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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철저한 기록문화는 의궤에서 그 빛을 발했다. 혼례, 세자책봉, 장례, 종묘에서의 제사와 같은 왕실의 의식부터 실록의 편찬, 성의 축조와 같은 국가적인 사업, 악기 제조나 잔치를 베푸는 일처럼 다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행사들이 의궤로 제작되었다. 의식과 행사의 선례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법도에 맞게 의례를 치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의궤 제작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의식의 과정과 사용한 물품,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행사에 쓰인 각종 기물과 복식 등을 그린 도살과 행사 장면을 그린 반차도도 함께 그려져 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본문에서

2011년은 우리 문화재사에 기념비적인 해다. 병인양요(1866년) 당시 프랑스 해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 297권'이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해이기 때문이다. 약탈 당한 지 145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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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는 왕이 보기위해 만든 어람용과 여러 사고에 보관해두기 위해 만든 분상용이 있다. 둘은 내용은 같지만 '질과 수준' 차이가 크다. 어람용은 질이 좋은 초주지를 사용하는데다가 직접 손으로 그리고 채색한다.

반면, 분상용은 저주지를 사용하는데다가, 일부는 판화로 찍기도 한다. 이런지라 채색이나 세부 묘사가 뛰어난 어람용에 비해 색도 탁하고 세부묘사가 생략되기도 한다.

이번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어람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데다가, 국내외 한 점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것들도 있어서 우리의 의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2010년 11월 중순 어느 날,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 의궤를 우리에게 돌려주기로 합의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비로소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에 20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솔직히 이 뉴스를 접하기 전까진 외규장각 의궤를 생각하면 아쉽고 씁쓸하기만 했다. 고속철도부설권을 떼제베(TGV)에 주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기로 했다는 1993년의 뉴스와 그러나 돌려받지 못하게 됐다는 그 이후 언젠가의 뉴스들을 기억하고 있었던지라 돌려받지 못하는 문화재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협상은 정확히 20년이 걸렸다. 오랜 시간 동안 힘겨운 줄다리기를 계속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대립과 갈등은 점차 심해져, 이 문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저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왜 약탈해간 문화재를 돌려달라는 지극히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오히려 약탈 행위를 한 쪽에서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며 자기들 멋대로 조건을 제시하고 대가를 요구하며 당당하게 나오는 걸까?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가진 자가 임자인 것이다. 안주고 버티는데 찾아올 도리가 없다.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으름장을 놓고, 정당성을 주장하고 심지어 사정까지 해도, 자기네 국가 소장품이라고 끄떡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20년에 걸친 외규장각 의궤 반환협상 동안 수많은 논리와 비난, 주장과 가설들이 오갔다.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지금,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 그 일을 맡았던 실무자로서 외교 현장에서 겪었던 위협적인 순간들, 반복되는 좌절과 수시로 닥치는 위기들, 그런 가운데 만났던 여러 사람과의 다양한 인연에 대해 느끼고 겪은 그대로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저자의 말'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눌와 펴냄)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얽힌 '그 숨은 이야기'들을 한 외교관이 쓴 것이다.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미테랑이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서울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 참석하며 <휘경원원소도감의궤>1권을 가지고 와 우리 정부에 전달함으로써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의 뜻인지라 우리 국민들은 100%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하루빨리 돌아올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애초의 약속과 달리 프랑스 측에선 고속철도부설권만 챙기고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유야 어쨌든 프랑스 측에서 고속철도부설권만 채가고 만 꼴이라 우리 국민들은 프랑스에 분노했고, 우리 정부의 능력 부족에 실망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우리 정부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분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우리 국민들은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 사업권을 따내는 대가로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약속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속철도 사업권은 그 전에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의 고속철 TGV의 최초 해외 진출 계약이라는 큰 성과에 대해 우리 국민들에게 각별한 우의를 표하고자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단지 보여주려고 가져왔던 것. 그런데 즉흥적으로 프랑스국립도서관 측과의 약속을 어기고 우리에게 이 의궤 한 권을 반환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의 위법 행위에 당시 프랑스 여론은 들끓었단다. '공권력의 횡포'라고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역사인 나치 협력 정부에 비유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까지 했단다. 이와 함께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 행정담당자였던 마담 상송을 비롯한 여러 관련자들이 사표까지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반환 협상 초기부터 우리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했던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은 한국과 프랑스 관계자들에게 '한국과 프랑스 양국에 내려진 저주'라 불릴 정도로 별다른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20년 동안 난항만을 되풀이 하게 된다. 

1997년에 외교관을 시작해 김대중·노무현 두 분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 시 통역을 했던 저자는 지난 십수 년 간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 실무를 맡았었다고 한다. 외규장각 반환 협상 과정과 수많은 우여곡절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한국과 프랑스 양국에 각각 '빼앗긴 문화재'와 '자국민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의 당연한 결과물'인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둘러싼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수필 형식으로 들려준다.

협상이 진행되던 지난 20년 동안 한국과 프랑스 양국 국민들을 화나게 한 제안들과, 남의 나라에서 약탈해간 문화재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프랑스인들과 프랑스 문화재관련법의 실체,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숨은 공로자들, 외교관들의 열정과 노력, 고 박병선 박사와 외규장각 의궤, 프랑스인들이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주지 않으려 했던 진짜 속사정, 장기대여라는 명목으로밖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대여'란 명목의 실체 등을 만날 수 있다.

고 '박병선 박사'와 '외규장각 의궤'
"창고에 큰 궤짝들이 여기저기 있더라구. 그 속에 외규장각 의궤가 들어있었던 거야. 가슴이 두근거렸지. 그리고 맨 위에 있던 의궤 한권을 들어서 펼쳐보았는데 말이야. 글쎄, 책에서 묵향이 나는 거야. 책이 쓰인 지 200년은 족히 될 텐데, 종이에 배어 있는 묵향이 은은히 밀려드는 거였어. 강화도에서 프랑스 땅까지 온 뒤로 누가 뭐 그렇게 이 책을 열어보았겠어? 그러니 묵향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아. 그때의 내 기분은 정말이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저자와 고 박병선 박사의 대화중에서.

1975년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임시직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전 역사학자, 1928~2011.11)는 조선 말기 주한 프랑스공사관의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모리스 쿠팡이 쓴 <한국서지>에서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무작정 찾아 나선다. 그러나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아무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해 낙심한다. 그러던 중 한 프랑스 동료로부터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 한자가 쓰인 고서들이 잔득 있다는 이야길 듣고 창고를 뒤진다. 그리하여 큰 궤짝 속에 들어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게 된다.

박사가 외규장각 의궤를 처음 발견할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측은 출처를 모른 채 중국 도서로 분류해 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까지 우리는 외규장각 의궤가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도서와 사료 5천여 점을 모두 불태운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박사는 우리 정부에 프랑스에 반환을 요청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박사의 권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시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동백림사건(1967년 중앙정보부가 독일과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유학생과 교민 197명이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던 간첩단 사건. 이후 확대·과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프랑스에 귀화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은 프랑스인이면서 한국 정부에 프랑스 문화재 반환을 종용했다는 이유로 박사를 해고한다(책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

덧붙이는 글 |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유복렬 (지은이) | 눌와 | 2013-08-12 | 13,000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145년의 유랑, 20년의 협상

유복렬 지음, 눌와(2013)


태그:#외규장각 의궤, #병인박해, #프랑스, #박병선 박사, #떼제베(T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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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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