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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여행의 장점이란 짧은 기간에 많은 곳을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진짜 원하는 폭이 넓고 깊이가 있는 여행이 되기보다는 주마간산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동유럽 10일간의 여행도 그랬다.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반나절, 목적지의 관광에 반나절. 이런 일정으로 그곳 주민의 생활에 접근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여행사의 일정대로 유명 관광지에서 사진이나 찍고 돌아섰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마 오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자기 위안, 그리고 스치는 곳에서의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여행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여행 9일째였던 지난 8월 21일. 오스트라바라는 체코의 도시에서 1박을 하고 출발한 시각은 오전 8시 30분께. 프라하에 도착해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시내 투어에 나선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기억하는 내게 현지 가이드가 설명을 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다만 '이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정치 참여도도 낮다'는 설명은 의외였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웃 헝가리가 1956년 10월 23일 시민 봉기의 날을 혁명 기념일로 정해 거국적으로 기억한다는 사실과 너무 달랐기에 놀라웠다고 기억한다. 아마 개방 이후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을 둔 개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짐작해봤지만 지금도 궁금증은 남는다.

프라하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

한국의 파출소같은 경찰 사무실.
점심을 먹은 한국 식당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 프라하의 경찰 한국의 파출소같은 경찰 사무실. 점심을 먹은 한국 식당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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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성 내에 있는 체코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상징적인 성당. 
1344년 건설이후 1929년까지 증 개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 성 비트성당 프라하 성 내에 있는 체코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상징적인 성당. 1344년 건설이후 1929년까지 증 개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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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는 프라하성의 정문이다.
경비는 있으되 24시간 자유롭게 개방되는 곳이다.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 프라하성의 성문 지금은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는 프라하성의 정문이다. 경비는 있으되 24시간 자유롭게 개방되는 곳이다.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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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타바강을 건너는 유명한 카를교 입구에서 구 시가지쪽을 잡은 사진이다.
수 백년 된 아름다운 건물은 지금도 갖가지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 카를교 입구 블타바강을 건너는 유명한 카를교 입구에서 구 시가지쪽을 잡은 사진이다. 수 백년 된 아름다운 건물은 지금도 갖가지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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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골목을 들여다보면 중세의 여인이 튀어나올 것 같은 중세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도시.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찍었던 곳이라고 소개했지만, 드라마를 보지 않았기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문학적인 정감이 살아나는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비행기가 투하한 포탄 한 방에 독일에 항복해버린 나라였다. 때문에 폴란드와 헝가리가 독일에 저항해 온 국토가 초토화되고 있을 때 프라하는 독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 천문시계가 남아 있는 건물은 당시 시청이었다. 그 시청의 뒤편은 독일의 폭격기의 포탄에 날아갔는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의 항복 요구 통첩이 있은 뒤 22시간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당시 체코 정부가 항복했던 명분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당시 체코 지도자들이 오늘날 관광객이 모이는 프라하의 모습을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체코 지도자들은 체코의 자존심을 버렸다. 그리고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라하는 온전할 수 있었다.

체코의 치욕적 선택, 전화위복 됐네

체코 성인들의 상이 줄지어선 다리위에 관광객은 넘치고 악사 화가들도 많다.
▲ 카를교 체코 성인들의 상이 줄지어선 다리위에 관광객은 넘치고 악사 화가들도 많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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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천문시계.
매시 정각이면 예수의 12 사도들이 나오는 모습, 해골 인형의 움직임, 닭 울음소리가 잛은 시간에 전개되는데 그 시간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발돋움을 했다.
▲ 천문시계 프라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천문시계. 매시 정각이면 예수의 12 사도들이 나오는 모습, 해골 인형의 움직임, 닭 울음소리가 잛은 시간에 전개되는데 그 시간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발돋움을 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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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었던 광장.
지금은 관광객만 넘치는 거리가 되었다.
▲ 바츨라프 광장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었던 광장. 지금은 관광객만 넘치는 거리가 되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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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에 끝까지 맞서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폴란드는 수도 바르샤바는 물론 온 국토가 초토화됐다. 반면 22시간 만에 백기를 든 체코의 프라하는 지금 세계적인 관광지가 돼 관광객을 불러모아 경제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체코 인구는 약 1000만 명인데 찾아오는 관광객은 연간 70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치 독일에 끝까지 맞서 국가적인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폴란드와 현실적인 항복의 길을 택한 체코는 현실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죽더라도 싸워 나라를 지키자는 명분론과 항복해 목숨을 구하자는 현실론의 대립은 많았다. 지금도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국가적인 정책 결정 시 명분론과 현실론의 갈등은 조금씩 있다고 본다. 사안에 따라 국민의 판단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국가의 존망이 걸린 자존심의 문제에서는 명분론이 우세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체코 정부의 자존심을 굽혔던 치욕적인 선택이 현재는 전화위복의 사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국가적인 자존심을 지킨 폴란드의 결정을 우직하다고 봐야 할까. 당시 체코의 항복을 민족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치켜세워야 할까. 프라하 거리를 헤매며 지금은 웃지 못할 해학적 역사의 아이러니가 된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사람들은 물론 동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모욕적인 욕 중 하나가 바로 체코인에 빗대 비웃는 것이라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린 체코를 잊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혹시 아직도 골수 사대주의적인 정치가들과 국익보다 사복을 채우기에 능한 정치가들이 자신의 비겁과 무능과 파렴치함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오늘 체코 프라하의 사례를 자신들의 정치적 처신에 악용하는 사태가 발생할까 싶어 걱정이다. 기우일까?

블타강(몰다우강) 건너편에서 본 프라하성.
▲ 프라하 성의 야경 블타강(몰다우강) 건너편에서 본 프라하성.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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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여행사가 소개한 프라하성, 성 정문앞의 광장, 그 옆의 성 비트 성당, 캄파섬, 바츨라프 광장, 전설의 천문시계….

살아있는 사실이 축복임을 가르쳐주는 천문시계 앞에 모인 관광객들도 또 다른 관광의 대상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프라하 , #카를교, #천문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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