집에 자주 들르곤 하셨거든."

가족 단체 사진.
 가족 단체 사진.
ⓒ 유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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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들이 없는 낯선 곳에서 정착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생활비와 살 집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인천 친척 집에서 지내면서 '메리야스' 공장에 다녔어. 그러다가 임신 후에 그만두고 서울 시댁 숙부님 댁으로 상경했지. 한동안 숙부님 댁에서 지냈어. 숙부님 댁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53년에 너희 첫째 고모를 낳았지. 고모가 돌 지나고 얼마 후에 할아버지가 제대를 하셨거든. 그래서 그 다음부터 친정 6촌 오빠네 얹혀살았어.

그 6촌 오빠네에서 2년 정도 살면서 1956년에 너희 큰 아버지를 낳고 그 다음부터 여기저기 세를 들어 살았어. 그러다가 1958년에 너희 작은 고모를 낳았고. 이제 그 다음에 드디어 1960년에 연립주택을 샀어. 남으로 내려온 다음에 처음으로 내 집이 생긴 거지.

아현동에 있는 연립주택이었는데 처음에 갔을 때는 정말 거지가 살던 곳처럼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어. 그래서 거길 싹 헐어내고 다시 도배하고 깨끗하게 꾸몄지. 그곳에서 이사 간 지 1년 좀 안 된 1961년에 너희 아빠를 낳았고 거기서는 12년 동안 살았어."

- 아... 힘드셨겠어요. 그럼 고향이나 가족들이 가장 그리울 때는 언제셨어요?
"항상 그리웠지. 시부모님과 시할머님, 할아버님이 너무 좋으셨기 때문에 더 그리웠어."

- 월남한 이후에 4남매를 낳으셨는데요. 키우실 때 가장 힘드신 점은 무엇이었나요? 혹시 그 중에 좀 속을 썩인 분이 있었나요?
"다들 착해서 누구 한 명 특별히 속을 썩인 애들은 없었어. 근데 가장 힘들었을 때는 너희 큰아빠를 임신했을 때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 매일 임신한 몸으로도 뜨개질을 했었거든. 그러다 보니 늑막염이 왔어. 그때 늑막염을 치료하려면 약을 먹어야 했는데 그러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근데 치료를 안 하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거든.

근데 다행히 동네에 새로 시집온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가 직접 주사를 놓아 주었어. 그래서 무사히 분만했지. 그리고 작은 고모를 낳고 나서도 고생을 좀 했지. 작은고모가 돌 한 달 정도 전에 열이 막 올랐는데 열이 내리고 나서 보니 몸이 축축 늘어지고 밥은 먹는데 고개를 들지를 못하더라고.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 소아마비라고 하잖아. 크면서 병원이란 병원은 죄다 찾아다니고 한의원까지 돌아다녔지. 그때 겨울이었는데 매일 업고 병원을 찾아다닐 때가 좀 힘들었지."

- 그럼 반대로 4남매를 키우시면서 가장 행복하셨을 때는 언제셨어요?
"애들이 다들 결혼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지. 큰고모가 1976년에 처음으로 결혼했는데 그때 정말 행복했었어."

- 제가 듣기로는 4남매를 키우시는 동안에 집안 형편이 좀 어려웠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할머니가 굉장히 알뜰하시잖아요. 그때 알뜰한 생활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그때 할아버지가 체신부에서 근무하셨는데 그때 공무원 살림이 얼마나 어려웠겠느냐. 절미라고 들어봤어? 절미라는 건 쌀을 덜어놓는 건데 그렇게 매일 밥을 할 때마다 쌀을 한 주먹씩 덜어내서 그게 한 말이 되면 할아버지 잠바, 구두 사드리고 그랬지. 그리고 뜨개질도 매일해서 어떤 날은 하루에 모자를 9개씩도 짰어. 내가 솜씨가 좋았거든. 또 애들 다 쓴 교과서 있지? 그거를 다 잘라서 종이봉투를 만들어서 시장에 갖다 팔았지. 그 당시엔 비닐봉지가 없었고 다 종이봉투를 썼으니까."

- 지금은 4남매 모두 자수성가하고 손자 손녀들까지 잘 컸는데요. 요즘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흐뭇하지.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 항상 할아버지랑 나랑 결혼하고서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 우리가 지금은 고생 많이 하지만, 젊어서 고생하는 건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살았지. 지금 다들 잘 큰 것 보면 정말 든든하고 뿌듯하지. 이제는 우리 건강만 잘 지키면 되니까. (호호)"

- 그러면 지금까지 사시면서 남으로 내려온 것을 후회하신 적이 있나요?
"처음에 남으로 내려왔을 때, 그러니까 친척 동서 네서 살 때는 할아버지도 가끔밖에 못 보니까 너무 외로웠지. 고향 식구들도 너무 그립고 하니까 그때는 잠시 후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후회하지 않아. 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다시 남으로 올거야."

할머니 소원 "살아생전에 고향 땅 한 번 밟아보는 거"

- 그럼 할머니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소원이 있으신가요?
"살아생전에 고향 땅을 한번 밟아보는 거지. 그거라도 안 되면 가족들 소식이라도 듣고 싶어. 이제 장손이 장가가는 것까지 보면 더 소원이 없겠지. 아! 그리고 게이트볼도 열심히 하고 싶어."

- 아!  할머니 게이트볼도 잘하시죠? 게이트볼은 어떻게 시작하신 거예요?
"일산에 살 때 그때 내 나이가 63살이었는데 그 동네에 노인회장님이 게이트볼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고 해보라고 했지. 한번 해보니까 굉장히 재밌더라고. 그래서 동네에서 하다가 잘하게 되니까. 도 대회도 나가고 수원, 분당 이곳저곳 대회도 많이 나가서 상도 많이 탔지. (호호호)"

- 할머니 오늘 인터뷰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할머니 이야기 정말 재밌게 들었어요.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만 해주세요.
"오히려 내가 더 재밌었다. (호호호) 일단 손자, 손녀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자기하고자 하는 길을 갔으면 좋겠고. 우리 아들, 딸들은 건강하기만을 바래. 그리고 우리 남편은 건강 잘 챙기시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인생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다사다난했다. 할머니의 삶 속에 한국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머니께서 이런 큰 인생의 굴곡을 지나오시고도 어떻게 아직도 소녀처럼 순수하신 모습을 유지하실 수 있는지 신기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더 늦어지기 전에 이루어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가족이야기>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월남, #황해도 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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