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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2002년. 옥스포드대 2학년이었던 다니엘 튜더(32)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운이 좋게도 한국인 친구의 배려로 월드컵 표를 얻게 된 덕분이었다. 그런데 아주 단순했던 월드컵 여행은 그의 인생 항로를 바꿔놨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 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한국의 수도가 서울이고, 88올림픽을 연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물론 선입견도 없었다. 그런데 뜨거운 월드컵의 분위기가 엄청 좋았고, 결국 한국에 반했다."

"모두가 형제자매 같았던 한국 정서에 반했다"

다니엘 튜더씨가 지난 5일 서울 이태원 소재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튜더씨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이었고,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원제 : Korea : impossible Country)>의 저자이다.
▲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다니엘 튜더씨가 지난 5일 서울 이태원 소재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튜더씨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이었고,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원제 : Korea : impossible Country)>의 저자이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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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늦은 저녁, 서울 이태원 근처 경리단길에 위치한 맥주집 '더 부스'에서 만난 다이엘 튜더는 11년 전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더 부스'는 그가 최근 한국인 친구들과 공동창업한 '크래프트 비어'(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들어내는 맥주) 술집이다.

"당시 한국의 월드컵 분위기가 아주 특이했다. 어디든 가면 '우리랑 한잔 하자'고 했다. 모두가 다 '브라더(brother) 시스터(sister)', 즉 형제자매였다. 그런 한국 정서에 반했다. 나는 아직도 그런 한국정서를 정말 좋아한다."

결국 다이엘 튜더는 옥스포드대를 졸업한 지난 2004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계획도 없이 그냥 한국이 좋아서"였다. 이후 영어강사를 거쳐 증권사에 들어갔지만 "수학적 관점에서 돈 이야기만 하는" 증권사 분위기에 실망해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세계적인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영국에서 석사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코노미스트>에 인턴십 모집 광고가 떴다. 거기에 응모했고, 다행히 면접에서 합격해 3개월간 본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지난 2008년 9월 인턴십이 끝난 직후 스위스에 머물던 다니엘 튜더에게 연락이 왔다. <이코노미스트> 아시아지역 편집장(editor)이 "서울 특파원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온 것. 그는 "딱 1초만 생각하고 '가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세 번째로 한국땅을 밟았다. 2010년 6월의 일이다.

"포장마차에만 가도 '리얼 코리안들' 많다" 

다니엘 튜더의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다니엘 튜더의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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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으로 일해온 다니엘 튜더는 지난해 <The Impossible Country>('불가능한 나라')에 이어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문학동네)를 최근 펴냈다.

"나는 한국을 알리고 싶었다. 특히 영화, 음악, 음식,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느꼈던 즐거운 느낌(이 책에서 '흥'이라고 말한 바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 정부가 그 방면의 일을 아주 잘해왔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내 나름의 소소한 방식으로그걸 시도해보고자 했다."(본문 15쪽)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는 다니엘 튜더만의 "소소한 방식"으로 60여 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선택한 "소소한 방식"이란 "유명 인사나 엘리트 일변도의 인터뷰"를 피해서 택시기사·미용실 직원·가정주부·대학생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산 무당'까지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이들을 "리얼 코리안"(real korean)이라고 불렀다.

"서구 언론이 한국을 다룰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을 취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일하는 나의 상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곧장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들어간다. 짐을 풀어놓은 다음 서울대 A교수를 만나고, 주요 정치인 B와 커피를 마시고, 공무원 C와 저녁을 함께 한다. 또한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국한돼 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 상대는 오직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뿐이다. 즉, 그들이 만나는 사람은 요즘 한국에서 잘 나가는 직장을 얻기 위한 필수조건처럼 되어버린, 미국 유명대학을 졸업한 누군가가 될 수밖에 없다."(본문 18쪽)

다니엘 튜더는 "내 상사들이 만났던 사람들만 '리얼 코리안'이 아니다"라며 "그래서 상층과 하층의 사람들을 모두 인터뷰하면 한국을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되도록 자신의 인터뷰 시선을 '아래'로 뒀다는 이야기다.

"포장마차에만 가도 그러한 리얼 코리안들은 많았다. 그런 사람들과 많이 대화했다."

"영국이 '스파이스걸의 나라'로 여겨지면 상처받아"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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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튜더의 '소소한 방식' 때문인지 그의 책에는 서구사회에서 관심이 많은 북한 문제나 정치·권력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적다. 반면 음악·영화·음식·종교·집·민속 등 '한국문화'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했다. 특히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케이팝'(K-Pop)에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한국에 사는 서양사람들이 (댄스음악 위주의) 케이팝을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1970년대 한국대중음악을 좋아한다. 홍대에 있는 '곱창전골'이나 '밤과 음악 사이' 등 지나간 한국대중음악을 틀어주는 곳을 자주 간다. 개인적으로 신중현은 제게 영웅이다. 그는 10살부터 기타를 쳤다고 하는데, 훌륭한 기타리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김정미·김추자 등 가수들에게 좋은 곡을 만들어준 훌륭한 작곡가였다. 작곡까지 할 수 있는 좋은 기타리스트는 드물다. 인간적으로도 겸손해서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다니엘 튜더는 "(현재 케이팝으로 불리는) 한국대중음악은 거의 전적으로 10대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클래지콰이·롤러코스터처럼 원숙하게 깊은 감정을 담아내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예술적으로는 실망스러운 수준이다"(본문 239~240쪽)라고 꼬집었다. 그는 특히 "고령청취자들은 음악산업에서 간단히 무시당하고 있다"(본문 240쪽)고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책에서 인용한 신중현씨의 '한탄'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롭다.

"영국에서 밴드들은 옛날 음악을 듣고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구세대와 신세대 음악 사이에 그 어떤 접점도 없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게 그냥 MP3 플레이어로 흘러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큰 스피커에서 진짜 살아있는 음악이 나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본문 240쪽)

다니엘 튜더는 "(한류가) 대중문화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또다른 위험성도 안고 있다"며 "사람들이 감정과잉의 한국 드라마와 대중음악에 질려버리고 나면 한류는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253쪽)라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해외에서 케이팝을 집중적으로 홍보한다. 한국은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인데 왜 케이팝에 집중해야 하나? 저는 영국이 비틀즈나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스파이스걸(영국의 여성 4인조 그룹)의 나라'로 여겨지면 정말 슬프겠다. 영국사람들도 상처받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한국을 '케이팝의 나라'로 생각하면 저는 마음이 안좋을 것 같다."

"'선진국 되려면 미국 따라 해야' 사고 방식에 반대해"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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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튜더가 전적으로 '아래'에만 시선을 둔 것은 아니다. "유명 인사나 엘리트 일변도"의 인터뷰를 피하긴 했지만, 직업의 특성상 '상층' 인사들도 만나야 했다. 그렇게 만난 이들에게 공통으로 느낀 점은 '지적·문화적 독립성의 결핍'이었다.  

"한국의 엘리트 중 10%만 미국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괜찮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제 주위에 있는 엘리트들은 전부 미국 유학생, 미국 명문대 졸업생들이다. 이렇게 교육부분에서 미국에 의존한다. 한국이 지적·문화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분명히 단점이다. 저는 미국을 따라 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미국이 문학·음악·영화 등 예술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잘해온 나라이긴 하지만 결코 천국은 아니다. '한국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을 따라서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반대한다."

다니엘 튜더는 "한국은 이미 경제적 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의 문화·지식·역사 등에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GDP(국내총생산)보다는 문화·지식·역사 등이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GDP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치있는 철학을 따라야 한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이 기억에 오래 남는단다.   

한국사회가 문화·지식·역사 등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그것이 경제성장보다 소중하다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식 발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다니엘 튜더의 생각이다. 그는 "경제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박정희를 존경하지만 이제는 탈박정희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박정희는 1960~1970년대에나 맞는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인상 깊었던 이소연씨의 발언... "이제 샴페인도 음미할 줄 알아야"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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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튜더가 '탈박정희주의'를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박정희식 발전주의에서 시작된 '경쟁'이 경제성장을 통해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했지만 이제는 "한국인을 괴롭히는 심리적 원인이 되고 있다"(본문 15쪽)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성공이 굉장히 좁게 정의되고 있다. 한국에서 성공이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라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삼성 같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강남 아파트에 사는 것을 말한다. 스카이와 삼성에 못가고, 강남 아파트에 못살면 '루저'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의사가 돼야 한다, 삼성에 다녀야 한다, 음악인 되지 마라, 예술인 되지 마라. 이렇게 한국은 '경쟁'과 '좁게 정의된 성공'이 합쳐져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제는 의사가 돼야 한다, 삼성에 다녀야 한다는 등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다니엘 튜더는 "저는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거의 매일매일 친구들하고 축구를 했고, 공부는 많이 안했다"며 "대학이 한국과 같은 '공부 지옥'이었다면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유명한 이소연씨의 얘기는 다니엘 튜더가 "하고 싶던 모든 말을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참 대단하죠. 하지만 슬프게도, 한국인이 깨닫지 못하는 게 있어요. 한국인들은 만족할 줄을 몰라요. 때로는 쉬기도 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 샴페인도 음미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본문 16쪽)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한국도 이제는 자존심을 느낄 정도의 정신적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충고다. 다니엘 튜더는 "그냥 한국 최초의 우주인을 만나고 싶어 인터뷰를 했는데 만나고 보니 한국 사회에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가 언젠가는 정치인이 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6일 폴란드로 떠난 다니엘 튜더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글을 쓰는 데 전념할 계획이다. '리얼 코리아'는 외면하고 북한문제에만 집착하는 <이코노미스트>의 서울특파원 자리도 곧 내려놓는다. 옥스포드대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철학을 공부했고, 맨체스터대에서 MBA까지 취득했던 그가 '전업작가'로 인생항로를 바꿀 수 있는 데에는 그가 그토록 강조해온 영국의 지적·문화적 독립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태그:#다니엘 튜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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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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