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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기울어 버린 얼굴
 어느날 갑자기 기울어 버린 얼굴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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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네, 오른쪽 눈이 안 감겨."
"어디 봐. 어머, 당신 입이 돌아갔잖아."

이상 증세는 전부터 있었다. 일 주일 전쯤인가?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어 안구건조증이 아닌가 싶어 안과에 가볼까 말까 망설이며 보냈다. 그 사이 또 다른 증세가 찾아왔다. 세면대에서 면도를 하는데 윗입술을 오른쪽으로 오므리기 어려웠다. 이게 웬일이냐 싶어 손으로 윗입술 오른쪽으로 당기며 면도는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시적으로 피곤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며칠 후 또 다른 증세가 이어졌다. 식사 중 씹던 음식이 오른쪽 잇몸 아래로 쌓였다. 안면을 움직여 쌓인 음식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이 혓바닥을 이용해 옮겼지만 혓바닥이 미치는 곳도 한계가 있어 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멀쩡히 밥 먹다 말고 손가락을 입속으로 넣어 잇몸 아랫부분 훑는 모습 보여줄 수는 없었다. 모른 척 먹다가 슬그머니 일어서 세면장으로 들어가 해결하고 돌아왔다.

잠시 그러다 말거란 기대와는 달리 시작된 증세는 복합적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컴퓨터뿐 아니라 TV나 신문을 볼 때도 눈물이 흘렀다. 오른손으로 면도기 들고 왼손으로 윗입술 당겨 면도하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또 다른 증세가 나타났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는데 오른쪽 눈으로 비눗물이 들어왔다. 힘을 주고 또 주어도 오른쪽 눈이 완전히 감기지 않았다. 그제야 덜컥 겁이 나 아내에게 고백했더니 입이 돌아갔단다. 구안괘사가 온 것이다.

건강 잃은 뒤 새롭게 보였던 것들

지난 2월, 치료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서면 아내는 마스크와 목도리 챙겨주며 찬바람 맞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배웅했다. 병원은 집에서 멀지 않아 걸어 다니며 치료받았다. 마스크 쓰고 목도리까지 두르면 찬바람은 막아낼 수 있지만 입김이 마스크를 타고 올라와 안경에 뿌연 수증기를 만들어 불편했다. 그래도 구안괘사에 해롭다는 찬바람으로부터 얼굴을 지키려 마스크와 목도리는 벗지 않았다.

구안괘사를 치료하러 다니는 아비를 위해 제가 두르고 다니던 목도리를 넘겨준 아들 녀석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다니던 대학이 마음에 안 든다고 삼수를 해서 속깨나 썩였던 녀석이다. 삼수 끝에 가까스로 원했던 대학에 합격하고 아침 일찍 찬바람 헤치며 알바 하러 가는 녀석에게 목도리는 꼭 필요했을 텐데….

결혼 후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내가 우리 가정의 울타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구안괘사에 걸려 병원 드나들며 치료받으면서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두 아들 역시 내게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웟 입술, 아랫입술, 눈썹 주변, 이마, 뺨 등 오른쪽 얼굴 곳곳은 물론 정수리, 손등, 종아리에 이르기까지 가늘고 예리한 전기침을 깊숙이 찔러 넣고 30분 이상 진동 상태로 자극을 주는 치료에 진저리가 났다. 그렇다고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 의사가 시키는 대로 날마다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열흘 정도 지나니 치료에 적응이 되었다. 전기침 진동에 진저리치며 누워 있다가 깜박 잠도 들었다. 고통도 자꾸 반복되면 무디어지고 익숙해지는 걸까.

치료로 인한 고통에 익숙해져도 마비된 안면 근육은 좀처럼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다보니 습관이 하나 생겼다. 사람들 만나면 입에 먼저 눈길이 갔다. TV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온통 관심이 사람들 입으로 집중되었다. 좌우 모두 균형 잡힌 입으로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기만 했다.

마스크 쓰고 참여했던 졸업식

졸업식날, 마스크 쓰고 아이들과 찍은 사진
 졸업식날, 마스크 쓰고 아이들과 찍은 사진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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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괜찮아요. 말씀 안 하고 가만히 계시면 잘 몰라요."

함께 3학년 담임을 했던 선생님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졸업식이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장 단상 위에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졸업장 나누어 줄 때는 어떻게 하지? 졸업식 모두 끝내고 교실에서 마지막 종례를 할 때도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럴 즈음 <원주투데이>에서 전화가 왔다. 졸업 시즌을 맞아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편지 형태로 써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평소 같으면 선뜻 응할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보면 눈물이 쏟아져 글 쓰는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보겠다고 했다. 혹시나 졸업식 날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원주투데이> 기사로 대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대신 몸 상태를 이야기하고 기사 마감일을 최대한 늦추어달라고 부탁했다. 꼬박 3일 동안 눈물 쏟으며 완성시켜 겨우 보냈다.

교무실에 있다가 시간 맞추어 졸업식이 진행되는 체육관으로 갔다. 찬바람을 쐬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쓰고 목도리를 둘렀다. 식장에서는 벌써 졸업식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졸업생들은 반별로 준비된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사진을 찍고 이야기하고, 식장 좌우로는 재학생들이 반별로 앉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사진 찍어요."

식장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실장 은비가 달려와 팔을 잡아끌었다. 은비를 따라 몇몇 아이가 함께 달려왔다.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마스크를 벗고 찍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여졌다. 그런 내 모습 지켜보던 주희가 물었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스크 쓴 채로 사진을 찍었다. 졸업식 사진이니, 입 돌아간 모습으로 찍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몇몇 아이들과 사진을 찍은 후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을 찍어주었다. 찍히는 것보다는 찍어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축제 분위기의 졸업식
 축제 분위기의 졸업식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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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방식을 탈피한 졸업식 분위기는 흥겨웠다. 간단한 식순만 진행한 뒤, 졸업생 모두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나눠주는 순서가 이어졌다. 이후 졸업생과 후배들이 함께 꾸민 공연이 이어졌다. 감동이었다. 생각을 바꾸니 졸업식이 축제가 될 수도 있구나. 몸 상태도 잊고 잠시 졸업식의 감동에 젖었다.

구안괘사가 4주째 접어들 무렵,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축제처럼 진행된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생들이 교실로 들어갔다. 담임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교무실에서 앨범과 상장 등을 챙겨 교실로 들어가니 학부모와 졸업생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몇 마디는 할 수 있겠다 싶어 3월 처음 만날 때 얘기부터 꺼냈다. 하지만 말이 자꾸 꼬였다. 왼쪽으로 돌아간 입이 자꾸만 느껴졌다. 결국은 손으로 입을 잡은 채로 말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길게 할 형편이 못 되어 미안하다고, 대신 졸업하는 너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원주투데이>에 기사로 써서 보냈으니 읽어보라고. 듣고 있던 하영이가 훌쩍였다. 울지 말라고 말리는 아이들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졸업식에서 못다한 이야기
 졸업식에서 못다한 이야기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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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괘사가 4주째로 접어들 무렵부터 눈이 제대로 감기기 시작했다. 눈 부릅뜨고 세상 바라보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던 내가 눈 제대로 감는 것도 그 이상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몸에 이상이 올 때 신호는 아주 미세했다. 그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결과 안면 근육이 마비되었다. 몸이 회복된다는 신호 또한 처음에는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지는 몸 상태가 확실히 느껴졌다. 변화는 작은 데서 출발한다. 어디 내 몸뿐이랴. 세상사도 다르지 않으리라.


태그:#구안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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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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