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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수록 야속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을 향해 가고 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엄마의 말 한 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의 심연까지 제멋대로 휘젓고 다녔다.

"내 아들 잘 부탁한다."

내 나이 쉰이 가깝건만 이제야 엄마의 속내를 알게 되다니…. 씁쓸하고도 눈물이 날 만큼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낮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내 아들을 부탁한다니... 이건 뭐지?'

그날은 친정식구들이 모여 김장을 했다. 부모님의 아파트에는 남동생부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2남 2녀인 우리 4남매. 바로 밑의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은 주말 스케줄이 잡혀 있던 터라 맏이인 나와 셋째가 김장을 돕기로 했다.

평소 부모님만 사는 집이 모처럼 북적였다. 엄마는 자식들의 방문에 신이 나셨는지 아픈 허리를 힘겹게 일으키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일가친척들의 근황을 물으며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엄마는 문득 막내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나이가 마흔이 돼 가는데 직장이 저렇게 불안정해서 걱정이다. 어디 좋은 데 좀 없냐? 더 나이 먹기 전에 안정된 직장으로 옮겨야지, 휴일도 없고 월급도 적고 고생이 말이 아닌 것 같더라."

듣고 보니 나도 걱정이 됐다. 막내는 결혼해 자식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더니 부모님께는 전에 없이 살가운 아들이 되었다. 엄마 말처럼 안정된 직장만 구한다면 부러울 게 없어 보였다.

나는 최근에 만났던 동창을 떠올렸다.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친구는 사업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어서 마침 직원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는 반색을 하신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 참 잘 됐네. 니 동생만 좋은 데 취직이 된다면 내가 한시름 놓을 수 있지. 꼭 취직될 수 있게 그 친구한테 동생 얘기 잘 해주고. 내가 이날 이때까지 너한테 우리 아들 부탁해 본 적 있냐? 이번에 내 아들 잘 좀 부탁한다."

11남매 중 여섯 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네 명의 동생을 동네 뒷산에 묻어야 했던 한 많은 여인 우리 엄마. 74세가 된 지금 엄마의 형제 중 생존해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우리 엄마 11남매 중 여섯 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네 명의 동생을 동네 뒷산에 묻어야 했던 한 많은 여인 우리 엄마. 74세가 된 지금 엄마의 형제 중 생존해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이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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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딸인 나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니, 이건 뭐지? 묘한 기분에 언짢은 표정이 드러났는지 옆에 있던 동생이 거들었다.

"엄마, 내 동생을 누나한테 부탁한다고? 그럼 나도 엄마한테 내 동생 부탁해야겠네. 제 동생 잘 봐 주세요."

동생의 말에 웃음이 돌며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엄마의 말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며 자꾸만 곱씹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를 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뭔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고 있던 참이었다.

항상 엄마 곁에 있었고 결혼해서까지도 육아 때문에 친정집 근처를 떠나본 적이 없건만, 어찌된 일인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엄마와의 사이는 더욱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엄마의 말 한 마디는 내게 잠자던 기억들을 일깨우며 엄마와 장녀인 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엄마는 그랬다. 남동생들이 집이든 차든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거저 내주었다. 같은 형편에 처했을 때 내게 돈을 빌려주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나 역시 부모님이 어렵게 살아온 것을 알기에 무조건적인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처지가 더 어려운 동생이기에 엄마가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엄마는 못마땅해 했다. 내게 실업계 고교 진학을 요구하셨던 엄마, 그 뜻을 어기고 나는 인문계 고교를 나와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닌 지 3년 만에 결혼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구나…."

그때는 엄마가 왜 그렇게 서운해 하는지 몰랐다. 단지 어려운 형편에 맏이인 내가 살림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못마땅함으로만 이해됐다. 사실 나 역시 맏이로서 나름 고생을 겪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사를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열 살 무렵부터 동생들을 먹이고 씻기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부모님의 늦은 귀가로 청소하고 저녁을 지어놓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땐 나도 어렸는데…. 그 어린 시절이 가끔씩은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건만, 속도 모른 채 당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요즘도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흉을 보곤 하신다.

엄마가 그토록 돌보기를 원했던 동생들은 '남동생'들이다. 두 살 터울인 여동생은 엄마의 소원대로 상업계 고교에 진학했고, 내가 했던 집안일을 이어받았다. 

딸과 아들에 대한 차별, 남아선호, 지금까지 부정해 왔지만 자식을 향한 엄마의 애정은 그렇게 다르게 존재해 왔다는 것을 나는 그 밤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나이 마흔 일곱이 돼서야 엄마의 마음을,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본심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딸의 희생을 아주 당연시 여겼던 부모님 기대를 채워주는 장녀 노릇은 못하고 있다고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 그만큼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과 딸에 대한 애정의 강도와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한동안 친정집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승용차로 10분 거리, 지척에 있는 친정집이지만 김장을 마치고 한 해가 바뀌어 금년 설이 돌아와서야 마지못해 부모님을 찾았다. 이 나이에 무슨 유치한 짓인가 싶고, 나도 자식이 있는 어미인데 이해 못할 게 뭔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울컥 치밀어 오르는 억울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년에 생소해진 존재 엄마, 그녀가 떠올랐다

'가족 인터뷰'.


인터넷을 뒤지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글자가 생소했다. 웃긴다, 다 알고 있는 가족을 마치 남처럼 인터뷰하다니…. 그때 내 나이 중년에 이르러서야 생소해진 존재, 엄마가 떠올랐다. 내게 왜 그러셨어요, 따지지 말고 엄마의 생각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들어나 보자. 그러고도 이해가 안 되면 그때 가서 미워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번 추석을 닷새 앞두고 친정집을 찾던 날, 마침 TV에서는 월셋방에서 여섯 자녀를 키우며 사는 30대 주부의 사연이 다큐로 방송되고 있었다. 엄마는 힘겹게 자식들 키우던 때가 생각이 나는지 안타까워하신다. 송편을 빚으며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옛날 얘기 좀 해줘요. 엄마도 애를 넷이나 낳았지만 외할머니는 열도 넘게 낳았다며?"
"열 한명을 낳았지. 6남5녀를 낳으셨는데 큰이모(언니), 나, 작은이모(동생) 이렇게 셋만 살고 다 죽었잖냐."
"딸보다 아들을 더 많이 낳으셨는데 그중에 한 명도 못 건지신 거야? 왜 그렇게 됐대?"
"그게 홍역 같은 돌림병 때문이었지. 애기들이 태어나서 백일, 돌을 못 넘기고 다 죽는 거야. 내 밑에가 아들이었는데 그 애만 그래도 너 댓 살까지 살았나봐. 다른 애들은 전부 애기 때 죽었어."

여기까지는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다. 내가 좀 더 관심을 보이자 엄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을 꺼내놓으신다. 

외할머니가 낳은 열한 남매 중에서 첫째 아들은 죽고 둘째인 큰이모는 생존했다. 계속된 출산과 영아사망 끝에 여섯째인 엄마를 낳았고, 그 밑으로도 아들 넷과 딸 한 명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운명인지 엄마의 동생들 가운데 여동생만 살아남고 남동생 넷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찬 큰이모는 시집보내고 집에 자식이라고는 엄마만 있었으니 할머니는 여섯째딸을 의지하며 사셨던 것 같다. 아기가 태어나 아프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엄마를 데리고 절이며 무당집을 전전했다. 어린 딸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 엄마가 학교를 안 보내 주는 거야. 아기를 보아야 하니까. 부모님은 농사일 때문에 바쁘고, 내가 아니면 애기 볼 사람이 없잖아."

친구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엄마는 아기를 업고 할머니가 일하시는 논을 찾아다녔다.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가야 할머니가 젖을 물릴 수 있었으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논일 품앗이를 많이 했어. 우리 동네를 지나고 그 옆 동네를 지나 먼 데 이웃한 마을까지 품앗이를 나가시는 적도 있었어. 아기를 업고 아무리 걸어도 한나절이야. 그렇게 해서 간신히 엄마를 찾아갔는데 그 동네 애들이 자기 동네라고 못 들어오게 하는 거야. 막 밀치고 얼마나 괄시를 하던지…."

네 명의 동생 묻은 엄마, 이제야 이해합니다

추석을 닷새 앞둔 지난 14일 친정집에서 부모님과 송편을 빚으며 엄마의 지난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 송편 빚던 날 추석을 닷새 앞둔 지난 14일 친정집에서 부모님과 송편을 빚으며 엄마의 지난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 이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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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기들을 돌봤지만 네 명의 동생은 마을 뒷산에 묻어야했다. 그 사이 세월은 흘러 엄마는 열다섯 살이 돼서야 국민학교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친정집의 낡은 앨범에 들어있던 누렇게 변한 졸업사진. 앳된 얼굴들 사이로 머리 하나가 더 올라올 정도로 키가 크고 유난히 성숙해 보이는 처녀가 엄마라고 했다.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엄마는 왜 이렇게 커?"라고 물었는데, "다른 애들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그렇지"라고만 하셨다. 전쟁 통에 취학시기를 놓쳤나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거기에 그런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당시에는 짐작도 못했다.

딸만 셋 둔 외할머니에게 아들은 풀지 못한 한이었다. "내가 아들을 못 낳아봤다면 이렇게까지 한스럽지는 않겠다"고 탄식하시곤 했단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가 가엾기 그지없었다.

부모님이 다섯 살이나 많은 팔촌오빠를 양자로 들이셨을 때 엄마는 기뻤다고 한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건장한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할 때면 "어쩌면 저렇게 둘이 똑 닮았냐, 양자가 아니라 친아들 같다"는 동네사람들의 감탄조차 흐뭇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양아들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태 후 엄마마저 결혼을 한 후에는 아예 정신을 놓고 사셨다고 한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던 동네 처녀애들도 발길을 끊고 할머니는 저녁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고 하더라. 그러다 내 친구들을 만나면 주머니에서 화투짝을 꺼내며 같이 놀자고 그러셨대."

엄마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느이 할머니가 불쌍하고, 나도 그런 엄마 팔자를 닮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더라."

엄마의 걱정은 큰딸인 나와 여동생을 낳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연이어 아들 둘을 출산해 키우면서 근심은 점차 사그라졌다.

"난 그놈들이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더 바랄 게 없어."

엄마에게 두 아들은 보면 볼수록 빛나는 보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들이란 모녀의 맺힌 한을 풀어준 하늘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그런 엄마를 향해 "고작 그것 때문에 나를 힘들게 했느냐"며 대들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 나는 엄마에게 '자매애'를 느끼고 있었다. 우리 시대 박제될 것이 분명한 남아선호의 마지막 희생물이 엄마와 나라는 데서 오는 유대감이었을까.

외할머니와 엄마와 나, 세대를 거쳐 오며 이 땅의 딸들을 아프게 했던 것들. 나는 결심한다. 이제 그 아픔을 그냥 안아주기로 하자. 일흔 중반,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다짐한다.

"엄마, 당신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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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족 인터뷰, #가족이야기, #남아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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