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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표지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표지
ⓒ 눈빛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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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전 오늘(6월 26일), 서울 한복판 경교장에서 한낮 정적을 깨뜨린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백범 선생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얼굴, 목, 가슴, 아랫배를 맞고 쓰러졌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반쪽짜리 단독 정부가 아닌 통일된 정부 수립을 이루기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려 했던 백범은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백주 대낮에 백범에게 총질을 한 육군 소위 안두희는 사건 현장에 들이닥친 헌병대에 의해 구출되어 헌병 사령부로 이송됐다. 군 당국은 안두희의 범죄가 '배후 없는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 공판에서 안두희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3개월 만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에 의해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다.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잔형 집행 정지 처분을 내려 석방했다.

육군 소위로 복직한 안두희는 중위로 진급했고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 명령 제56호로 형이 면제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기 직전 안두희는 국방부 특명 229호로 예편과 동시에 1계급 특진시켜 육군 소령으로 군복을 벗었다.

예편 뒤에도 안두희는 헌병사령부 문관으로 월급과 차량까지 제공받았고, 김창룡 육군특무대장과 접촉하면서 강원도 양구에 군납공장을 차려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권력 실세의 비호가 없었다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들이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호의호식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힘을 써주었던 권력의 실세들, 그들이 백범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것임에 틀림없다.

백범 암살자 안두희가 권력의 비호 속에서 승승장구 살아가는 동안 정의는 숨을 죽이고, 역사는 퇴행을 거듭했다. 권력이 외면한 정의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백범 암살의 진상도 영원히 묻혀버릴 것 같았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권력은 무너지고 백범 암살 진상규명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사건의 전모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지만 4·19 혁명 1년 뒤 일어난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다시 묻혀버렸다. 

이런 가운데 백범 암살자가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고 사는 정의가 실종된 세상에서,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암살자를 응징해서 정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리고자 일생을 걸고 그를 쫓았던 네 명의 추적자들이 있다.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가 그들이다.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는 네 명의 추적자들의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소개하고 있다.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암살자를 쫓기 위해 일생을 걸었다

4·19혁명 1주년인 1961년 4월 19일 백범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김용희 간사는 치열한 추격전 끝에 안두희를 붙잡아 사건의 전말을 녹취하는 데 성공했다.

사건 후 안두희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었던 핵심 인물로 김병삼 헌병 대위, 전봉덕 부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장은산 포사령관, 김정채 헌병사령부 2과장 등이 있었고, 안두희가 사전에 한독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공작비를 헌병사령부에서 지원받았고 국방부 제4국에서 행동대원 활동비를 받았으며, 서울시경에서도 공작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사나 공판을 받을 때 답변할 자료가 김창룡 특무대장과 정치 브로커 김지웅에 의해 전달되었다는 사실도 들어 있다.

전북 김제 출신이었던 청년 곽태영은 독립운동가인 작은아버지로부터 백범 암살 사건을 듣고 안두희 응징과 진상 규명을 다짐했다. 5·16 군사정변 후 김구 암살의 진상 규명은 좌절되고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체를 운영하면서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곽태영은 안두희가 운영하는 군납공장 부근에 하숙을 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공장 앞마당에서 안두희를 구타하고 칼로 찔렀다. 백범 선생을 살해한 주범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백범일지>를 읽고 감동했던 권중희는 10년이 넘도록 안두희를 추적한 끝에 1987년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무수히 구타하고 '반역자를 응징하면서'라는 성명서를 남겼다. 이후 권중희는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대학로, 탑골공원, 남산공원 등지에서 서명운동을 하고, 국회,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보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1992년 중풍에 걸린 안두희를 강제로 차에 태워 경기도 가평의 농장으로 끌고 가서 중요한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암살과 관련된 직속 상관에 장은산 포사령관이 있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자기를 경무대로 데리고 가서 이승만 대통령의 치하까지 받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버스 기사였던 박기서는 1996년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서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흠씬 두들겨 패 절명시켰다.

알아주고 응원해주는 이도 많지 않은 세상에서 오직 '정의' 바로 세우기라는 대의명분 하나로 평생을 매달렸던 의로운 이들의 삶이 조국의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에 평생을 바쳤던 백범 선생의 삶과 함께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역사 속에서 영원이란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진실을 정의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다만 늦춰질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진실은 밝혀지고 정의는 되살아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세상을 뜬 지 64년이 흘렀다. 6월 26일 하루만이라도 백범 선생의 삶을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해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를 곰곰 되새기면서 다시 읽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박도 씀 | 눈빛출판사 | 2013.03. | 1만3000원)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박도 지음, 눈빛(2013)


태그:#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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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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