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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어린이를 위한 세 가지 무기

8월 1일 제주 한라도서관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니는 30명의 어린이들과 역사적인 책놀이 첫 번째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과 20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만난 일은 없어서 떨리고 무서웠습니다. 얼마 전 경북의 동성초등학교 어린이들과 2시간짜리 '책놀이 가족오락관'을 했을 때의 '카오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번 프로그램은 도서관에서 주최하고 일주일 만에 마감이 될 정도로 지역의 부모님들께 큰 관심을 받아서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동기 부여가 어느 정도 되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을 단단히 했습니다.

우선 세 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첫 번째로 한 생각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자."입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척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 말 걸어주는 사람, 친구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내가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준다면 아이들도 분명 친구처럼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존중하자"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을 하면 아이들의 자존감이 커지고 책놀이 프로그램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강제하지 말고 아이들의 의견을 최대한 듣고 반영해서 책놀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을 어린이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장기기억보다는 작업기억으로"입니다. 사실 아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작업기억'이었습니다.

작업기억은 정보를 저장하는 뇌의 일부분으로 임시기억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낯가림을 시작하는 생후 7개월쯤부터 개발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어른에 비해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어른의 배에 가까운 시냅스 연결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시냅스(synapse)란 두 신경 세포 사이나 신경 세포와 분비 세포, 근육 세포 사이에서 전기적 신경 충격을 전달하는 부위입니다. 두 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거의 실시간으로 아이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피드백을 주어야 합니다. 시냅스 연결이 활발하지 않은 저 같은 어른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과제입니다. 저는 두 시간 동안 일어날 몇 개의 활동을 아주 헐겁게 정하고 아이들이 살을 채워가도록 했습니다.

어린이를 놀이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나에게 찾아온 어린이들은 대개 엄마가 도서관의 안내문을 보고 등록한 경우입니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책놀이에 오기 싫었는데 엄마가 오라고 해서 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주인공이고 어린이들이 조연인 채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관건은 어떻게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 것인가입니다. 저는 2회차 공지를 어린이들에게 미리 했습니다.

"내일은 책놀이 운동회를 할 거에요!"

'운동회'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운동회를 할 거냐고 막 물어봤습니다. 저는 천천히 말하며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켰습니다. 몇 개의 놀이는 선생님이 만들었는데 여러분들이 만든 놀이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청팀과 백팀으로 두 팀을 나눠야 하는데 팀을 어떻게 나누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자리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은 다음에 차근차근 말하라고 안내를 해주었더니 손을 번쩍 듭니다. 이렇게 해서 네 가지 주장이 나왔습니다.

조현철 : 저는 이렇게 딱 반 잘라서.
이한결 : 저는 여자 남자 나눠서 하면 좋겠습니다.
윤기현 : 대표를 정해서 팀을 뽑으면 좋겠습니다.
문서현 : 종이에 자기가 원하는 팀을 적어서 나누고 팀이 적으면 다시 정하면 돼요.


네 명의 후보를 앞으로 오게 한 다음에 자신이 주장하는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하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깊이 고민하면서 차분히 단어를 고르며 친구들을 설득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제가 다 대견해 보였습니다.

이한결 : 저는 이한결입니다. 저는 여자 남자로 팀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여자 남자로 팀을 나누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조현철 : 저는 조현철입니다. 저는 손으로 반띵해서 청군 백군 정하면 좋겠습니다. 쉽게 쉽게 해요.
윤기현 : 윤기현입니다. 저는 남자 여자 대표를 정해서 팀을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여자가 잘 섞이면 좋기 때문입니다.
문서현 : 저는 문서현이라고 합니다. 저의 의견은 자신이 원하는 팀을 적어 투표를 하면 좋겠습니다.


한결이는 여섯 표를 받았고, 현철이는 세 표를 받았습니다. 기현이는 설명을 잘 했는지 무려 16표를 받았습니다. 서현이도 예상을 뒤엎고 15표를 받았습니다. 이 때 어린이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현철이가 자기 의견에 자기가 손을 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현철이는 절대 그런 적 없다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자기 주장을 관찰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했던지 제가 다 긴장되었습니다. 저는 현철이와 서현이를 남겨 놓고 나머지 어린이들을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여러분! 두 친구가 들어갔고 두 친구가 남았죠. 이제 결선투표를 할 거에요. 한 번의 발언권을 더 줄 거에요. 친구들을 잘 설득해 봐요."

어린이들은 최대득표제도에 익숙하지만 저는 프랑스식 결선 투표제를 소개했습니다. 최종 득표수에서는 기현이가 앞섰지만 2위를 득표한 서현이에게 부당할 수 있고, 책놀이에 참여한 모든 어린이의 대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결선투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다 할 필요는 없지만 '결선투표'라는 방식이 어린이들에게 흥미로운 자극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남은 결선투표의 후보들이 자신의 주장을 조리 있게 설명했습니다.

윤기현 : 저는 주장을 정해서 팀을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팀원을 뽑을 수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못 뽑으면 안 좋은 것도 있지만, 주장이 뽑으면 그 사람이 좋아서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서현 : 저는 투표를 해서 자기 팀을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친구라도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선투표답게 어린이들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갖췄습니다. 어린이들은 '중복 투표'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많은 후보들이 나왔을 때는 중복 투표를 하면서 좋은 주장을 고를 수 있었지만, 최종 후보가 정해진 상황에서 중복 투표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현이의 주장이 마음에 드는 아이들은 오른쪽 벽에, 서현이의 주장이 맘에 드는 아이들은 왼쪽 벽에 서도록 했습니다. 최종 결과는 문서현 14명, 윤기현 11명(5명은 결석)으로 문서현 어린이의 주장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서현이의 의견대로 투표지를 만들고 이름과 팀 이름을 쓰도록 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백팀을, 여자 아이들은 청팀을 많이 써서 결과적으로 남자팀 여자팀이 되었지만 어린이들이 주장하고 동의하고 결정하는 팀 정하기는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서현이는 "왠지 과학적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각 팀의 대장을 가위바위보로 뽑고 대장 인사를 시켰습니다.

청팀 대장 인사 : 저는 남광초등학교 3학년 문서현이라고 합니다. 청팀을 어떻게 이끌고 싶냐면, 다른 사람을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고 서로 믿으며 이기고 싶습니다. 박수!!!
백팀 대장 인사 : 저는 이한결입니다. 저는 백팀을 어떻게 이끌 거냐면 저도 승복하고 즐겁게 게임을 하도록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과 책놀이를 하기 전에 머리말("1년을 기다린 어린들과의 책놀이, 궁금해요?")에서도 어린이들은 민주주의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실제 확인을 해봤더니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팀을 뽑는 방식, 팀장을 정하는 방식, 주장하고 투표하는 방식 등 민주주의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놀이로 구성했더니 무척 친숙하게 따라왔습니다. 말 그대로 민주주주의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딱 맞는 놀이였습니다.

기자 회견 놀이

오늘 처음으로 진행한 책놀이는 '기자 회견 놀이'입니다. 기자 회견 놀이는 인터뷰 놀이를 응용한 방식입니다. 자기 소개와 가족 소개, 책 읽기 습관이나 고민 등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볼 수 있고, 궁금한 질문을 하면서 서로 친해질 수 있습니다. 책놀이의 첫걸음은 '마음 열기'입니다. 마음을 열어야 책을 제대로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인데, 김연아나 류현진 같은 스타들 기자회견 하는 거 봤어요?"
"가끔 가다 한번씩 봤어요."
"여러분 기자 알아요?"
"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지만 TV도 많이 보고 미디어에 노출되었으니 기자회견 놀이는 어렵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있을 때는 스타가 되는 거고, 거기 있을 때는 기자가 되는 거에요. 나는 몇 학년이고 어떤 책 좋아하고, 부모님이나 가족 중에서 소개할 사람 소개하고 좋은 점, 자기 자랑, 책 관련된 고민 얘기하면 돼요. 처음에는 내 소개, 내 소개할 때 뭐뭐 들어가요. 이름, 자기 초등학교, 학년, 자랑, 그 다음에 가족도 들억가겠죠. 가족 얘기하면서 가족이랑 친한지 싸움 잘 하는지 칭찬 많이하는지 '우리 엄마는 칭찬 많이해요.' '꾸중 많이 해요.' '잘 놀아줘요' '아빠랑 식물원도 갔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처음에는 무대에 가서 자기 소개하는 것을 어색해 했지만 질문을 자주 주고 받으면서 친숙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윤기현입니다.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부설초등학교에 다니고 3학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은 만화책이고 싫어하는 책은 교과서입니다. 저는 독서록 쓰는 게 귀찮습니다. 엄마 아빠 동생입니다."
질문 공세가 시작됐습니다.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고 맘에 들어요?"
윤기현 : 아니요.
"동생 칭찬 해준다면."
윤기현 : 우리 정현이는 그림을 잘 그려요.
"교과서 중에 어떤 게 제일 싫습니까. (이한결 어린이)
윤기현 : 수학입니다. 어려운 것도 있지만 좀 그래요.
"교과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윤기현 : 체육.
"이한결 : 체육 중에서 어떤 체육을 가장 좋아합니까?"
윤기현 : 축구입니다.


기자 회견 놀이를 하면서 어린이들은 질문을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질문은 그 자체로 요약능력을 높여주는데, '좋아하는 반찬은 무엇입니까?' '싫어하는 과목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하면서 어린이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접점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싫어하는 반찬과 좋아하는 과목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감정이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할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린이들이 서로 친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습니다.

다경이는 종이에 기자회견 내용을 빼곡이 써와서 읽기도 했습니다. 기자회견이 차차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질문의 내용 또한 제가 추가 질문이나 연결된 질문을 했더니 아이들이 곧잘 학습하며 수준 높은 질문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구분이 없어지고 모두들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와 질문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어린이들과의 첫 번째 만남을 통해서 저는 자신감을 얻었고, 아이들과 함께 친구가 되며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책놀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몸으로 뛰어 노는 '책놀이 운동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강연장을 빠져나가는 어린이들의 표정에서 설렘이 읽혔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지역의 육아 카페에 후기를 올렸더니 책놀이 참여 어린이의 엄마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울 아들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던데요^^ 자신있게 나가서 자기 소개했다고.. 내일 책가지고 재미있는거 할꺼라고 벌써 들떠 있네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성공적으로 첫 번째 만남을 하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허기졌습니다. 상으로 스스로에게 맛난 점심과 복숭아 한 봉지를 줬습니다.


태그:#책놀이, #기자회견 놀이, #한라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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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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