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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펴 보자. 2천 년 전 로마제국에서 살았던 로마인들은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그 당시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을까. 물론이다. 로마가도의 주목적은 로마군단의 신속한 이동을 위한 것이었지만 길이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군인 아닌 사람들도 이 길을 통해 이동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활발하게 말이다.

얼마 전 룬드대학 도서관에 가서 로마가도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예상 외로 재미있는 자료가 많았다. 특히 로마가도 연구 중에서는 당시 여행경로와 여행지도에 관한 연구가 흥미로웠다. 이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제10권에도 거론되는 것이니 특별한 것은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가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이런 연구서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 의미 있었다.

2천 년 전 로마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편리한 길이었다. 거기에는 당시 1마일(로마마일, 약 1.5km)마다 이정표가 붙어 있고 역참에 해당하는 스타티오네스 혹은 무타티오네스가 일정 간격(8마일)으로 있어 지금의 고속도로 휴게소 역할을 했다. 60~70km 마다 만시오네스라는 숙소도 마련되어 있어 여행객들은 이 숙소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로마가도를 이용해 제국을 순회한 황제

로마가도 이정표
 로마가도 이정표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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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니다. 여행객들은 오늘날 도로 노선도에 해당하는 여행용 지도(이를 Itinerarium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여행일정이라는 영어 단어 itinerary가 나왔음)를 가지고 다니며 현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고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어떤 노선의 로마가도를 선택해야 할지를 알 수 있었다(현재와 같은 지도도 있었지만 그것은 당시 인쇄술로는 대량 제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지도는 여행객 소지용이 아니라 도서관 소장용이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 개의 유물이 있는데 그 하나가 은잔에 새겨진 문자 여정표이다. 컵의 표면을 빙 둘러서 문자와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숙박시설, 스타티오네스(Stationes) 혹은 무타티오네스(Mutationes)가 새겨져 있고 시설들 간의 거리가 나타나 있다. 여행자는 이것을 들고 다니면서 다음 행선지를 예측했고 여행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비카렐로의 은잔(Vicarello glasses)이라 불리는 것인데, 스페인의 카디츠에서 로마까지의 약 2700km 구간을 표시한 것임
 비카렐로의 은잔(Vicarello glasses)이라 불리는 것인데, 스페인의 카디츠에서 로마까지의 약 2700km 구간을 표시한 것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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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재미있는 지도 타불라페우팅게리아나(Tabula Peutingeriana)도 빼 놓을 수 없다. 이 지도는 4세기 중엽 제작되어 11세기에 모사된 것으로 현재 비엔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길이 6.75m 너비 34cm의 두루마기 지도로 양피지 11장을 길게 이어 맞추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서쪽으론 현재의 영국에서 동쪽으론 인더스 강, 북쪽으론 발트해에서 남쪽으론 사하라 사막에 이르는 도로 정보가 담겨져 있다.

이 지도는 실제의 지형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대충의 방위 개념을 토대로 만든 노선도다. 이 두루마리 지도는 우리의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좀 더 자세하게 그린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행객에게 필요한 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다.

우리의 지하철 노선도에는 노선과 역명 정도의 정보만 있지만, 이 지도에는 로마가도의 노선, 노선상의 도시, 숙박시설(더욱 그 등급까지), 구간 거리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로마제국의 전역을 주유하는 여행객이라면 이 정도의 지도를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간단하게는 은컵 지도를 보았을 것이고, 가도 상의 숙소에 들러 잠시 여유를 가졌을 때는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놓고 긴 여정 전체를 체크했을 것이다.

타불라페우팅게리아나
 타불라페우팅게리아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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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대에 따라 달랐겠지만, 적어도 로마제국의 황금기였던 오현제 시대에는 이 가도가 대단히 안전하게 운영되었음이 기록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이야기다. 알다시피 이 황제는 오현제 중 세 번째 황제인데 살아 있는 동안 로마에 있었던 시간보다 제국을 순행한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도 지중해 연안 곳곳에서 이 황제가 다녀갔음을 알리는 흔적을 볼 수 있는데(대표적인 것이 하드리아누스 문이다), 이 황제는 어떤 방법으로 돌아다녔을까. 당연히 그도 로마가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 황제는 제국을 순행할 때 황제의 위엄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수백 명의 로마군단을 대동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최 측근 몇 명만 데리고 단출하게 다녔다고 한다. 로마가도에 수시로 강도가 나타나 인명을 살상하고 물건을 강탈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어찌 제국의 황제가 그리 다녔겠는가. 그만큼 로마가도는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로마가도에서 얻는 교훈... "성장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야"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선 안 될 것이 있다. 지난 번 실크로드 기행문을 쓰면서 한 이야기인데, 재탕 같지만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속도에 관한 이야기다. 속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곧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엔트로피 증가법칙이라고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문명이 속도를 극한으로 높이면 결국에는 그 문명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고갈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 문명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토록 찬란했던 로마문명이 종언을 고한 것이 바로 로마가도가 만든 비극(물리학적 귀결)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로마가도가 물류의 속도를 너무 높여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고갈로 이어졌고, 이것으로  로마제국은 급속도로 힘이 빠져 결국 이민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만 생각해 보라. 로마가도는 혈관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핏줄이 막혔다고 가정해 보라. 몸 전체가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로마의 물질문명 이면에는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혈관과도 같은 로마가도가 막히는 순간, 로마제국 전체가 곧 마비되었다는 말이다. 아니, 막히지 않았다고 해도 로마제국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급속도로 고갈되었을 것이다.

로마가도는 필연적으로 로마에게 과도성장의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로마가도라는 빠른 운송수단을 확보하자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로마가 한참 흥성할 때는 인구가 이미 백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현대 도시에서 백만 인구야 중소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도시에서 백만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인구이다.

한 도시에 인구가 과잉일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문제점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우범화, 슬럼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물자가 부족할 때는 삽시간에 인플레가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 진다. 그러니 로마가도가 막혀 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을 때를 상상해보자. 끔직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수많은 이민족이 뒤섞여 사는 로마는 곧바로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로마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류문명적 차원에서 볼 때 인류가 만든 이 빠른 속도의 길과 그것이 가져다 준 빠른 성장이 항상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과도 성장이 가져다주는 폐해는 쉽게 고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야기한다. 큰 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때론 작은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인류가 걷거나 기껏 우마차 정도를 이용했던 수 천 년 동안은 에너지 고갈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200년 밖에 안 된 지금, 우리는 에너지의 고갈을 걱정한다. 인류가 지난 두 세기 동안 무척 빠르게 성장한 대가다. 인류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현대 문명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빠른 길을 만들고, 너무 급하게 성장해 온 것이 결국 인류 문명의 종언으로 이어지는 부메랑이 되었다는 것을 뒤 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로마제국이 지속됐으면, 우리 문명도 바뀌었을 것

이런 데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제레미 리프킨의 초기 저작 <엔트로피>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문명의 변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물리적 법칙(그 중에서도 에너지 법칙인 엔트로피)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겉그림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겉그림
ⓒ 세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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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에서 중세의 의미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중세는 로마제국과는 전혀 다른 사회체제였다. 로마제국이 제국 전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적 사회였다면 중세는 한 곳에 가만히 정주하는 정적 사회였다. 로마제국은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다른 사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호의존형 경제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하지만 중세는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도시와 그 인근의 교외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중세인들은 살아갔다. 에너지 소비를 생각하면 중세인들은 로마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이것을 에너지 문명사적 입장에서 보면, 로마가 에너지 고소비의 고도성장 사회였다고 하면 중세는 에너지 저소비의 저성장 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시대의 유럽은 이제 더 이상 로마제국과 같은 고소비의 의존적 경제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세인들에겐 자급자족형 경제를 만드는 것이 살 길이었다.

중세의 이런 저성장 경제를 달리 보면, 중세는 또 다른 동적 문명을 창조하기 위한 준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농경지의 휴경제도와 같은 이치다. 한 농토를 쉬지 않고 경작하면 매년 생산량은 줄어든다. 그것은 지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농부들은 휴경제도를 만들어 일정 기간 동안 특정 토지를 경작하지 않았다. 지력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는 인류 문명사에서 재성장(재도약)을 위한 휴경기에 해당한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사회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뒤이어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 속도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올라간 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중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 고소비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만일 중세가 없이 로마제국이 계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산업혁명은 19세기가 아닌 훨씬 이전에 일어났을  것이고, 인류는 에너지 고갈로 인한 고통을 이미 수 세기 전에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로마제국의 멸망을 인류사, 아니 지구사라는 큰 역사(Big History)적 틀로 보면 그것은 필연적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이 인류사에서 지속되었다면, 오늘 우리의 문명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었을 것이다.


태그:#로마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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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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