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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개선문은 제국이 멸망된 이후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았다 해도 오랫동안 권력가 저택의 망루 정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이것은 새롭게 조명된다. 세계 각국에서 로마의 개선문을 흉내낸 개선문이 나타났다. 이것은 근대 민족주의의 출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유럽대륙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주의가 급격히 고양되어 급기야는 건축물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의 중앙 광장이나 대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민족주의에서 발전한 국가주의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파리의 개선문이다.

민족주의로 덧씌운 파리 개선문

파리 개선문
 파리 개선문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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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가면 어딜 가서 증명사진을 찍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이곳일 것이다. 개선문 앞 말이다. 그렇다, 파리 개선문은 파리의 상징이고 모든 파리 관광객의 필수 여정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 개선문이 최고의 관광 상품으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 같다. 하지만 이 개선문이야말로 프랑스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이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이 그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지시한 것에서 비롯된다.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그 이후 나폴레옹이 영국에 패함으로써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 루이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재개되어 1836년 완공되었다.

파리 개선문은 멀리서 보더라도 그 장중함이 돋보인다. 그만큼 과거의 개선문보다 훨씬 크다. 높이가 50m, 폭이 45m다. 크기만 과거 로마제국 시절의 개선문에 비해 2배 이상이나 된다. 이 개선문은 오로지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것만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개선문 아치 아래 바닥은 무명용사의 무덤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에서 명멸한 젊은 영혼들을 이곳에 모셨다. 그러니까 파리 개선문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조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는 희생정신을 요구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프랑스의 진정한 국립묘지이다.

이 파리 개선문은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의 대부분 나라에선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었고 집단에 의한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었다. 거기에서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는 한편 전체주의의 확산을 위해 이런 류의 개선문이 많은 나라에서 만들어졌다. 그럴 때마다 파리 개선문은 하나의 롤 모델이 되었다.

서재필 그는 왜 독립문을 만들었을까

서재필과 독립문
 서재필과 독립문
ⓒ 이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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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개선문에서 발현된 민족주의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가면 서대문 독립공원이 있다. 이곳엔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투사들이 고문받고 죽어간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우뚝 서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독립문이다.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독립문이 어떻게 여기에 세워져 있는지 알 것이다.

이 독립문은 1896년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조 500년 동안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문으로 세계사적으로 볼 때 19세기를 풍미한 민족주의의 우리 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독립문은 현재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교 공사로 인해 이전한 뒤 복원해 놓은 것이다.

바로 이 독립문은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이 스스로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설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건축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는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독립문을 만듦에 있어 서재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독립문이 파리 개선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미적 관점에서는 보잘것없다. 개선문 양식으로 이 문을 만들려고 했다면 서구 개선문의 기본 양식을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엉성하기 그지없다. 개선문의 기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치 위의 상단 부분(attic)마저 거의 생략되어 있다.

서양 개선문에서는 이 상단 부분에 통상 그 문이 언제, 누구에 의해, 왜 만들어졌는지가 간단히 기록되는 곳으로 양식상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개선문에는 그 개선문의 목적과 관련된 각종 예술적 장식물(부조)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독립문에는 이런 것은 모두 생략되고 화강석을 쌓은 다음 앞뒤 현판석에 독립문이라는 글자를 한글과 한자로 써 놓고 양옆에 태극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 사실상 장식의 전부이다.

나는 이 독립문을 보면 1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독립협회의 중심인물 서재필을 생각한다. 과연 그는 이 독립문을 구상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것을 알려면 그의 이력을 알아야 한다. 그는 참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젊은이 중에서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서재필에 대한 정보는 그의 자서전이나 근현대사 역사책에 비교적 자세히 나오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그것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나의 상상과 관련된 부분만 들추어 내 이 독립문을 만드는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서재필은 어린 시절부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한양에 올라와 당시 최고 지식인들과 교유한다.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인 서광범은 5촌 당숙이었고, 개화파의 지도자인 김옥균과도 깊이 교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서재필은 나이 스무 살이 되는 해인 1884년에 이들 개화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그 주모자들은 반역자로 몰려 조국을 등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재필은 우여곡절 끝에 1885년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아마도 서재필은 조선인으로서는 1883년 보빙사로 간 민영익 일행(여기에 유길준이 포함되어 있었다)을 제외하고는 두 번째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일 것이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뛰어난 적응력을 보인다. 매우 뛰어난 머리를 가진 조선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한 채 미국에 갔지만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조선의 영재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마스터하고 급기야는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 모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당시 컬럼비아 의과대학)의 강사가 된다. 물론 이 사이에 미국 여자와 결혼도 했다. 서재필이 이렇게 미국 사회에서 학교를 나오고 미국인과 결혼까지 한 것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깔렸었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으로 처자식이 다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된 상황에서 고국에 간들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미국에서 십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조선은 급변하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는 상황에서 서재필은 조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독립협회. 12년 동안 서재필은 미국에서 단지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영민한 청년은 서구 문명의 그 심장부에서 끝없이 발전하는 서구문명의 실체를 보고 매일 같이 놀라면서 그것을 배워나갔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질풍노도와 같이 빠른 속도로 산업사회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의 산업혁명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세계 정상급 대국으로 발전하는 미국에서 무엇인가 큰 깨달음을 했을 것이다.

이런 경력의 서재필이 국내로 돌아와 아직도 서구 문명의 실체를 모르고 정쟁을 일삼는 권력층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선 민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기서 그는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독립신문을 만들어 직접 논설을 쓰면서 우리가 빨리 서구문명을 받아들이지 안 됨을 호소한 것은 그의 이력에 비추어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글만으로는 계몽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일반 대중이 매일 같이 지나다니는 대로에 큰 기념물을 만들어 계몽하는 것, 그것은 12년간의 외국 생활을 통해 배운 매우 익숙한 방법이었다. 이즈음 그의 머리에선 미국에서 알게 된 파리 개선문이 생각났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구 세계는 민족주의와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이 과정에서 각 국가는 자신들의 힘과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해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개선문을 만들었다. 서재필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 우리도 그런 것을 만들어 보자" 서재필은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워싱턴 개선문, 서재필은 이 개선문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워싱턴 개선문, 서재필은 이 개선문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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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기록을 뒤져도 서재필이 조선에 귀국한 1896년 전에 파리 개선문을 직접 보았다는 흔적은 없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미국에 있으면서 책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귀국하기 얼마 전에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완공된 워싱턴 기념 개선문은 그의 뇌리에서 생생했을 것이다.

이 개선문은 18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 또한 파리 개선문을 본떠 만든 것이다. 완성된 해가 1889년이니 서재필이 귀국하기 7년 전 일로 미국에서 한창 공부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서재필이 직접 혹은 신문 등을 통해 이 개선문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 것도 물론 알았을 것이다.

서재필이 귀국하여 독립문을 만들 때 세계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소용돌이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가 독립문을 만드는 과정은 바로 이런 세계사의 한 장면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노력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서재필의 노력과 관계없이 당시 조선은 이미 제국주의의 제물이 되어 가는 위험한 선을 넘고 있었다.

북한,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을 갖다

평양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이다. 개선문 2층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아치 상단 위에 삼층의 지붕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평양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이다. 개선문 2층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아치 상단 위에 삼층의 지붕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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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큰 개선문은 개선문의 고향 유럽에 있지 않다. 재미있게도 이 한반도에 있다. 바로 평양 시내에 우뚝 선 개선문이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과 그의 평양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김일성 70회 생일에 맞춰 그가 살아온 70년 하루하루를 기리는 벽돌 2만5500개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다. 높이는 무려 약 60m, 폭은 50m다. 정말로 북한 사람들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세계 제 일등을 원했는가. 그래야만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계 만방에 알린다고 생각한 것인가.

스탈린 사회주의가 판을 치던 냉전 시기 이런 류의 조형물은 당시 소련을 비롯하여 동구권 여러 나라에서도 만들어졌다. 만들기만 하면 세계 최고,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인간 본연의 예술적 심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조형물이다. 사람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도구, 절대 지도자(수령)의 권위를 보여줌으로써 어떤 반대도 용서치 않겠다는 살벌한 기념물일 뿐이다. 이런 조형물이 이 한반도에 아직도 남아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개선문,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로마제국에서 나타난 개선문은 근현대로 들어와 재발견되었다. 그 용도는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나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것보다는 민족 간의 대립에서 한 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써, 때론 숨 막히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수령의 우상화를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었다.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그런 개선문에서 도저히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 개선문이 사람과 사람, 민중과 권력의 화합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을까. 나는 지난 1년 동안 스웨덴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매우 감동적으로 말이다.

스웨덴은 일찍이 사회민주주의를 성공시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를 만든 국가이다. 국민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민주주의 또한 최고 수준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개선문이 들어선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래 사진을 보라.

스웨덴 국회의사당, 의사당 가운데 길이 나있고 그 길 양 끝에 개선문이 건물과 건물을 잇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길을 활보한다.
 스웨덴 국회의사당, 의사당 가운데 길이 나있고 그 길 양 끝에 개선문이 건물과 건물을 잇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길을 활보한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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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스톡홀름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그런데 잘 보면 사람들이 의사당의 중앙을 활보한다. 그렇다, 스웨덴 국회의사당 한가운데는 이렇게 사람들이 활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누구든지 의사당 한가운데를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다. 의사당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이 길은 왕궁에서 스톡홀름 도심 한복판으로 뻗는 가장 번화한 길(드로트닝가탄)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라. 이 의사당의 길 양 편에 무엇이 있는가. 개선문이다. 3개의 아치가 있는 개선문 두 개가 의사당 길 양편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개선문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쓰일 수 있다는 증거다. 개선문이 항상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스웨덴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개선문은 사람과 사람, 민중과 권력을 이어주는 민주주의 상징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이젠 이런 개선문을 만들어 시민들이 그 아래를 활보할 수 있도록 해 볼 수는 없을까?


태그:#로마문명이야기, #개선문, #세계문명기행, #서재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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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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