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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 둘레길을 걷다.
 신선 둘레길을 걷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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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 앞길로 지나가지 마세요!"

짐짓 굳은 표정으로 쏘듯 말했다. 내 앞으로 동네 언덕길을 오르던 사람들이 주춤, 멈춰 섰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자 셋이었다. 일제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날이 길고 뾰족한 호미를 들고 서 있었다. 바깥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던 중이었다.

"신선 둘레길 걷는 길이시죠?"

굳은 얼굴을 살짝 풀어가며 물었다. 그들은 여전히 경계의 낯빛으로 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내가 환한 미소로 말했다.

"길 잘못 드셨어요!"

그제야 앞서의 내 농을 알아챈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 아래에서… 마을회관 저기… 이정표를 놓치셨어요. 돌아내려가 오른쪽으로 꺾어…."

여행자들을 제 길로 보내놓고 나는 다시 풀을 뽑았다.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러 오다
▲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러 오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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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와서 사니, 길에서 길을 묻는 여행자들을 이따금 만난다. 내 집을 여행지 삼아 찾아오는 지인들을 종종 맞이한다. 임자 다른 다양한 모양의 신발들이 종종 토방에 놓인다. 여행 중에 내가 알게 모르게 받았던 도움들을 갚듯, 내 집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나는 기꺼이 잠자리와 양식을 내준다.

며칠 전에는 여행자들 아홉 명이 몰려왔었다. 그들은 특별히 '여행병'에 걸린 여행꾼들이었다. 틈만 나면 국내로 국외로 여행을 떠나는 배낭여행자들이었다. 제약회사원, IT 자영업자, 프리랜서 성우, 무역회사원, 바이올리니스트, 줄기세포 연구원, 구청 공무원…. 생김새처럼 직업도 개성도 다양한 사람들이 뭉쳐서 왔다(우리는 이지상 작가의 여행기 쓰기 수강생들로 만났다).

나는 우선, 내 집 곳곳을 순례시키며 집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이사 왔을 땐 마당도 집도 형편없었어요. 나무 하나, 꽃 한 포기, 잔디 한 장 이 집 저 집에서 얻어다가 심고 씨 뿌리고…. 그 꽃은 한련화, 그 꽃요? 우담동자. 예쁘죠? '농가주택수리비' 지원금 받아 화장실도 만들고… 정자도. 원래 헛간이었어요. 지붕 교체하고 마루 깐 거죠. 그 석축, 돌 하나하나 내가 다 쌓았어요. 뭐 엉터리지만. 벽에 황토칠, 회칠도 하고, 무너진 아궁이도 고치고. 거기, 처마 밑 구멍 속에 새가 들어가 새끼를 깠나 봐요. 오늘 재수 좋은 사람은 이마빡에 새똥 맞을 수 있어요."

50여 년 된, 작은 농가 한 채 구경시키는 데 한참 걸렸다. 집이 예쁘다, 칭찬이라도 나오면 한 옥타브 더 올라간 내 목소리가 신바람을 탔다. 그럴 땐 안 먹어도 배부르고, 없어도 백만장자가 된 것 같다. 사실 50여만 원 이하의 생활비로 수십 년을 근근이(?) 살아왔지만, 나는 한 번도 가난한 적이 없었다.

신발 툇마루 아래 신발들
▲ 신발 툇마루 아래 신발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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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경을 끝내고 여행자들은 만수천으로 내려가 물놀이를 했다. 그 사이 나는 마당 정자에 술상을 차렸다. 텃밭에서 상추와 부추와 쑥갓을 땃다. 나물밭에서 참나물, 참취, 곰취 어린 잎을 골라 땄다. 쌈거리로. 미나리 초절임과 오이 초절임도 내놓았다. 아랫집 대나무 밭에서 딴 죽순도 무쳐놓았다. 된장찌개도 곁들였다. 소박한 시골 술상이었다. 그리고 여행자들이 사온 지리산흑돼지 삼겹살과 술을 올려놓았다. 열 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한 자리였다. 술도 고기도 정도 입담도 넉넉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여행담들을 털어놓았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동동거린 얘기, 여행하며 동행과 싸운 얘기,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동네 아이들 눈썰매 얻어 타다 다쳐 고생한 얘기, 로키산맥의 장엄한 자연 앞에서 전율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 얘기, 몇 개월 유럽 배낭여행 중에 심하게 걸린 향수병을 스타벅스의 아이스모카로 푼 얘기, 장마 중에 자전거로 오사카 여행하며 아찔했던 얘기…. 

그 자리, 왠지 면면이 빛나 보였다. 그 빛은 건강하고 활기 찬 삶의 에너지였다. 일하고 여행하며 배우며…. 무거운 배낭도, 싼 숙소도, 싼 음식도 삶의 축복인 줄 아는 사람들. 위대한 인물들이 남긴 그 어떤 명언보다 더 생생한 여행의 언어들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왔다.

"우리 사회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 잣대로 움직이는 일상에서 탈출하는 거죠.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공이니 실패니 행복이니, 우리의 잣대로는 잴 수 없어요. 아무튼 개안을 한다고나 할까요."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상황에 부딪치고, 순간순간 내 힘과 판단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짜릿짜릿한 시간들이죠."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재미도 커요."
"같은 곳을 가도 늘 새로워요."
"여행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인 것 같아요. 혼자 떠났다가도 결국 또 그 길위에서 사람을 찾게 되더라고요. 꼭 외로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는 게 많잖아요."
"'호연지기'라는 말의 뜻을 정말 가슴으로 체험하죠."

저녁상 정자에 차린 저녁상
▲ 저녁상 정자에 차린 저녁상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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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커지고 눈도 떠지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현실생활은 떠나기 전과 같지만, 떠나기 전의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돌아왔으니…."
"혼자 몇 시간씩 걷다보면 정서적 독립이 느껴져요. 매여 있는 조직이나 가족이나 지인들과…. 우리 각자는 개별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론 정서마저 공유하기를 강요받을 때가 많잖아요. 그렇게 나를 잃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혼자 걸으면서 '오롯이'라는 단어가 입에 맴돌았어요. 참 좋았어요. '오롯이' 그 속에서 자유롭고 새롭게 나를 발견하는 것…."
"돈이 곧 행복이 아니라는 걸 정말 절감했어요."
"두고두고 삶의 활력소가 되요."
"음식의 양념처럼 삶을 더 풍성하고 맛있게 만들어요. 그런데 양념이 너무 지나치면 안 되듯이 여행도 지나치면…."
"돌아올 집이 있어 떠남의 의미가 더 크다는 말에 공감해요."
"나중에 게스트 하우스를 하고 싶어요. 그 전에 아내랑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고 투어개발 같은 것도 해보고 싶고, 세계 농촌의 모습도 보고…."
"지금 이 자리는 이지상 선생님 말씀대로 '같은 아비투스'(성향의 체계)를 만나는... 아비투스, 이러니까 내가 좀 있어 보이죠? 하하핫!…"

웃던 그가 깜짝 선물을 내놓았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가 직접 그려 만든 엽서였다. 덕분에 우리는 엽서 쓰는 시간을 가졌다. 마치 먼 여행지에서 그리운 사람에게 엽서를 쓰듯…

 웃던 그가 깜짝 선물을 내놓았다. 그 자리 모인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직접 그려 만든 엽서였다.
 웃던 그가 깜짝 선물을 내놓았다. 그 자리 모인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직접 그려 만든 엽서였다.
ⓒ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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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 뽕나무 열매 오디를 따먹다
▲ 오디 뽕나무 열매 오디를 따먹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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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 자정을 넘어서 새벽까지 달렸다.

몇 시간 눈을 붙인 뒤, 아침을 먹고 신선 둘레길을 걸었다. 나는 짧은 지식으로나마 숲의 푸름을 짚어주었다. 초피나무, 국수나무, 싸리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다래덩굴…. 뽕나무에서 잘 익은 오디도 따먹었다.

그날 오후 마침내 그들이 돌아가고 나는 남았다. 나는 남아, 느닷없이 떠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여행길에 오를 것처럼 배낭을 꺼내 먼지를 털고, 맥가이버칼를 닦고,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고, 서랍에서 여권을 꺼냈다. 그러면서 문득 '파트릭'이 떠올랐다. 그는 로랑 그라프의 소설 <매일 떠나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그는 평생을 철저하게 '떠남'을 준비하며 살았다. 여행용 트렁크와 여행지에서 읽을 책과 자잘한 물건들을 준비하고, 5대양 6대주 어디로든 갈 수 있게 예방주사를 맞고…. 그렇게 그는 40년 넘게 떠날 준비를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유전학자인 그의 아들이 그의 유골을 달에 뿌려주었다. 파트릭의 인생이 던져준 의미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매순간 인생이 여행이라는 것.

나도 지금 파트릭처럼 떠날 준비를 하며, 내 집을 찾아오는 여행자들과 함께 이곳에서 여행 중이다. 그러나 나는 훗날 배낭을 메고 꼭 먼 곳으로 가고 싶다.

숲속 숲속 맑은 물
▲ 숲속 숲속 맑은 물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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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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