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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토) 오후 2시. 실상사에서 열린 박찬승 교수의 '마을에서 본 한국전쟁' 강의를 듣는 생명평화결사 모임
 15일(토) 오후 2시. 실상사에서 열린 박찬승 교수의 '마을에서 본 한국전쟁' 강의를 듣는 생명평화결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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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토) 오후 2시, 남원 실상사에서는 정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6월, 지리산에서 평화를 말하다'란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는 전국에서 50여명이 참석했다.

며칠 있으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3주년이 되는 6·25다. 당시 성인으로 이 전쟁을 경험한 분들은 80대 이상의 노인으로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한국전쟁은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도 '정전' 상태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강연은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가 담당했다. 박교수는 "전쟁 당시 남북한의 군인 사망자가 약 44만이지만 민간인 사망자는 약 65만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구술사학회 회장으로 전국을 돌며 전쟁 당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사례를 수집했다. 

군인보다 민간인 피해가 더 많은 것에 주목해야

한국전쟁 기간동안 이뤚니 민간인 학살은 주로 배후에 있던 남북한 국가권력에 책임이 있지만 마을 주민들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어떤 경우에는 마을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한 마을에서 살던 주민들이, 혹은 이웃마을 주민들이, 심지어는 한 집안 사람들이 좌우로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피해자였던 이들이 나중에는 가해자가 되었고, 처음에는 가해자였던 이들이 나중에는 피해자가 되었다. 박 교수는 "국가권력이 뒤에서 조종한 일이지만 마을사람들이 서로 갈라서서 서로를 죽인 데는 마을 주민들 내부에 이미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갈등 요소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전쟁이 좌우대립과 충돌에 따른 이념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적 대립관계에 뿌리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문맹률이 거의 90%에 달한 농촌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보다는 동성(同姓)마을과 각성(各姓)마을, 양반마을과 평민마을,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지배와 피지배관계, 남한과 북한의 국가권력의 개입, 영향력 있는 리더,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구심과 앙금이 전쟁을 통해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신분 계급 간 갈등

조선왕조 사회를 지배한 가장 중요한 기제는 신분제였다. 양반, 상민, 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는 조선사회를 규정해온 가장 강력한 프레임이었다. 신분제를 유지하는 데 가장 강력한 제도는 지주-소작제라는 토지소유 관계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보통학교가 들어서며 사회가 신분의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자 양반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해방을 전후해 보다 더 큰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신분제는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폭발했다. 그동안 갖은 핍박과 설움을 당해오던 이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전에 천민이었던 머슴, 고직, 산직, 백정, 무당 등은 인민군에 적극 협력했다. 특히 인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은 머슴들이었다. 1950년 봄 대한민국 정부가 농지개혁을 발표할 때 소작농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머슴들에게는 없었는데 인민군들은 자신들에게도 땅을 분배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전쟁기에는 친족 간, 친족 내부의 갈등이나 마을 간 마을 내부의 갈등과 충돌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진도의 한 마을에서는 동족 마을에서 인민군과 좌익측에 의해 희생된 이가 110명, 입산한 이들이 37명, 입산자 가족으로 경찰과 우익에 의해 희생된 이가 20명 등 167명이 희생됐다.

부여의 경우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이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고, 합덕의 경우는 지주 마을과 소작인 마을이 충돌했다. 금산군 부리면의 길씨와 양씨 마을의 경우는 위의 사례와 달랐다. 두 성씨 집안이 좌우로 갈렸지만 두 집안은 서로 사돈관계 등으로 얽혀 커다란 충돌은 없었다. 한국전쟁기까지의 농촌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친족관계였다.

종교와 이념 간의 갈등 

한국전쟁기 민간 사이에 커다란 충돌을 불러온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은 종교와 이념 갈등이었다. 여기서 종교는 주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였고, 이념은 공산주의였다. 인민군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는 관점, 그리고 기독교는 우익이라는 관점에서 숙청 대상으로 간주했다.

'마을에서 본 한국전쟁'이란 주제로 강의에 나선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찬승 교수.
 '마을에서 본 한국전쟁'이란 주제로 강의에 나선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찬승 교수.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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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주요한 위치에서 밀려난 무당도 인민군들의 포섭대상이었다. 사람들이 무당에게 마을에 관한 많은 비밀을 얘기했고 이것은 인민군들에게는 훌륭한 정보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마을에는 반드시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다. 지식인들은 대개 사회주의운동을 해온 경우와 좌익 운동을 해온 경우로 나뉜다. 사람들이 이들을 따른 것은 대개 이들 지도자들이 '똑똑하다'고 여겼기 때문. 당시는 문맹률이 90%에 이르러 이들이 훌륭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 살자"는 공산주의 이념이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반면, 우익쪽 지도자들은 해방 이후 면장을 지낸 인물, 경찰, 우익 청년단에서 활동한 인물, 지주나 마름(혹은 농장관리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식인들과 문중의 영향력있는 인물, 경제권을 장악한 인물은 마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가권력의 마을 개입 

한국전쟁 당시 일어났던 잔혹한 학살을 묘사한 피카소의 그림
 한국전쟁 당시 일어났던 잔혹한 학살을 묘사한 피카소의 그림
ⓒ 파리 피카소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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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농촌 마을은 신분제와 지주제, 그리고 친족관계 등에 기반을 둔 그 나름의 질서와 규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정치보위부를 중심으로 점령지를 통치했다. 각 마을에는 인민위원회, 자위대, 농민위원회, 생산유격대, 민청, 부녀동맹 등을 만들었다. 반면, 국군이 들어온 후 각 마을에는 치안대, 혹은 청년단이 조직되어 부역자들을 색출해 경찰에 넘기거나 직접 처단했다. 

남북의 국가권력은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개입했다. 어느 한 쪽에 서서 다른 쪽 편을 학살하게 함으로써 정권에 충성을 확실히 해두려는 심산이었다. 물론 공포감과 무조건적인 복종심을 유발하기 위한 계산이기도 하다.

이처럼 민간인들의 대량 학살에는 구체적인 지시든 아니면 묵인이든 국가권력의 개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남북의 국가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민간인 학살을 서로 이용했다.

복합적 갈등 구조 - 공동체 정신이 약해서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빚어진 갈등은 양반-평민 신분간의 갈등, 지주 -소작인 간의 계급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 혹은 이념 갈등의 복합구조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힘이 비교적 강했던 곳, 그리고 안팎으로 갈등 요인이 적었던 곳에서는 피해가 적었다.

저 멀리 구름에 쌓인 지리산 천황봉의 모습이 보인다. 60년전 이곳에서는 죽이고 죽이는 살육이 있었다. 누가 이 정적을 깨는 총소리를 냈을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라는 자연의 교훈을 잃어버린 사람들!
 저 멀리 구름에 쌓인 지리산 천황봉의 모습이 보인다. 60년전 이곳에서는 죽이고 죽이는 살육이 있었다. 누가 이 정적을 깨는 총소리를 냈을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라는 자연의 교훈을 잃어버린 사람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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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13년 OECD 각 국가의 행복지수가 발표되었는데, 한국은 36개국 가운데 27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공동체의식이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농촌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집단이기주의, 소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하면서 한국사회는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자리에 참석했던 장태원씨의 지적이다.

"자기들만의 내집단은 철저히 지키고 외집단은 철저히 배척하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이웃 마을, 다른 계급, 다른 종교도 인정하며 상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가가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데 국가가 먼저 갈등을 만들어내고 교육 현장에서도 경쟁만 조장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주장한 박 교수의 "하루빨리 이러한 피해의식을 치유해야 공동체가 통합될 것"라는 말에 모든 참석자들이 박수로 화답하며 강의는 끝났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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