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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손편지 한 통과 이메일 편지 한 통. 손편지는 마을 한글교실의 김복순 할머니가 보냈다.

 

'사랑하는 선생님

벌서 가을이 다가오나 봐요. 오고기 이거가고 인나봐요.(...) 아무거도 모르는 이 늘근 우리를 공부 가를처주셔서 정말 감사함인다. 김복순 올림.'

 

이메일 편지는 막내딸이 보냈다.

 

'안녕, 엄마! 잘지내요? 지금 저는 law school 잘 다녀요.(...) 오빠는 LA에서(...) 산하는 Kansas에서(...) 그럲대, 산하는 10월에 일분에 갈거에요(...) 외할무니 외할아부지는 어때요? 엄마는? 지금 멓애요? 엄마, 보고싶어요! , 여름이가'

 

편지 두 통 다 맞춤법이 엉망이다. 문장력이 초보수준이다. 그 점에 있어서 두 통의 편지는 각각 내게 다른 느낌을 준다. 딸의 틀린 글씨는, 아프다. 김 할머니의 틀린 글씨는 오히려, 정겹다. 두 사람이 나와 관계가 달라 그럴까. 사연이 달라 그럴까.

 

독서 동화책 읽는 할머니


요즘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마을회관에 책을 갖다놓은 후부터였다.('우리 마을이 복 받은 겨, 이런 사람이 와서 살다니...'를 읽고, 오마이뉴스 독자 한 분이 청주에서 동화책 2백여 권을 보내주셨다.) 그때부터 할머니들이 수업 시간보다 몇 십분 앞질러 출석한다. 수준에 맞는 책을 부리나케 골라들고 읽기 시작한다. 연필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내가 뒤에 들어서면 ', 선상님 오셨네!' 눈인사를 짧게 보내곤, 이내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독서 김복순 할머니


한번은 김복순 할머니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참말로 슬픈 이야기구먼." 김 할머니가 앞에 놓인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얘긴데요?" 내가 물었다. ", 할매가 혼자 손자를 키웠는디, 사는 게 뽀듯현 겨. 근디 손자는 장바닥에서 채소 파는 늙은 할매가 챙피혔어. 피해 댕겼댜. 근디 뭐시냐, 야가..." 김 할머니가 다시 눈물을 닦았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참말로 쭈구렁 바가지 돼 갔고 공부헌다고, 눈도 깜깜헌디... 십 년만 더 일찍 배웠어도 좋았을틴디... 난 뭐시냐, 내가 살아온 평생을 한번 쭉 써보고 자픈디..."

 

선물 오마이뉴스 독자 분이 보내준  동화책을 한글교실에 비치하다.
편지 동화책 보내준 분에게 할머니들이 감사편지를 써 보냈다.


이른 일곱의 김복순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다. 옆에서 듣던 김순달 할머니가 한 마디 했다. 김순달 할머니는 항상 흥이 넘치는 분이다.

 

"은제 다 배워서? 긍께 나는 저승에 가서나 써 먹을란다!"

 

'배움'엔 끝이 없다. 그러나 뭐든 '배움의 시기'는 있지 않나. 효과 면에서 보자면.

 

내가 처음 한글 강사를 했던 때가 1991년도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소노마 카운티에 살 때였다. 소노마 카운티는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태평양 해변과 전원풍경이 아름다운 곳. 당시 그곳에 한인들이 2백여 가구 살고 있었다. 한인교회도 세 개 있었다.

 

나는 그때 남편과 심각하게 대립 중이었다. 아이들 교육문제를 두고. 아들이 네 살, 쌍둥이 딸들이 세 살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말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들에게 어디서든 영어로 말하라고 했다. 부모의 상반된 교육관이 아이들에게 혼란과 상처를 주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말로 설득해도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앞으로 미국에서 살아갈 미국시민이다. 한국어 필요 없다. 한글 배우면 미국 애들의 영어 못 따라간다.' 남편은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 역시 내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메리칸'이 아니다.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은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일부러 이중 언어 교육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길게 보면 결코 영어 습득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당시 우리 집을 자주 방문하던 한인교회 목사 부부가 있었다. 어떡하든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려는 사명감에. 그냥 다니다 보면 믿음이 생긴다며 열심히 꼬드겼다. 그 목사님에게 내가 제안을 하나 했다. 교회에 나갈 테니, 대신 한글교실을 하게 장소를 빌려 달라고.

 

드디어 그 교회에서 한글교실을 열게 됐다. 세 아이들을 데리고. 매주 일요일 예배가 끝난 후. (나는 1985년도 대학 때, 서울 구로공단지역에서 야학 교사를 했었기에 가르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한국학교 1992년 소노마 카운티 한국학교에서 학생들이 직접 쓰고 그려 만든 문예지. 그 당시 부모님을 모시고 발표를 하는 학생과 나.


처음에는 그 교회 아이들을 모아 시작했다. 물론 무료 수업이었다. 그런데 학생 수가 금세 불어났다. 곧 학부형을 중심으로 이사회가 조직됐다. 몇 달 지나자 장소를 옮겨야 했다. 학생이 백여 명으로 늘었다. 무용선생님, 음악선생님까지 자원교사도 열 명. <소노마 카운티 한국학교>가 정식으로 섰다. 교실은 미국학교 건물을 빌려 썼지만. 나는 그곳을 떠날 때까지 3년여 동안, 매주 일요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십 수 년이 지나, 서울을 방문한 그때의 학생들을 몇 명 만났다. 모두 멋진 청년으로 컸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내게 한국말로 재재거렸다. 기특했다. 기뻤다. 그러나 한편, 마음 아팠다.

 

정작 내 아이들에겐 한국어를 가르치지 못했다. 나는 한국어가 서툰 내 아이들과 속 깊은 절절한 얘기들을 나눌 수 없다. 일상 가벼운 대화야 영어로든 한국어로든 한다지만.

 

그 당시 남편이 끝끝내 생각을 고쳐먹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내 부모는 내게서 영어를 배우려고 한국말을 못하게 했다. 원망스럽다...' 라고 말하는 교포2세 대학생도 만나게 해주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이들의 한국어 교재와 한국어 동화책들을 몽땅 내다버렸다.

 

네이티브 스피커인 아이들은 '모국어'인 영어를 어느 때나 편하게 사용했다.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영어였다.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아이들은 아빠 따라 한국어와 멀어졌다. 내가 더 붙들고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고나서야 스스로 알게 된 것 같다. 지구촌 어디에서 살든 한글을 배워야 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기를 놓쳤다는 것을. 막내딸 여름이는 삼년 전 여름방학을 이용해 서울에 왔었다. 연세대 어학당에 다녔다. 듣고 말하는데 간신히 초보수준은 벗어났다.

 

그런데 그때 여름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 한국 사람들은 한국말 싫어해요?"

"?"

"이상한 영어를 정말 많이 써요. 한국말은 창피하고, 영어는 부러운 건가요? "

"아니."

 

아니라고, 내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왠지 새빨간 거짓말을 할 때처럼 속이 뜨거웠다. 'Hi Soul'이 뭐냐 묻던, 미국인 친구 제프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의 입 꼬리에 매달렸던 비웃음도.

 

'영어상용화정책' 논란이나 '영어몰입교육' 같은 한국의 속사정을, 여름이나 제프가 알았다면 뭐라 했을까. '세계화', '국가경쟁력' 따위의 이유를 대며, 내가 그 사회현상들을 두둔했다면 먹혔을까. 여름이에게 한국 사람은 한국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제프의 입꼬리에서는 비웃음을 거둬낼 수 있었을까. 아니다. 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것이다. '멍청한 짓이야!' 라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언어가 얼마만한 힘으로 사회와 문화와 인간의 정체성과 영혼에 작용하는지, 흥분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오늘은 서울에서 지인이 보내준 학용품을 할머니들에게 나눠주었다. 딸이 나눠 쓰라 보냈다며 김순달 할머니도 학용품을 한 보따리 풀어놓았다. 새 공책, 새 연필, 새 지우개를 받은 할머니들의 표정이 접시꽃마냥 환해졌다.

 

받아쓰기를 했다. 할머니들은 곁받침과 연음법칙 때문에 골머리 아파했다. , , 낯처럼 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말들도 헷갈려 했다.

 

"오메, 참말로 복장 터지 것네! 다 틀렸네, 다 틀렸어!"

 

받아쓰기가 끝나자 김복순 할머니가 탄식했다.

 

"세종대왕님께서 글자를 너무 어렵게 맹기신 거 아녀?"

 

그럴 때 할머니에게 '한글은 동아시아 수천 년의 문자사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불가사의한 경이임을 깨닫게 된다'라며 한글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며 극찬한,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을 읽어보라고 권할 수도 없고.

 

"틀리닝께 배우러 오지, 한 개도 안 틀리면 뭣 땀시 오겄어? 배우는 게 시상 재밌구먼."

 

김순달 할머니가 웃어가며 받아쳤다.

 

"맞다, 맞다!" 할머니들이 복창했다.

 

"선상님, 목 아플틴디 술 좀 묵구 가요. 밥도 한 솥 있은 께 묵구 가요."

 

방과후 수업 끝나고 모여 앉아 먹는 밥. 된장국과 푸성귀 반찬 몇 가지로도 꿀맛 같은 밥상.


끝나고 나오려니 할머니들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또 할머니들이 권하는 맥주 한 '고뿌'를 마셨다. 할머니들은 수업이 끝나면 자주 나를 붙들어 앉힌다. 내게 밥을 먹이고 술을 먹인다.

 

"참말로 사는 게 재미지구먼. 요리 모여 공부도 허구, 밥도 같이 묵구..."

 

김순달 할머니의 말대로, 사는 게 순간순간 참 재미지다.

 

이제 김복순 할머니와 딸에게 답장을 써야겠다.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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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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